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우리 공무원 살해 및 소각 사건이 있기 전인 지난주 초, 야당(국민의힘) 의원 2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보수의 가치를 얘기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일찍이 이런 거짓말 정권, 이런 폭언·실언 폭정을 일삼는 정권, 그러고도 이렇게 뻔뻔한 정권을 본 일이 없다. 기본을 다지고 익힌 야당이라면 이런 막가는 집권 세력을 물리치는 일에 이렇게 허덕일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야당은 무엇을 하고 있나?” 야당 의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지역에서 유권자들을 만나 보면 보수를 꼰대 이미지로 본다. 유권자들은 좌파 정권의 행보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현 야당을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이 우리 당의 고민이다. 우리도 꼰대 보수의 이미지를 벗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엊그제 주간조선 인터뷰에서 한 말이 오늘날 야당의 심경을 대변한다. “국민이 ‘보수’라고 하면 갖게 되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다. 그런 보수는 되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보고) 좌클릭했네, 중도로 가네 하는데 보수라고 고정불변 무조건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새로운 것을 수용하자는 것이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노선에 많이 영향받고 ‘보수 개혁’ 쪽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8년을 쉬었다가 지난 4·15 총선에서 다시 유권자를 만난 P의원은 “유권자의 관심이 많이 달라졌다. 과거에는 나라의 안보·외교·국제 상황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는데 이제 그런 것에는 별 반응이 없다. 내 주변, 우리 가족과 동네의 관심사가 전부인 듯했다”고 했다. ‘삼호어묵’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주부는 놀랍게도 “나도 문재인과 민주당 찍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 정권의 실정에 분노할 뿐 그 대안으로서 야당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안철수씨도 엊그제 인터뷰에서 “지금으로서는 야권 단일화해도 진다. 국민은 야권을 대안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야 문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왜 저렇게 안면몰수하고 뻔뻔하게 나오는지, 무엇을 믿고 국민 목숨 하찮게 여기고 북한에 굽신거리는지 알 것 같다. “그래 봤자 너희 야당이나 그 지지 세력들만의 ‘분기탱천’일 뿐, 그것이 표(票)로 연결될 구도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것 같다. 갤럽 여론조사(공무원 피살 사건 이전의 것이지만)에서도 20대를 제외한 나머지 세대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문 정권이 퇴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 보수가 정신 차리고 들어와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의 진정성 있는 표심(票心)이 움직이지 않는 한, 문 정권은 저들의 주장대로 10년 넘게 갈 것이다. 그 어간에 한국의 보수는 망하고 말 것이다. 내년 4월 서울·부산의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기면 집권 세력의 기고만장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국민 목숨이 인질 잡히고 북한의 선의에 매달리는 사태쯤은 별 뉴스거리가 아니게 될 것이다. ‘평화’에 올인하고 ‘공정’을 상품화하고 북한과 어떤 형태로든 한 묶음으로 엮어가려는 ‘통일 방안’이 시도 때도 없이 제기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무시될 것이다. 조국, 추미애 유(類)의 국민 약 올리기 행태나 ‘적폐-공정’ 게임은 활성화할 것이고 대한민국의 대북(對北) 추종, 한·미 동맹의 이완은 불 보듯 뻔하다. 그 여세로 2022년 대통령선거마저 좌파가 가져가면 이 나라의 좌파화(化)는 완결될 것이다.


야당은 국민이 보수 야당을 ‘꼰대’로 본다며 어정쩡하게 중간 어디쯤에 서서 어디로 갈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머뭇거리고 있다. 차라리 당 전체로서 방향을 정했으면 좋겠다. 탈원전·기본소득·부동산·공수처·대북 이런 주요 노선에 대해 ‘우리가 집권하면 이렇게 하겠다’고 대안적 공약을 천명했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고 적당이 반(半)은 이쪽, 반은 저쪽에 걸치고 가면 집권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대통령님 어디 계십니까?” 물을 것이 아니라 “야당 지금 어디 계십니까?” 묻고 싶은 심정이다.


야당은 국민의 표를 얻기 위해 당의 화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훌륭한 정치는 국민에 이끌려 가기보다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을 ‘눈앞의 이익’에서 이끌어내 나라의 앞날을 얘기하는 장(場)으로 유도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