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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인명사전 편찬위 역사 평가방식 문제 있다



[이영훈, “친일 인명사전 편찬위 역사 평가방식 문제 있다,” 미래한국, 2008. 6. 7, 5쪽; 자유기업원, 5월 18일자;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지난 4월 29일 친일 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4,700여 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였다. 친일 인명사전 편찬위원회의 활동은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한국인이 지난 20세기와 대화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동 위원회가 20세기와 대화하는 방식에는 다음의 세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첫째, 1905년 또는 1910년 대한제국이 패망한 것은 소수의 반민족 친일파가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둘째, 일제가 한국을 강제적으로 지배한 그 시기에 친일과 반일 또는 협력과 저항의 경계선은 명확하였다. 셋째, 해방 후 반민족 친일파가 여전히 대한민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통에 역사의 정의가 사라지고 정치.사회의 부조리가 심화되었다.


해방 이후 얼마 동안 한국인들은 이 같은 전제에서 일제가 한국을 지배한 과거사와 대화하였다. 그 전제에서 그들은 친일파를 하루라도 빨리 청산하는 것이 새로운 국가 건설에 요구되는 필수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세월이 60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까지 세 가지 전제가 타당한 것은 아니다. 과거사에 대한 정보가 일층 풍부해진 것이 한편의 원인이라면, 과거사로부터 얻고자 하는 교훈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또는 대한제국은 소수의 반민족 세력이 준동했기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후반에는 심각한 경제 위기가 조성되었다. 그에 따라 사회적 혼란이 점점 심해졌다.


이 같은 도전을 맞아 조선왕조의 정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자연과 인간세계를 이해하는 지성도 좁은 조선성리학의 틀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악순환이 거듭되는 가운데 조선왕조는 개항(1876) 이후의 내외 도전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전후 사정이 이러했음을 잘 알지 못하고 왕조가 쓰러지는 현장에서 활동했던 몇몇 정치가에게 왕조 패망의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왕조 패망의 구조적 원인을 보다 과학적으로 인식하게 된 오늘날에서마저 그러한 생각을 고집해서는 곤란하다.


일제 하 식민지기에 친일과 반일 또는 협력과 저항의 경계선이 명확했다는 생각에는 당시의 한국인들 모두가 오늘날과 같은 강렬한 민족의식을 공유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지만 최근의 연구가 명확히 하고 있듯이 한국인들이 강렬한 민족의식을 공유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통해서였다.


‘민족’이란 말은 20세기에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다. 전통 한국어 가운데 ‘동포’나 ‘겨레’와 같은 말이 있긴 했지만, 그러한 의식 상태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옛 종주국인 중국을 대신해서 일본이 들어오자 세상이 달라졌다고 간주했다.


협력과 저항의 경계선이 불투명했던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국내외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이 오늘날 우리가 전선이라 부를 정도로 강력하게 또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일부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장차 우리 민족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 시대는 오늘날의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닌 한국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안개 자욱한 새벽길의 혼돈이었다.


1948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반민족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거나, 반민족 친일파가 지배세력으로 군림한 나라였다는 인식도 실제로는 공산당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에 저항했던 정치세력이 과대 포장한 선전구호에 불과한 것이었다.


경찰, 헌병으로서 독립운동을 노골적으로 탄압했거나, 총독부 관리로서 일제의 지배정책에 기탄없이 협조했던 악질적인 ‘부일배’들은 대개 해방 후 지방 단위에서 자생적으로 전개된 우리 민족의 공격을 받아 제거되거나 축출되었다. 이름난 친일파가 대한민국의 고위 관리로 등용된 적은 전혀 없었다.
총독부가 구축한 ‘식민지 국가’(colonial state)의 행정, 치안, 징세, 사법 기능이 대한민국으로 계승된 것은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약 12만에 달했던 총독부 각급 관서의 하급관료, 경찰, 군인, 교사, 기술직 등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되었다. 그것을 두고 친일세력이 나라를 세웠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필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전술한 대로 식민지기는 세상이 바뀌는 일대 혼돈기로서 협력과 저항의 경계선은 극히 불투명하였다. 그런 가운데 ‘식민지국가’를 매개로 서양 기원의 근대문명이 전파되어 왔다. 새로운 문명의 학습을 위해서는 일제와의 협력이 불가피하였다. 그렇지만 그 길은 장차 우리 민족이 근대국가로 독립할 길이었다. 이른바 ‘주저하는 협력자’들의 생각은 그와 같았다.


21세기 초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선진사회로의 진입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과제를 앞두고 있다. 거기에는 한국인들을 하나의 잘 통합된 문명공동체로 결속하는 선진적인 역사의식이 필수적이다. 그 새로운 역사의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한 진지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20세기 우리 민족의 고난기에,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우리 조상들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그것이야말로 20세기 우리 역사의 주류인 것이다.


그런 역사를 두고 소수의 반민족 친일파가 지배세력으로 군림한 오욕의 역사라고 매도해서야 되겠는가? 친일문제로 더 이상 사회가 갈등하고 소란스러워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이미 그야말로 말단지엽의 문제이다. 역사의식의 일대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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