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현, "‘대깨문’식 문화혁명," 조선일보, 2020. 11. 4, A31쪽.]


1950년대 말 마오쩌둥의 경제 실험인 ‘대약진 운동’ 실패로 4000만명이 죽었다. 문화대혁명의 희생자는 그 10분의 1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문혁 광풍이 가장 끔찍했다고 한다. 왜 그럴까.


50년 전 문혁 때 휘두른 폭력을 뒤늦게 반성하는 홍위병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이 1966년 천안문 광장에서 마오의 팔에 붉은 완장을 채워줬던 쑹빈빈(宋彬彬)이다. 100만 홍위병이 환호하는 사진이 인민일보 1면에 실리면서 문혁이 폭발했다. 당시 스승을 때려 숨지게 했던 쑹은 “평생 괴로웠고 후회했다”고 했다. 그러나 1200만 홍위병 전부가 과거를 뉘우치는 것은 아니다. 문혁의 도화선이 된 대자보를 썼던 베이징대 강사 녜위안쯔(聶元梓)는 몇 년 전 “나는 후회할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당의 요구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했다. 다소 과격했지만 ‘마오쩌둥 수호’와 ‘우파 청산’을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는 게 상당수 홍위병의 생각이라고 한다.


반면 문혁 피해자들은 지금껏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바보 모자’를 쓰고 이리저리 조리돌림당했던 기억을 떨치지 못해 입조심하고 사는 것이 버릇이 됐다. 자신이 당한 고통을 직접 고발하기도 어렵다. 공산당 유력 인사가 된 홍위병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 형식을 빌리곤 한다. 인기를 끌었던 소설 ‘루판옌스(陸犯焉識)’는 10년간 오지로 쫓겨났던 한 교수가 돌아와 보니 아내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영화로 만든 게 장이머우 감독의 ‘귀래(歸來)’다. 해외에서 공산당 공격에 앞장서는 반체제 인사가 된 경우도 있다. 문혁과 홍위병이 남긴 상처에는 아직도 피가 배어 있다.


마오쩌둥은 “동지와 적 구별이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선동했다. 자신의 경제 실험을 비판하거나 이념보다 실용을 내세우면 누구든 ‘적’으로 몰았다. 선전 기관은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고 기름을 부었다. 누군가 대자보로 ‘좌표’를 찍으면 홍위병들이 집단 린치를 가했다. ‘6·25 사령관’ 펑더화이도 그렇게 당했다. 교통 신호등의 빨간색이 정지 신호라는 것도 우파 사고라며 바꾸려 했다. ‘혁명’과 ‘적’이란 구호 속에 광기가 번뜩였다. 중국 역사가 통째로 뒷걸음질쳤다.


같은 국민을 동지와 적으로 나누고 비판 세력을 ‘좌표’ 찍는 것은 문재인 정권 인사들도 잘하는 일이다. 문 대통령이 국회에서 ‘협치’를 강조하던 날 야당 원내대표는 청와대 경호실의 몸수색을 당했다. 전(前) 대통령은 징역 22년을, 전전(前前) 대통령은 17년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양승태 대법원을 겨냥한 재판은 100번을 넘겼다. 무슨 혁명의 적이라도 되나. 법무부 장관은 자신을 비판한 검사를 거론하며 “커밍아웃 좋고요, 개혁이 답”이라며 보복을 시사했다. 장관의 ‘좌표 찍기’에 동료 검사 300명이 반발하자 여당 원내대표는 “특권 검사들”이라고 편을 갈랐다. 한번 좌표가 찍히면 대통령 극성 지지자들의 벌떼 공격을 받아야 한다. ‘윤미향 비리’를 폭로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마저 ‘치매 노인’으로 몰렸다. 이런 행태를 대통령은 ‘양념’, 여당 대표는 ‘당의 에너지’라고 옹호했다.


중국인들이 대약진 운동보다 문혁을 더 끔찍하게 여기는 건 국민을 두 쪽 내고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에도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 마오가 이상주의에 빠져 망친 경제는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으로 살려냈다. 그러나 홍위병이 준동하며 갈라친 국민 마음은 반세기가 지나도록 봉합되지 않고 있다. 이 정권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도 ‘국민 분열’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