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헛손질로 끝나는 ‘종전선언’," 조선일보, 2020. 10. 20, A38쪽.]


문재인 정권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밀려 그동안 휴면 상태에 있던 한·미 간 문제가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발언을 계기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이 정권의 안보·외교·국방 라인은 대통령의 종전선언 발언을 설명하기 위해 동시다발로 워싱턴을 찾아 미국의 의도를 타진했다. 종전선언이 있으려면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미국의 참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측 설명은 남북 관계가 답보 상태에 있는 만큼 북한의 선(先) 비핵화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먼저 종전선언으로 물꼬를 터서 북한을 끌어들이자는 것이다.


결과는 낭패였다. 미국 측은 ‘남북 관계는 비핵화와 불가분’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만난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은 “문제는 종전선언이 비핵화 과정에서 선후(先後)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또 (종전선언이) 비핵화와의 결합 정도가 어떻게 되느냐에 있을 뿐”이라고 했다. 한국 측이 선(先)의 입장인 데 반해 미국은 후(後)의 입장이고 한국은 종전선언이 비핵화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는 데 반해 미국은 비핵화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발언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의도가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지를 간과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전술적 핵심 과제는 중국이다. 중국을 견제하고 중국의 팽창을 억제하는 것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 길이라고 보고 있다. 동북아는 부차적이다. 미국이 유럽의 나토(NATO) 판인 인도·태평양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를 구성한 것은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참여를 종용하고 있지만 문 정권은 중국의 눈치를 보며 발을 빼고 있는 처지다.


미국은 지금 동북아의 대치 구도에서 어디에 대(對)중국 전선(前線)을 긋느냐에 골몰하고 있다. 이 판국에 한반도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면 한반도 전체가 명실상부하게 ‘중국 색깔’로 칠해질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론은 오늘날처럼 중국이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미국에 맞서는 세력으로 팽창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시대의 발상이다. 미국이 동북아에서 철수하는 것은 아시아를 중국에 넘겨주고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반도에서 쉽사리 발을 빼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시대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종전이 선언되면 유엔사(司)가 해체돼야 하고 미군이 철수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한국이 미국의 군사적 통제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 대통령은 끈질기게 한국에서 미국의 존재를 희석하는 문제, 즉 전작권 이양, 사드 배치, 한·미 군사훈련 축소 그리고 마침내 종전선언까지 순차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그 속내를 미국은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동북아 사태는 2주 후에 있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그리고 장기적 시각으로 중국의 지도부가 더 민주적 방식으로 교체될 수 있느냐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되거나 진화할 수 있다. 미·중 관계가 충돌이 아니라 협력으로 방향을 틀면 동북아의 긴장은 당연히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이다. 그 대표적 변화의 모습은 종전선언 수준이 아니라 미국과 북한의 관계 정상화와 북한·일본 관계 개선으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통일이 최선이지만 동북아의 긴장 해소와 평화 유지를 위한 차선의 길은 미국과 북한이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는 길도 미·북 관계 개선에서 출발할 수 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미·북, 북·일 관계의 정상화는 한반도 전체, 한민족 전부를 위해 바람직한 통로(通路)가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의 존재가 결정적이다. 중국이 가로막으면 북한은 미국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고 한국도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쉬운 길은 없다.


종전선언 같은 프로파간다와 북한 심기 건드리지 않기 따위로 언저리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긴 안목의 전력 전술로 나아가야 한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북한으로부터의 모욕을 참는 것이 북한을 고려하고 배려하는 것인지 몰라도 대한민국 국민과 우방의 신뢰와 존경을 잃고 있다. 우리 국민뿐 아니라 북한으로부터도 무게감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별 실효성 없는 발언이나 제안으로 당사자들(미국 또는 북한)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은 그만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