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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친일반민족조사위의 발표를 보고

2009.12.10 15:52

관리자 조회 수:1179 추천:170

[사설: “외눈박이 친일반민족조사위의 발표를 보고,” 조선일보, 2009. 11. 28, A31쪽.]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7일 1905-1945년 일본 제국주의 강점 시기 1005명의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보고서에는 이완용 박제순처럼 조선왕조의 고관(高官)으로 일제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대가로 작위를 받거나 친일 단체인 일진회 회장 이용구처럼 일왕에게 한일합병 청원서를 제출한 공로로 한일합방 공로 은사금(恩賜金)을 받았던 인물, 그리고 총독부 고위 관료로서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 통치기구에서 핵심 역할을 했던 인물, 헌병.밀정.고등계 형사로서 독립운동가를 체포.고문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일제의 손발이 돼 악질적으로 동포를 학대.탄압했던 인물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대부분 광복 직후인 1949년 친일세력 청산을 위해 만들어졌던 반민족행위처벌특별위원회(反民特委)가 조사를 위해 작성했던 명단에 이미 올라 있던 인물들이다. 반민특위는 극악했던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 시기를 막 빠져나왔던 시기에 만들어져 국민 전체가 누가 일제를 위해 진짜로 몸과 마음을 팔았고, 누가 진짜 일제의 앞잡이로서 동포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고문했는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상황에서 활동했다. 반민특위 위원과 조사관들은 비밀 독립운동 단체의 회원으로서 일제의 통치에 맞선 독립운동가나 일제가 강제 징집했던 학병을 탈출해 중국 본토나 만주에서 광복군에 가담했던 인사들이었다. 조사관의 이름과 경력은 당시 언론에 공개됐다. 조사관들의 독립운동 체험과 국민들의 생생한 기억이 종합돼 작성한 반민특위 조사 대상이 688명이었다. 반민특위 총무과장 겸 조사관을 지낸 이원용씨는 “광복 직후의 친일파 청산 의지는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 반민특위가 작성했던 명단이 그 당시의 최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번에 4년 동안 377억원의 예산을 들인 조사결과라며, 60년 전 반민특위가 작성한 688명에 300여명을 추가하면서 유진오 백낙준 김활란 고황경 이숙종 등 교육계 인사, 김동인 김기창 서정주 유치진 노기남 등 문화.종교계 인사, 방응모 김성수 등 언론계 인사, 백선엽 신현준 등 군 원로들을 추가로 포함시켰다. 일제 말 전시동원 체제에서 일제의 강요로 학병 권유 연설을 했거나 그런 내용의 글을 썼거나 일제가 조선의 유지(有志)와 지식인들을 강제로 얽어매 조직했던 임전보국단 등 전쟁 지원을 위한 일제 관변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게 이유다.

그러나 일제의 학병 권유 강연장 단상(壇上)에는 일제가 강제로 동원한 조선의 유지들이 연사(演士)로 앉아 있었고, 단하(壇下)의 청중석에는 일제가 강제로 동원한 연희전문 보성전문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단상.단하가 함께 일제에 강제로 끌려나왔지만 이 자리가 진심을 말할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단상.단하가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을 안으로 삼키며 함께 울었다는 것을 세상이 모두 알고 있었다. 광복 후 학병 권유 연설장에서 연사들의 선동에 떠밀려 학병에 지원했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하의 학생으로서 훗날 반민특위 조사관이 됐던 이들은 진짜 악질적 부일(附日) 협력자를 제외하고는 강제동원된 연사들을 문제 삼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언론에 학병 권유문을 발표한 사람 중에 자기가 진짜 일왕(日王)의 자식이나 된 듯이 날뛰던 무리도 있었다. 반민특위는 물론이고 당시 국민은 그들이 누군지 다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반민특위의 명단에는 그들의 이름만 올라 있었다.

일제 강압 통치하에서 중국과 미국으로 탈출했던 극소수 인사를 제외한 당시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은 조선이 이민족(異民族)의 압제를 벗어나 독립의 날을 기약(期約)하려면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우고 언론을 통해 민족의 잠든 얼을 일깨우고 종교를 통해 정신적 자주(自主) 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태평양전쟁에 광분(狂奔)한 일제는 바로 이 대목을 약점으로 잡고 학교 문을 닫겠다, 신문사를 폐간하겠다, 교회 문을 닫겠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그러나 좌우 대립의 어느 한편에 서서, 처참한 식민지 현실에 무지(無知)하거나 무지한 체하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과 조사관들은 유진오 백낙준이 보성전문.연희전문 학생들에게 민족의 진로를 일깨웠던 1000번의 강의에는 일부러 귀를 막고, 신채호 문일평 한용운이 우리 말 우리 글이 일제에 목 졸려 죽음에 몰리던 상황 속에서 한글을 붙들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지상(紙上)을 통해 고구려의 웅대한 혼(魂), 백제의 영화(榮華), 신라 화랑(花郞)의 충용(忠勇)을 들어 잠든 민족의 정신을 일깨운 수천 편의 논설에는 눈을 감고, 노기남이 명동성당에서 무거운 짐을 진 식민지 백성을 어루만지던 강론을 애써 모른 체하며, 김활란 고황경이 봉건의 틀에 갇혀 숨죽여 살던 조선 여성을 해방시키려 노력했던 외로운 고투(苦鬪)를 외면한 채 그들 이마에 친일 부역자(附逆者)의 도장을 마구잡이로 찍어냈다.

광복 후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그리고 백낙준은 고려대학과 연세대학 총장으로 두 대학을 세계의 대학으로 키우는 기틀을 만들었고, 김활란 고황경은 이화여대와 서울여대의 오늘을 일궜으며, 백선엽은 북한의 6.25 침략으로 낙동강변까지 밀려났던 전세(戰勢)를 다부동 전투의 선두에 서서 뒤엎어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신현준은 해병대를 이끌어 북한군을 몰아내고 9.28 서울 수복 후 중앙청을 탈환했으며, 소설가 김동인, 화가 김기창, 시인 서정주, 극작가 유치진 등은 모두 20세기 한국 예술의 밑거름을 뿌렸고, 김성수와 방응모는 자신의 전 인생과 전 재산을 민족언론, 민족학교의 건립에 쏟아부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6.25 때 북한군에 피랍돼 이북(以北) 산하에 외롭게 뼈를 묻어야 했다.

외눈박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한민국 수립 6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키고 키운 이들을 친일의 오명(汚名) 속에 빠뜨려 파묻으려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이고 누구를 쓰러뜨리기 위해서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든 전(前)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3.1절 기념사에서 “한국 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고 규정했다. 만일 대한민국이 정말 그런 나라였다면 오늘 우리가 5000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의 선진국을 목전(目前)에 두고 민족의 힘을 모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그들이 대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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