# 지금 대한민국은 제정신이 아니다. 코로나 때문도, 추미애 때문만도 아니다. 자국의 국민이 피살되고 소각당해도 멀뚱하니 쳐다만 보고 손 놓고 있다가 제대로 된 항의는커녕 그 진위조차 알 길 없는 낱장 통지문 한 통에 그나마 간접화법으로 담긴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계몽 군주’ 운운하며 감읍해 하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자국민 피살, 소각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항의 성명은커녕 피살자 아들의 애절한 공개 편지에 대해서마저 “해경의 조사 및 수색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메시지만 던져놓고서 또다시 종전 선언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북한은 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 자정에서 새벽 3시까지 펼쳐진 퍼레이드를 통해 막대한 무력을 과시하며 종전 선언 운운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를 옹색하게 만들었다.


# 비록 그들은 자위용이라 말하지만 공화국의 존재를 위협하면 언제든 선방을 날릴 수 있다고 분명하게 언명하는 것을 보고도 대한민국의 안위를 떠맡아야 할 대통령으로서 그토록 섣부르게 ‘종전 선언’을 입에 담았던 것이 부끄럽고 민망하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다. 어디 그뿐인가. 이날 김정은 위원장의 30분 가까운 연설 중에서 채 30초도 안 되는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라는 한마디에 청와대와 여당은 또다시 고무되어 흥분하지 않았던가. 보기만 해도 지릴 만한, 대륙간탄도미사일 탄두에 장착된 핵을 머리에 이고 남한 전역을 타격하고도 남을 그 막대한 사거리의 수많은 방사포의 포구가 우리를 향해 있는 이 엄중한 현실은 외면한 채 남북 간의 새 물꼬 트는 것에 대한 기대로만 부풀어 있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 나치는 극적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야간에 집회를 갖곤 했다. 193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던 나치스 당대회가 신호탄이었다. 지난 10일 새벽의 북한 노동당 창건일 퍼레이드를 보면서 나치와 히틀러가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히틀러의 신들린 듯한 장광설과 김정은의 만연체 연설도 어딘가 닮았다. 특히나 나치당원들의 감격에 벅찬 표정과 평양 시민들(그들은 물론 전부 노동당원일 게다)과 인민군대 군인들의 경외감에 사로잡힌 듯한 흐느낌은 거의 판박이 수준이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북한 노동당 창건일 퍼레이드를 편집도 없이 통째로 시청하게 되는 나라가 되었나? 도대체 여기가 대한민국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가? 문재인이 대통령인지 김정은이 최고 영도자인지 구분도 안 될 지경이다.


# 지금부터 80여 년 전인 1937년부터 1940년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938년 9월 30일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뮌헨 협정을 맺고 귀국해 “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히틀러의 친필 서명이 담긴 협정 서약서를 흔들며 “여기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가 있다”고 외쳤다. 하지만 이로부터 6개월 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탄하며 이 협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다시 6개월이 지나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마침내 전쟁 위기 속에서 평화를 지켜냈다던 체임벌린은 속수무책으로 1940년 5월에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 뒤를 처칠이 이었다.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유화론자였다면, 처칠은 그런 위장 평화의 허울을 직시하고 히틀러와는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었다. 솔직히 문재인 대통령은 히틀러를 믿었던 체임벌린을 닮았다. 역으로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공 굴리듯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겐 처칠 같은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를 더욱 어둡게 만든다.


# 영국 출신 배우 게리 올드먼에게 2018년 제90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에서 올드먼이 분한 처칠은 이런 말을 남긴다. “우린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승리가 없으면 생존도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처칠은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에 고립된 영국군 40만명을 나치의 포위망을 뚫고 극적으로 탈출시킨다. 그리고 그는 영국 국민에게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을 호소하고 마침내 이긴다. 윈스턴 처칠이 말하지 않았던가. “계속 싸워 나가는 나라는 다시 일어서고, 소리 없이 항복한 나라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단 한 사람의 생명일지라도 지켜낼 수 있는 한 지켜냈어야 마땅하거늘 무자비하게 피격당하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손 놓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대한민국의 존립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면 과장된 것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대한민국의 존립 가치는 북한이 자신들의 보건적 차원에서의 존립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피격하고 소각했던 그 한 생명을 지켜내는 데 있었다.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남녘의 누구라도 조준 사살하고 소각할 수 있는 이들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있고, 우리 모두를 공멸시키고도 남을 핵을 우리 머리 위에 얹어놓은 채 남한 전역을 언제라도 타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방사포를 곳곳에 깔아놓은 자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란 말은 입에 발린 말일 뿐이다. 역사는 반복하진 않지만 분명한 교훈이 있다. 히틀러와의 협정서가 휴지 조각이 되었듯이, 김정은과의 그 어떤 약속도 그의 핵미사일과 방사포 앞에서는 의미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겐 더욱더 히틀러와 손잡으려 했던 체임벌린이 아니라 그에 맞섰던 처칠 같은 인물이 절실한 것이다. 아, 우리의 처칠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