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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분리

2006.06.21 09:36

관리자 조회 수:2245 추천:184

성경적 분리
  

성경은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지만 또한 어떤 이들과의 교제의 단절에 대해서도 밝히 가르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권징의 성실한 실행'을 참 교회의 한 표로서 가르쳐왔다(스코틀랜드 신앙고백 <1560년>, 제18항; 벨직 신앙고백 <1561년>, 제28항, 제29항; Hermann Hoeksema, Reformed Dogmatics, pp. 617-621;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ics, pp. 668-671).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분리의 원리'는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권징의 교훈 속에 들어 있는 원리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제와 분리의 원리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의 입장 중 어느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지 확인할 수 있다.



교제치 말아야 할 대상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지만, 다음의 네 부류의 사람들로부터는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불신자들

첫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불신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제'란 교회적 교제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나누는 영적 교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서 나누는 이 교제는 특히 성찬식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잘 표현된다.

고린도후서 6:14 -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세상과 교회,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있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이므로, 교회적 교제에는 어떤 한계선이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오라고 초청되지만, 믿는 자만이 성도로서의 영적 교제를 서로 나눌 수 있다.

이단자들

둘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단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16:17, 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너희가 배운 교훈 혹은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7-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 . .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4,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더욱이, 이단의 성격들을 생각할 때, 성도와 이단간의 교제의 단절이 필요함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첫째로, 이단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사상이다. 갈라디아서 1:8,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둘째로, 이단은 멸망케 하는 사상이다. 베드로후서 2: 1,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셋째로, 이단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 디모데후서 2:17, 18,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오늘날 이단에 속하는 것은, 우선 개신교회가 전통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이요 우상숭배적이라고 간주했던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주로 19세기 이후에 많이 일어난 각종 이단 종파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챤 사이언스, 통일교, 천부교 등과,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포용적일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호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천주교회는 근본적으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 예를 들면,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無誤性), 하나님의 인격성과 형벌적 공의의 속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처녀 탄생, 신성(神性), 대리적 속죄, 육체의 부활, 승천 및 재림을 부정하는 무서운 불신앙적 이단 사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유주의 이단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되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마땅히 교회의 교제에서 배제되어야 하고 정통 교회로부터 출교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단절이 성경적이라면,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 입장이 바르고 분리를 반대하고 교제, 공존, 협력을 주장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 입장이 잘못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범죄자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윤리적으로 드러난 죄를 짓고 회개치 않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그런 자들을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5:11-13,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 . .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이 점에 비추어 볼 때도, 오늘날 참된 교회들은 윤리적으로 심히 부패한 교회들과의 교제를 단절해야 할 것이다.

불순종자들

넷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사도들의 교훈 곧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함으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 .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이것은 이 편지가 쓰이던 당시에는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교훈이었지만, 그 원리는 다른 일에서도 적용된다. 특히, 이 말씀은 오늘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고 자유주의 이단자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교제하는 소위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비록 신복음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신학 사상의 변질이 있는 이단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복음을 믿는 참된 성도요 우리의 형제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의적 불순종과 타협적 행위를 묵인하거나 용납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그것을 책망하고 만일 그들이 그 행위를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교제도 끊어야 할 것이다.

페이스 복음주의 루터교 신학교의 데오도르 슈브케겔 교수는 신복음주의를 '치명적 악'이라고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적 문제는 . . . 교회 내에서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이다. 옛방식은 . . . 오류에 빠진 사람을 책망하고 그를 교정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고집하면, 우리는 그가 회개하고 그의 길의 잘못으로부터 돌아서기까지 그를 우리로부터, 혹은 우리 자신을 그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이 성경적 방법이다. . . .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은 이 분리의 방침을 내버리고 그 대신 오류를 포용하는 침투라는 방침을 취했다"(Christian News, 1999년 5월 31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7월 1일).

마크 시드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적인 인물이 범하는 공적인 죄는, 속임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공적으로 책망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배교(背敎)와의 교제를 옹호하고, 거짓 교사들과 불신자들과 협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공적으로 도전한 죄가 있다. 그가 잘못 인도하고 있거나, 또는 만일 성경으로부터 적절히 경고를 받지 못한다면 그에 의해 잘못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충성된 목사는, 비록 그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체하고 또 아마 어느 정도 그러할지라도, 그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 기껏해야, 이것은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거짓 교사처럼 행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이 입장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불행스럽다. 우리가 오직 입장에만 집중하고 성경적 불순종이나 타협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비성경적 입장의 주된 선동자요 촉진자요 옹호자일 때, 우리는 그가 촉진하고 있는 그 죄를 비난하면서 그 사람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다." (Mark Sidwell, The Dividing Line: Understanding and Applying Biblical Separation; Calvary Contender, 1998년 11월 1일.)


교제를 끊어야 할 이유들

성경이 성도들에게 위의 네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치는 이유들은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첫번째 이유는 교회의 본질 때문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성도라면 성경적 교리를 믿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러한 본질적 성격에 배치되는 요소들, 곧 불신앙, 이단들, 회개치 않는 죄들, 고의적 불순종 등은 교회에서 마땅히 배격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의 연합 전도 활동이 겉보기에 큰 결실이 있는 것 같으나, 성경이 그러한 잘못된 교제를 금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구실도 용납하지 말고 그런 활동을 반대하고 배격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주의 명령에 대한 순종에 있다. 기독교는 물량주의, 숫자주의, 실용주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경주의, 진리주의이다.

교회의 순결성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하며 또한 거룩해야 한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에베소서 5:26, 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비록 지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겠지만, 우리는 순결한 교회, 흠 없는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뻔뻔스런 불신앙이나 고의적 불순종을 교회 안에 용납해서는 안된다.

악의 전염성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세 번째 이유는 악의 전염성 때문이다. 교리적 오류이든지 윤리적 오류이든지 간에, 죄악은 누룩처럼 교회 안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악의 전염성 때문에 교회는 악을 제거하고 악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곧 부패되고 속화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갈라디아서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디모데후서 2: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하나님의 명예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이다. 교회가 윤리적 죄악을 포용하면, 세상이 교회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 성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로마서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교제를 끊는 방법들

성경은 성도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치는가?

오류는 지적되어야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훈과 입장과 활동들은 지적되고 비평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교훈들을 비평하고, 교훈하는 자들을 비평하지는 말라'고 하지만, 교훈과 교훈하는 자는 분리되기 어렵다. 밴가드(Vanguard) 1999년 6월호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했다:

첫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성경적이다. 바울은 긍정적으로 활동들을 추천하기 위해 사람의 이름을 들었고(고전 16장; 빌 2:25; 골 4장), 부정적으로 활동들을 경고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였다(딤전 1장,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딤후 2장, '후메내오와 빌레도'; 딤후 4장, '알렉산더'). 요한도 또한 구체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요삼 9, 10, '디오드레베').

둘째로,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칭찬하기를 기뻐한다면(예를 들어, 루터와 스펄전과 웨슬리의 전기들), 부정적으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논리일관한 일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되는 사람들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똑같이 정당하다. 더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미워하라고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다(딤후 4:15).

셋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실제적인 문제이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흔히 설교들보다 설교자들을 따른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들어야 한다.

넷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역사적인 후원이 있는 일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사람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내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진술하기를 겁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흔히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는 일차적으로 교회적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이 있을 경우, 성도들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그리고 교회 헌법의 권징의 규칙을 따라 권계(勸戒, 권면과 충고), 수찬 정지(受餐停止, 성찬식에서 제외함), 제명 출교의 절차를 행해야 할 것이다(마 18:15-17).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간의 막힌 담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들 상호간의 막힌 담도 허물어 뜨리신 위대한 화해자이시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주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 곧 우리의 진정한 형제들이요 자매들이겠지만, 비록 우리가 그들 중 어떤 이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성경적 분리는 성경적 원리요 성경적 교훈이다.

불신앙, 이단들, 회개치 않는 악들, 고의적 불순종들에 대한 적절한 권징과 교제의 단절은 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5:11-13, "[이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 . . 함께 먹지도 말라 . .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4,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는 합법적인 권징과 교제의 단절을 성실히 실행해야 한다.

특히, 교회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마땅히 출교되어야 할 이단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단의 신학교를 위해 교수를 청빙할 때 신학교 이사들은 먼저 청빙할 교수들의 신학 사상이 건전한 지를 신중하게 심사해야 한다.

또한 성경적 교회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대 교단들이 자유주의화 된 상황이므로, 소위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각 나라의 교회협의회(NCC)들은 잘못된 단체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들은 이러한 단체들과 관련된 활동들을 반대해야 하고 거기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특히,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활동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전도 활동은 명백히 비성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이므로 우리는 그러한 활동을 인정하지 말고 또 거기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후원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망라한 초교파적 연합 집회들, 예를 들어 부활절 연합예배, 연합 성찬식, 그리고 성서공회, 기독교 방송국, 찬송가공회 등의 연합 활동들도 옳지 않다.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믿는 교회들간의 초교파적 연합 활동들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지만, 보수적 교회들과 자유적 교회들간의 연합 활동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덧붙여서 생각할 바는, 한 교회 혹은 교단이 자유주의화 되었거나 자유주의자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할 때, 보수적 신자들 혹은 목사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 우선,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을 내어쫓고 성경적 교회와 교단이 되도록 말과 글로써 그리고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 노력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나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이나 혹은 그들을 옹호하는 세속적 교권주의자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의 권징 출교나 교회 정화 혹은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을 떠나야 하고 바른 입장을 가진 성경적 교회를 찾아 거기에 속하거나 그러한 교회 혹은 교단을 설립해야 한다.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고린도후서 6:17, "거기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계 18:4에도 같은 말씀이 있음).

개인적 교제를 조심해야

물론, 우리는 교회적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과의 개인적인 교제도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그런 자들과 개인적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들이 우리의 가족들 중에나 우리의 친구들이나 이웃들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무분별한 교제로 악을 용납하거나 공적으로 악을 승인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구약시대에 유다 왕국의 경건했던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 왕국의 악한 아합 왕과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손에게도 이스라엘 왕국의 우상숭배의 씨를 뿌리는 결과가 되었다.

역대하 19: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요한이서 7- 11, ". . . 그[이단자]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을 잃지 말아야

특히 오류를 범한 자들과 교제를 끊을 때, 우리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교제의 단절은 먼저 우리의 성실한 노력을 전제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의 교정을 위해 먼저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권면하고 교회적으로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또 교제를 끊어야 할 때에도 지금이 불가피한 분리의 때인지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우리의 성급한 분리는 교회의 개혁이나 갱신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 더욱이, 신자 개인의 경우에는 교회적 대책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떠나야 할 교회를 대체할 건전한 보수적 교회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많이 있다.

분리에는 항상 극단적 태도의 위험이 있다. 건전한 성경적 확신에서라기보다는 개인적 해석들이 분열의 문제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죤 애쉬브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리는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또 분리는 배교로부터 분리하기를 원치 않는 불순종하는 형제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그러나 분리가 형제들 간의 모든 불일치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Calvary Contender, 1998년 11월 1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특히 이런 교회적 갈등과 결단의 때에,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미움이나 교만은 그 어떤 죄와 오류 못지 않은 큰 죄악이다. 사람이 성경적 분리의 명령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좋은 성품과 삶이 있느냐 없느냐는 더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영적 분별력을 좀더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일 뿐이며,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교만할 수 없다. 갈라디아서 6:1,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범죄자]를 바로 잡고."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데살로니가후서 3:15, "그들[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을 원수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바른 입장의 필요성

어떤 운동이나 교회가 어떻게 배교에 떨어지는가? 클레이 나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는 배교(背敎)가 한 시대에 걸쳐 일어나고 하룻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여러분은 '교회가 오직 두 명의 목사를 거치면 자유주의화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첫번째 목사는 그 교회를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은 그것을 배교로 인도한다. 자유주의를 향해 움직이는 교회들을 확인하는 길들이 많이 있지만, 그 길에 있는 자들은 친구들로부터의 경고들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와 같이 배교를 향해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거기로 인도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여러분이 그들에게 그들의 교단이 장소적 천국과 지옥불이 없다고 하는 자유주의 교리들을 신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때에라도 그 명백한 사실에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충성된 경고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거짓 교리를 취급하고 있기보다는 개인적 문제를 논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이 없다,' '천박한 정신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사람이 어떻게 배교에 도달하는가? 사사기 2:10은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말씀한다." (Shepherd's Staff, 2000년 1월 8일; Cal- vary Contender, 2000년 2월 1일.)

쥐를 죽이는 것은 98퍼센트의 햄버거 속에 넣어진 2퍼센트의 혼합물인 독약이다. 진리와 거짓의 혼합물은 격리되고 분간될 수 있는 순수한 거짓보다 보통 훨씬 더 치명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나 그 안에 좋은 점이 매우 많다"고 흔히 말한다. 모든 거짓 사상 체계들은 진리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사실상, 더 많은 진리가 치명적 오류와 섞여 있을수록, 그것은 속임을 위해 더 많이 위험하다. 효력이 있으려면, 속임수는 본질적으로 참되게 보여야 한다. 목표 지점을 향해 전달되는 내용의 90퍼센트 이상은 참되어야 한다. 그러나 심지어 미혹의 시대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속임 당함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 시대의 오류나 오류자들을 폭로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사 8:20). (Calvary Contender, 2000년 3월 15일.)

오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다. 스스로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정통적 기독교의 역사적 성경적 교리들로부터 심각하게 떠날 때, 우리는 게으르게 침묵함으로 서 있어서는 안된다(딤 1:9-11). 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며 그 오류의 전파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Vantage Point, 1998년 7월). 침묵하는 파수꾼들은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파수군들이 의무를 다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의 목자들을 '눈 먼 파수꾼들'이라고 부르셨고 또 그들을 '벙어리 개요 능히 짖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사 56: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교리를 비난하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이 경고했어야 할 때 잠자고 있었음을 비난하셨다. (Calvary Contender, 1995년 9월 1일).

여러 가지 문제들로 혼란스러운 오늘날 교계의 현실에 사랑과 관용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이롭게 하는 것뿐이다! 교회 내의 오류들은 지적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A. W. 토저는 '관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의 유행은 우리가 도량이 좁다는 평판을 얻지 않으려고 무엇이든지 관용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령하셨던 아말렉의 왕 아각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으며(삼상 15장), 그래서 그들은 오류와 악을 용납함으로써 오는 시대를 위해 교회의 건강을 희생시키는 길을 택하며, 이것을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악의 자리들을 소란시킬 의무가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신실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곳에 큰 유익이 따를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일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는 심사(審査) 때문에 손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가장한 소심함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쓸데 없는 형식들과 비(非)성경적 행위들이 계속되도록 허용되었고, 그것들은 마침내 점점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켰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 . . 교회 문제들을 심사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결점을 찾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점을 찾기가 어렵다. . . . 그러나 우리가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일이 순수하게 보존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A. W. Tozer, Berean Call, 1998년 7월;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캘버리 컨텐더지는 이렇게 말했다: "참된 기독교적 일치는 공통적으로 믿는 고정된 성경 진리들을 믿고 주의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거짓된 일치는 '다양성 속의 일치,' 다원주의, 그리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섞는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약 3:17). '외적 일치와 복음 진리 사이에 양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진리를 위해 일치를 양보해야 한다.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분리되는 것이 더 낫다.' 그러한 분열의 책임은 진리를 떠난 자들에게 있다. A. W. 토저는 말하기를, '타협은 압박을 제거할 것이다. 사탄은 싸우기를 중지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지의 댓가는 평화로운 침체의 삶일 것이다'라고 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4월 1일.)

테리 아놀드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썼다: "오늘날 '관용'이라는 말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찬미를 받고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와 기독교 교리에서 관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요구가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의미한 바와 성취된 바는 흔히 관용이라기보다 '타협'이다. . . .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말씀을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중요한 교리들과 타협하는 것도 또한 죄이다! 거짓 교사들과, 사람들을 건전한 교리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과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성경은 때때로 일치보다 분리에 관해 말한다. . . .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셨지만 결코 타협하지는 않으셨다. 사실 그는 흔히 논쟁에 휘말리셨다! . . . 나는, 그들이 뒤에 더 큰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작은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소위 '화평케 하는 자들'을 주의한다. 많은 목사들은 사람들이나 그들 자신의 지위나 인기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어떤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 . . 진리를 희생하는 관용은 타협에 이른다. 타협은 항상 본래의 표준을 낮춘다. 진리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만, 오류는 경계선이 없다. 불행하게도 타협은 오늘날 덕(德)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감정 상하는 일이 되었다."(Calvary Contender, 1999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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