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역사적 위상

2006.04.19 14:08

관리자 조회 수:1086 추천:148

[김충남, “李承晩 대통령의 역사적 위상,” 미래한국, 2006. 4. 1, 5쪽; 하와이 동서문화센터 연구위원.]

지금의 세대는 오늘의 한국이 어떻게 이룩되었는지 모르는 역사의 문외한들이다. 그러면서도 ‘역사바로세우기’ 또는 ‘과거청산’이라는 구호 아래 역사를 왜곡, 파괴하고 있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나라”, “분단주의자 또는 반민족 반통일 세력이 세운 나라”, “불의와 기회주의가 득세했던 역사”라고 국가정통성마저 뿌리째 부정하고 있다. 국난을 극복하고 자랑스러운 나라를 건설하는 데 기여한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무시하고 지도자가 없다고 규탄하고 있다. 과거 지도자들이 그렇게 잘못되었다면 한국이 어떻게 개발도상국 중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되었겠는가. 특히 이승만 대통령만큼 위대한 역사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잘못 알려지고 비난받는 지도자도 없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열거해보자. 첫째, 이 대통령은 자유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 박사의 투철한 자유독립정신과 소련공산주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반공이념에 힘입어 이룩된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민주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확고한 의지가 없었다면 우리 나라는 신탁통치가 되었거나 김구의 주장처럼 김일성과 타협하여 좌우합작정부를 수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통일정부가 수립되지 못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당시 소련이 받아들일 수 없는 통일정부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련은 미국을 설득하여 한반도에 좌우익 연립정부를 세운 후 연립정부를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미소 공동으로 추진했던 신탁통치 하의 좌우익 연립정부 수립계획에 대해 이승만 박사의 단호하고 끈질긴 반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둘째, 이승만 대통령은 단호한 반공정책으로 나라를 지켰다. 이 대통령은 공산주의는 인간 본성을 거역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40년간 일본의 노예로서 고통받아 온 우리 민족이 또 다시 공산세력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공산세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공산세력은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를 무산시키기 위해 제주 4·3무장폭동을 일으켰고 정부수립 직후에는 여수[여순]반란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1948-1949년에 걸친 공산세력의 총공세를 국가보안법 제정, 토지개혁 등 효과적인 반공정책으로 막아냈다. 당시 동유럽, 중국, 동남아에서 공산세력이 빠르게 팽창하고 있었으며 한국은 공산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았다. 그래서 당시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기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셋째,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중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6·25전쟁에서 미국은 3만 여 명이 전사했지만 한국군은 그 10배 이상인 32만 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되었고, 전선의 3분의 2는 한국군이 담당했을 만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정책결정과정을 미국인들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고 영어에 능통했으며 뛰어난 외교전략가였기 때문에 전쟁 중 맥아더 장군을 위시하여 미국 지도자들과 전쟁수행 문제를 긴밀히 협의할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은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 할 것 없이 모든 전선, 모든 부대를 찾아 장병들을 격려했기 때문에 장병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터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이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하여 안보의 울타리를 튼튼히 했다. 한미방위조약이 없었다면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 공산세력이 남한공산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쉬웠을 것이다. 또한 과도한 국방비 부담으로 국민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고 경제성장은 생각할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한미동맹은 지난 반세기 한국 안보와 번영과 자유의 초석이 되었다. 휴전협정이 얼마나 위험하며 한미방위조약이 왜 중요했는가는 월남의 경우를 보면 분명한 것이다. 미국과 공산 측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지 2년 만에 월남은 공산화되고 말았다. 미국은 이 조약을 빌미로 월남에서 철군했고 그래서 공산군은 마음 놓고 월남을 점령했던 것이다. 만약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없이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더라면 한국은 월남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으로, 이 대통령은 교육입국을 통해 국가발전의 핵심적 기초를 마련했다. 해방 당시 우리 국민의 78%는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다. 이 대통령은 열악한 제반 여건에도 불구하고 6년제 의무교육을 채택하는 등 혁명적인 교육정책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50년대 말에 이르러 국민 95%가 글을 읽게 되었고 신문을 보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0년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 중에서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로 평가받았으며 그리하여 잘 교육된 국민은 급속한 경제발전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역사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비난의 대상이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집단이 조직적으로 조작하고 왜곡 선전했기 때문이다. 북한공산정권은 이승만만 제거하면 공산통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선전선동 수단을 총 동원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분단을 주도한 정부’, ‘친일분자들이 득세하는 정부’라고 비난했다. 우리 사회 일부에서는 김일성은 친일파를 청산했는데 이승만정권은 친일파를 옹호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김일성은 공산독재체제 수립을 위해 친일파 뿐만 아니라 동조하지 않는 세력은 모조리 숙청했다. 그러나 건국 직후 사정은 공산세력의 위협을 막는 것이 더 시급했다. 친일분자를 제거했다면 치안과 국방은 좌익세력이 장악하게 되었을 것이고 나라는 공산세력에게 넘겨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둘째, 이승만정부가 인권을 침해하고 대통령권력을 남용했다고 비난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나라를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 대통령은 “우리는 경제든 그 무엇이든 다시 재건할 수 있지만 나라를 지키는 데 실패한다면 모든 것을 가졌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건국 초기 특히 공산침략을 받았을 때, 반공과 국가안보가 최우선 가치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오늘의 기준으로 결코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라를 구한 이 대통령을 인권을 침해한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계속되는 정치적 격변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따라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을 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대한민국의 건국이라는 책을 보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혼란과 갈등을 부각하고 있는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일사불란한 발전과정을 수록하고 있다.

이 같이 된 데에는 지식인들이 브루스 커밍스와 같은 외국 수정주의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커밍스는 다분히 친공적인 입장에서 이승만정부의 정당성을 폄하했지만 김일성의 스탈린식 가혹한 탄압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그 이유로 남한에는 국민의 저항이 있었지만 북한에는 모두가 김일성을 지지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김일성이 그렇게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면 왜 해방 당시부터 1947년 중반 사이에 매일 평균 4,000여 명이 남하했으며 북한 인구의 17%에 달하는 180만 명이 남한으로 내려왔는가?

해방 당시 북한은 모든 면에서 남한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오늘날 완전히 파멸상태에 이르렀고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지만, 한국은 자유와 번영이 넘치고 있다. 우리는 이승만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제도를 도입하여 계승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엄청난 국력차를 볼 때, 남한 인구가 북한의 두 배가 넘는 것을 고려할 때,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역사적 순리다. 이것은 이 대통령이 그토록 열망했던 민주통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통일시대의 역사를 준비하려면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념을 바로 세우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민주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남산 위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과 기념관을 세워 후손들이 오래오래 민족 최고 지도자로 숭상하고 기리게 해야 할 것이다.

주소 : 04072 서울특별시 마포구 독막로 26 (합정동)ㅣ전화 : 02-334-8291 ㅣ팩스 : 02-337-4869ㅣ이메일 : oldfaith@hjdc.net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