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칼럼에서 월성1호기 관련 감사원 감사가 마피아 재판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전개되고 있다고 썼다. 진통 끝에 발표된 감사원 감사보고서를 보니 ‘월성1호 폐로’를 겨냥한 2018년 봄의 청와대·산업부·한수원의 작전은 실제 조직 범죄단 움직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①최윗선 지시는 측근 통해 선문답처럼 하달: 산업부·한수원은 조기 폐쇄가 결정되더라도 2년 반은 더 가동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일 청와대 행정관이 비서관의 지시를 받아 산업부 원전과장에게 “대통령이 월성1호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지 질문했다”는 말을 전달하면서 산업부 방침은 바로 ‘조기 폐쇄 의결 즉시 가동 중단’으로 바뀌었다. 대통령은 궁금해 묻기만 했다는 것인데 아래서는 일사불란 움직였다.


②증거를 남기지 말라: 원전과장은 4월 4일 한수원 본부장을 호출해 ‘즉시 가동 중단’ 방침을 통보했다. 통보는 구두로 이뤄졌고 공문(公文) 형태 증거는 남기지 않았다. 5월 11·14·18일엔 산업부·한수원·회계법인이 경제성평가의 입력 변수 수정을 논의했다. 14일 회의에서 산업부 실무자는 회계법인 측 준비 자료에 ‘5월 11일 산자부 미팅 결과 수정’으로 적힌 것을 보고 “산자부가 다 바꾸라고 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며 ‘산자부’란 단어를 삭제하게 했다. 18일 회의에선 한수원 자료에 자기 이름이 적힌 것을 보고 빼도록 요구했다. 이 실무자는 감사원 감사가 진행되자 2019년 12월 1일 밤 사무실 컴퓨터에서 관련 문건 444건을 삭제했다.


③지시는 무조건 이행돼야: 회계법인은 월성1호의 이용률을 85%로 잡은 경제성평가 초안(계속 가동이 즉시 폐쇄에 비해 3427억 이익)을 작성했지만 산업부·한수원의 강요로 아홉 차례나 이용률·판매 단가를 바꿨고 최종 열 번째 평가에서 계속가동 이익을 224억원으로 축소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④공갈 협박도 불사: 산업부 원전과장은 회계법인 관계자에게 “장래 이용률은 30~40%밖에 안 될 것”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막말로 우리가 원전 못 돌리게 하면 이용률 나올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회계법인 측 반론을 잘라버렸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맞추기 위한 작업이 돼버려 기분이 씁쓸하다”는 이메일을 한수원에 보냈다. 산업부 과장·실무자는 2018년 2~3월 한수원에서 이사회 의결 연기 얘기가 나오자 “청와대가 6월 19일 탈원전 선언 1주년 행사와 관련해 민감하게 보고 있다” “인사상 피해가 없기 바란다”고 협박했다.


⑤방해 세력은 우회, 또는 사전 제거: 월성1호 폐로는 국회 법 제정을 통해 추진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산업부는 2017년 10월 진작에 ‘한수원 이사회 의결’로 방향을 정해놨다. 그즈음 마무리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분위기(공사 재개로 결론)를 보고는 국회 토론에 부치면 성사시킬 수 없다고 봤을 것이다. 반면 한수원 이사진은 자기들 주머니 속 공깃돌이었다. 5월 초 사외이사 세 명을 교체했는데 한 명은 탈원전 활동 교수, 또 한 명은 여당 원외 인사였다. 6월 초엔 이사회 의장도 바꿨는데 원래 의장이었던 조성진 경성대 교수는 6월 15일 이사회에서 유일하게 조기 폐쇄에 반대한 사람이다. 조 교수는 “아무 사전 통지 없이 밀려났다”고 했다.


⑥변호사를 동원한 법률 대비: 한수원은 조기 폐쇄 의결 경우 이사들에게 민사상 책임과 형사상 배임죄가 적용되지 않는지 법무법인 두 군데에 문의했다. 법무법인들은 ‘가능성 낮다’고 회답했고, 한수원은 법률 검토 결과를 들어 사외이사들을 안심시켰다.


감사원은 이상의 편법·왜곡을 조목조목 밝혀내고도 ‘종합 판단한 정책’이라며 ‘조기 폐쇄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면죄부를 줬다. 이용률 60%도 ‘불합리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징계를 받게 된 것은 자료 삭제에 관여한 산업부 국장과 실무자의 두 명뿐이다. 당시 청와대 비서관, 장관도 빠져나갔다. 한수원 사장은 ‘엄중 주의’만 받았다. 핵심 행동대원이었던 산업부 과장도 면책됐다. 앞으로 감사원 정책 감사는 겁낼 게 없게 됐다.


공무원들은 이제부터 부당한 지시라도 상관이 시킨 것은 시킨 대로만 하면 뒤탈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잘못된 정책에 대해선 문서 자료를 남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청와대는 자기들이 성역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더 기고만장해질 것이다. 또 이번 일로 자기 편 감사위원들의 쓸모가 입증됐으므로 현재 한 자리 비어있는 감사위원에도 반드시 권력 추종 인사를 앉히려 할 것이다. 감사원은 원장이 ‘흰 것, 검은 것을 가려내자’고 달려들었지만, 인사권 독립 없이는 권력의 전횡과 일탈을 견제할 수 없는 기관임을 입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