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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장로교친교회' 소개

2010.09.16 22:32

oldfaith 조회 수:4003 추천:221

http://cafe.naver.com/cpf2010/284

 

보수장로교친교회
Conservative Presbyterian Fellowship (CPF)
http://cafe.naver.com/cpf2010


목차

□ 설립 취지
□ 12신조
□ 현대교회문제
□ 근본주의 장로교회와 협의회의 필요성
□ 운영 규칙과 정기 모임

(본 내용은 2015년 2월 24일 보수장로교친교회 모임에서 결정된 바 대로 임원회에 의해 준비되었습니다.)

 

 

 

설립 취지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혼란한 것 같다. 기장이나 예장통합은 일찍부터 자유주의적 노선을 추구하였다. 기감, 기침, 기성이 그 뒤를 따르며 보조를 같이하였다. 예장합동과 예장고신을 비롯한 보수 교단들은 그 표방하는 바가 역사적 개혁신학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자유주의적 교단들과 불편 없이 이런저런 연합적 활동들에 관여하며 심지어 강단교류도 하였다.

그러나 2013년 WCC(세계교회협의회) 총회가 부산에서 개최된다고 하자, 한국의 보수교단들 안에서는 WCC에 대한 반대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행한 일이다. WCC는 처음부터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한 단체이었고, 지금도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적 교단들의 활동무대이며, WCC와 에큐메니칼[교회연합]운동은 심지어 천주교회를 포용하고 이방종교까지 포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예장합동은 1959년에 WCC와 관계를 끊기로 결정하였었다.

그러나 실상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2014년 WEA(세계복음주의연맹) 총회를 대한민국 서울에 유치하였었다는 점이다. 비록 그 총회는 한기총의 내부 사정 때문에 무산되었지만, 예장 합동, 고신, 개혁, 대신, 합신, 고려 등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보수교단들이 속해 있는 단체인 한기총이 그 총회를 한국에 유치하려 했고 그 일에 대해 다수의 사람들이 문제 의식을 가지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전에 WEF(세계복음주의협의회)이었던 WEA는 이전부터 명백히 신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해왔다. 한국의 보수교회들은 신복음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수용하는가?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말로 불리는데, 그 본질은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적 교회들과 교제를 끊지 않고 오히려 교제하고 협력하는 데 있다. WEA와 WCC의 회원들은 중복되어 있다. 미국 NAE의 역대회장들 중에서 6명 이상은 자유주의 교단 출신이다. 신복음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빌리 그레이엄은 NCC와 교제를 끊지 않았다. 오늘날에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구별을 무시하고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교제하고 협력한다.

빌리 그레이엄을 비롯하여 빌 브라잇, J. I. 패커 등 오늘날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심지어 천주교회를 비평하지 않고 그들과도 교제하며 협력하고 있다. 1980년 3월, WEF 제7차 정기총회에서는 두 명의 로마 천주교회 대표가 개회인사를 하도록 초청되었다. 미국 NAE의 전회장 죤 화이트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라는 문서에 서명하였고 천주교인들을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또 미국 NAE 안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은사주의적 인물들의 회원권조차도 문제시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WCC와 WEA에 대해 또 그 외의 중요한 현대교회문제들에 대해 바른 증거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함을 느껴 뜻과 마음을 같이하는 분들이 <보수장로교친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이며 참된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고 그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사명을 다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12신조

 

목사들과 성도들이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고, 성경연구를 더 많이, 더 깊이 하고, 지식과 정보와 깨달음이 더 많아질수록, 구체적 교리 주제들에 대해 자기 나름의 신념이 형성될 것이지만, 우리는 장로교인으로서 성경적 장로교회의 통일성을 위해, 또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란에 대처하는 선의의 공동전선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공통적 신조를 제안한다.

우리는 사도신경, 니케야 신경, 칼케톤 신경을 비롯하여, 장로교회의 기본 신조인 벨직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성경 진리의 바른 증거로서 받아들인다. 또 우리가 역사적 기독교라고 믿는 개혁신학의 윤곽은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에 잘 해설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요점들과 특히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여러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우리의 신념들을 열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1. 우리는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영감과 무오(無誤, inerrancy)를 포함하여 성경의 신적, 객관적, 절대적 권위를 믿으며, 또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일 뿐 아니라, 또한 목사들의 설교와 목회, 및 교회생활 전반에 있어서도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는다.

2. 우리는 성경의 신적, 객관적, 절대적 권위와 삼위일체(三位一體)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성일인격(二性一人格)의 진리를 포함한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공통 신조들을 믿는다.

3. 우리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무능력,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 성령의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등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믿으며, 특히 구원과 신앙생활 전반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믿는다.

4. 우리는 사람이 영(혹은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었다는 견해(2분설)가 성경적, 역사적 개혁신학의 입장이라고 믿으며, 거기에 근거하여 중생과 성화 등 구원의 전체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5. 우리는 천년왕국에 관해서는 개혁교회 안의 다양한 견해들, 다시 말해 역사적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을 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으며, 단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본다. 또 휴거에 관해서는 환난후 휴거설이 성경적, 역사적 견해라고 믿는다.

6. 우리는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부정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들, 즉 신정통주의를 포함한 여러 학파들이 이단적이라고 판단하고 단호히 배격한다.


7.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포용하고 심지어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을 가지는 현대 에큐메니칼[교회연합] 운동이 성도들의 교제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이탈하고 거스르는 잘못된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단호히 배격한다.

8. 우리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들을 포용하고 그런 자들과 무분별하게 교제하고 협력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타협적 복음주의의 입장이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교훈을 거스르는 잘못된 입장이라고 판단하고 배격한다.

9. 우리는 오늘날 다양한 형태들로 나타나는 소위 현대 은사운동(즉 방언, 예언, 병고침 등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역사상 계속 있었고 오늘날도 있다고 주장하고 강조하는 운동)과 영성운동이 역사적, 성경적 기독교를 경험의존적 방향으로 왜곡시키는 잘못된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배격한다.

10. 우리는 장로교 목사와 장로가 임직서약 때에 승인한 예배모범에 위배되는 열린예배와, 그 곡이 록 음악이나 세속적 유행가와 비슷한 현대기독교음악(CCM), 그리고 여자목사와 여자장로의 안수 등의 풍조들이 건전한 성경적, 전통적 입장을 이탈한 잘못된 것들로 판단하고 배격한다.

11. 우리는 기독교계에서 공인된 이단종파들, 즉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그리고 우리나라의 보수 교단들이 공적으로 정죄하거나 경고한 이단종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건전한 지체들이 아니라고 판단하며 단호히 배격한다.

12. 우리는 근본주의적 장로교회를 추구한다. 우리가 말하는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보수하고, 배교와 타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교회문제

1.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의 배교

현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의 변질이다. 다수의 현대 신학들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고 고백해온 하나님의 진리들을 버리고 표류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틀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신학은 한마디로 이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수의 대교단 신학교들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 사상들을 포용하거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의 차이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은 지엽적 문제들에서가 아니라 본질적 문제들에서 서로 다르다. 성경적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경적 기독교는 기독교를 바른 교리들에 근거한 생활과 경험이라고 이해하며 그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라고 보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교리들과 별개의 어떤 경험이나 생활로 보며 교리들은 시대마다 변할 수 있고 변해야 한다고 본다.


근본교리의 부정과 그 예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부정한다. 그 예들을 들어보자.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바르트는 아담의 창조와 타락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는 거짓이라고 말하였고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라고 했다. 또 그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였다. C. H. 다드는 성경의 외적 권위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계시 진리는 객관적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하였고 심지어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라고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고 말했다. 폴 틸리히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폴 틸리히는 그리스도의 행적 전반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굴복시키고 본질적인 부분들뿐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굴복시킨다”고 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말하기를, “또 우리는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 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 주변 환경에서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에서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부정한다.

C. H. 다드는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가라앉힘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라고 말했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고 말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부활의 역사는 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 신화(saga)나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사람의 영혼 불멸을 부정한다.

폴 틸리히는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라고 말했고, 오스카 쿨만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 불멸의 개념]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라고 말하였고, 라인홀드 니이버는 “기독교 교리 중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고 말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한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몸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고 말했고, 판넨베르크는 “죽은 자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함은 우리가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폴 틸리히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말은 신학 용어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확실히 이단이다. 성경의 핵심적 진리들을 부정하는 사상은 확실히 이단이다.


배교의 시대의 증거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단지 몇몇 신학자들의 문제가 아니고 대교단들의 목사들 다수의 문제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다.


제프리 해든의 설문조사

1967년, 제프리 해든(Jeffrey Hadden)은 미국의 성직자 10,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거기에 응답한 7,441명의 응답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 ‘귀하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감리교회(UMC) 성직자들의 60%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였고, 연합장로교회(UPC) 성직자들의 49%, 감독교회(ECA) 성직자들의 44%, 침례교회(ABC) 성직자들의 34%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2) ‘귀하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51%는 ‘아니오’라고 대답하였고, 연합장로교회 성직자들의 35%,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0%, 미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3) ‘귀하는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無誤)한 말씀임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87%는 ‘아니오’라고 대답했고, 연합장로교회 성직자들의 82%,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95%,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67%,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77%도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노엘 홀리필드의 설문조사

1976년, 노엘 홀리필드는 그의 논문에서 미 남침례교 신학교 학생들의 신앙 상태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기적들이 성경의 증거대로 실제로 일어났음을 믿는다. M.Div. 1학년 61%, 3학년 40%, Th.M.& Ph.D. 37%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확실하다. M.Div. 1학년 66%, 3학년 33%, Th.M.& Ph.D. 32%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셨음은 확실하다. M.Div. 1학년 59%, 3학년 44%, Th.M.& Ph.D. 22%
예수께서 신적인 하나님 아들이심을 의심치 않는다. M.Div. 1학년 87%, 3학년 63%, Th.M.& Ph.D. 63%
예수께서 실제로 지구로 돌아오실 것을 확신한다. M.Div. 1학년 79%, 3학년 56%, Th.M.& Ph.D. 53%


예수 세미나의 결과

1985년, 미국에서 약 125명의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시작하였다. 1994년 초까지 이 세미나의 대략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예수의 말들의 20%만 실제로 그의 말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2)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3)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4) 예수는 결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5) 예수는 자신의 재림(再臨)을 약속하지 않았다.

1999년, 예수 세미나의 주도적 인물인 로버트 펑크는 미국의 한 연합그리스도교회의 강연에서 ‘예수 세미나’의 결론인 21개 명제들을 배부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물질 세계 바깥에는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 (2) 다윈의 사상은 창조의 교리를 영원히 말살시켰다. (3) 신적인 기적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에 대한 모욕이다. (4) 저 밖에 있는 신에게 말해지는 기도는 무의미하다. 기도는 명상이다. (5) 예수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6) 예수를 구속자(救贖者)라고 하는 것은 낡아빠진 생각이다. (7) 예수가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현대 지성에 대한 모독이며 여성에 대한 모욕이다. (8) 속죄 교리는 이성적이지 못하고(sub-rational) 또한 윤리적이지 못하다(sub-ethi- cal). (9)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10) 모든 계시적 요소들은 기독교 주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11) 예수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적절한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비전이 그를 대치해야 한다. (12) 성경은 객관적 행동기준을 담고 있지 않다.


바나 연구회(Barna Research Group) 설문조사

바나 연구회는 2004년 미국 개신교회 목사들의 49%가 다음과 같은 성경의 핵심적 신념들을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1) 성경에 기초한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가 있다, (2) 성경의 교훈은 정확하다, (3) 예수는 죄가 없으셨다, (4) 사탄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들을 믿는 목사들의 비율은 감리교회가 27%로 가장 낮았고 남침례교회가 71%로 가장 높았다.


우리나라의 예들

감신대 전 학장 변선환은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으로 유일한 구속자이신 것이 아니며” 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도 있다”고 말했다. 또 조직신학 교수 홍정수는 “만일 신은 계신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신은 없다’고 잘라 말할 수도 있다”고 말했고 “부활 신앙은 이교도들의 어리석은 욕망에 불과하다”고 했다.

목원대 은퇴교수 송기득은 한신대 대학원장 안병무의 사상에 대해 그의 역사적 예수는 삼위일체적 존재, 성육신한 존재, 신인 양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기장의 조향록 목사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사건 자체를 사건적으로 입증하든지 부정하든지 하는 논란은 큰 의미를 거두지 못한다”고 말했다. 기장의 김경수 목사는 “신학적으로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신학자는 김재준, 칼 바르트, 폴 틸리히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장의 강원용 목사는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얻는 것이라고 말했고 한신대 교수 김경재는 그의 말을 복음의 진수를 갈파한 원로 지혜자의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1984년 예장 통합측 장로회신학대학의 이동렬은 그의 석사논문 결론에서 “우리 입장은 신정통주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 중이다”라고 썼다.

신정통주의자로 알려진 장로회신학대학 전학장 이종성은 성경의 축자영감과 성경무오설을 근본주의 견해라고 배격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신정통주의 성경관을 받아들인다. 그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 김명용은 오늘날 개혁교회 신학은 바르트와 브룬너와 니이버와 몰트만 등의 신학의 거장들을 통해 세계교회를 이끄는 신학이라고 말했다. 그는 차원 높은 신학의 전개를 위해 바르트 신학은 결코 해롭지 않다고 강변했다. 예장 통합측은 배교적인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과 WCC(세계교회협의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상의 예들은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님을 보인다. 세계 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에 거의 정복을 당하였고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그것을 분별력 있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2. 에큐메니칼 운동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들을 재연합시키려는 운동, 곧 교회연합운동이다. 이 운동은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함으로써 넓어진 상태에서 정통과 이단의 경계를 더 허무는 운동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혼란을 더욱 초래하였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1910년 영국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에 조직된 WCC(세계교회협의회)는 오늘날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요 결실인 동시에 주요 수단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력은 대단히 크다. 2015년 2월 현재, WCC는 세계의 345개 교단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성공회 등이 WCC의 회원이다.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함

WCC나 교회연합운동은 교회 안의 다양한 신학들을 비평 없이 포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오늘날 역사적 대교회들의 다수는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데, 교회들의 연합체인 WCC가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실상, WCC는 초기부터 다수의 자유주의자들이 참여하였다. 창립총회의 연사들 중에는 칼 바르트, 에밀 브룬너, 라인홀드 니이버, C. H. 다드 등의 소위 신정통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WCC의 초기 지도자들 중에는 죄더불롬 대주교, 윌리암 B. 퓨, 헨리 P. 반 듀젠, E. 스탠리 죤즈, T. C. 차오 등 자유주의적 신학사상을 가졌다고 알려진 인사들이 있었다.

WCC와 그 지도자들은 교회 안에 현존하는 여러 신학들을 용납한다. WCC 전 총무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WCC의 공식적 신학이란 것이 없으며 또 결코 있을 수도 없고 우리는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0년 2월, 우리나라의 제1회 에큐메니칼 포럼에서 WCC 중앙위원 박종화 목사는, 교회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와 교회의 사회참여적 역할을 강조하는 부류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이 둘을 포함하는 통합적 에큐메니즘이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개신교회 17개 교단의 대표들은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를 만들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한 적이 있었다. 또 그 제안은 거의 모든 교단들에서 통과되었었다. 교단장협의회 소속 23개 교단 중 2002년 10월 2일까지 예장합동, 예장통합, 기장, 기성, 예성 등 16개 교단들이 총회 결의로 그것을 채택했었다.


천주교회(RCC)를 포용함

외형적으로 볼 때, 기독교회들의 재연합이라는 비전은 천주교회를 포함하지 않고는 수적으로 큰 결함이 있을 것이다. 천주교인수가 개신교인과 헬라정교인수를 합한 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미국해외선교연구센터(OMSC)의 2013년 1월호 국제선교통계보고서(IBMR)에 의하면, 세계 인구 71억명 중에 기독교인은 23억 5,400만명이며 그 중 천주교인은 12억명이며 개신교인은 4억 3,900만명, 독립교회 3억 6,900만명, 정교회 2억 7,900만명, 성공회 9,100만명이라고 한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초대 총무이며 명예 회장인 빌렘 비셜트 후프트는 WCC와 천주교회의 적극적 협력관계에 대해, “우리가 반복해 말하는 바는, WCC 내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는 이제 모두 한 동일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WCC의 전 총무인 에밀리오 카스트로도 말하기를, “현재 WCC와 천주교회 간의 관계는 매우 긍정적이며 모든 종류의 우호 관계들이 있다”고 하였다.

천주교회는 1959년까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노력으로 이 운동에 적극적이게 되었다. 1962년에 시작된 제2 바티칸회의는 그 특별한 전환점이었다. 천주교회는 아직 WCC의 회원이 아니고 회원권을 구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1968년 이후, 10-15명의 천주교 신학자들이 WCC 신앙직제위원회에 정회원으로 참여해왔다. 천주교회는 정규적으로 WCC의 주요 대회들에 참관인이었고 WCC의 프로그램 작성 간사 중에도 들어 있다. 1993년, WCC 신앙직제위원회 세계대회의 120명 회원 중 26명은 천주교인이었다. 1999년 현재, 천주교회는 56개국 교회협의회들의 정회원이다. 교회연합운동에서 모종의 교황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경향은 처음부터 있었다.

미국교회협의회(NCC) 회장 앤드류 영은 1999년 9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한 천주교 성당에서 그의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1999년 10월 31일, 루터교 세계연맹 크리스티안 크라우제 주교와 교황청 일치위원장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은 신교와 구교의 500년 만의 화해 사건으로 ‘칭의의 교리’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하였다. 2000년 4월 앨버타 에드몬튼에서 열린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천주교회 온타리오 주교인 안드레 발리를 새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천주교인을 회장으로 뽑은 것은 그 협의회 창립 56년 만에 처음이다.

한 논문에 의하면, 오늘날 은사운동은 천주교인과 개신교인 간의 접착제로 나타난다. 1983년 미국에서만 60만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이 은사주의 기도회에 참여하고 있고, 온 세계에서는 약 5천만명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처럼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연합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경향

오늘날 교회연합운동은 종교다원주의 경향을 띤다. 종교다원주의란 모든 종교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다양한 길이며 결국 다 천국에 이르게 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한 결과이다.

1983년 WCC 뱅쿠버 총회는 WCC 35년 역사상 최초로 힌두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섯 개 세계 종교들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공식적으로 연설케 하였다. 그 총회는, “우리는 우리가 증거하는 예수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한편, 다른 종교들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의 종교적 진리의 추구에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선언하였다.

WCC 인사들 중에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WCC 종교 간의 대화위원회의 의장인 더크 멀더(Dirk C. Mulder)는 “당신은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대답하였다. WCC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위원회 의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S. Wesley Ariaraja)는 1985년 WCC를 통하여 출판된 성경과 타종교인들(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하게 부정하였고 또 말하기를, “타종교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형제 자매이며 순례자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 . . 힌두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료 순례자이다”라고 했다.

이와 같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포용하고 종교다원주의 경향까지 띠면서 신바벨탑운동이 되고 있다.



3. 복음주의

개념과 역사

오늘날 복음주의는 정통과 이단의 경계를 허무는 또 하나의 문제가 되고 있다. 복음주의가 무엇인가? 복음주의는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개신교회를 복음주의라고 부른 것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 대신 성례나 신자의 공로적 선행을 가르쳐왔던 천주교회와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입장, 곧 성경적 기독교를 가리키는 용어이었다.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교회에 퍼지기 시작하고 1940년대에 소위 ‘신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복음주의는 전통적 개신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수호하는 전투적 입장을 취했던 근본주의도 복음을 믿고 옹호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적 개신교회들 속에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던 20세기 중엽 이후,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두 입장과 진영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포용적이고 타협적인 입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단절을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전자는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라고 불리었고 후자는 근본주의라고 불리었다.

미국에서 1920년대의 소위 보수주의(근본주의)와 자유주의(현대주의) 간의 신학적 논쟁에서 자유주의가 외형적 승리를 거둔 후, 1930년대에 성경적 교회들이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대교단들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있었고, 1940년대에 와서 ‘신복음주의’라는 새 경향이 일어났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싸우기보다 평화와 안정을 더 좋아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믿는 보수적 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보다 자유주의 교회들을 포함한 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하였다.

‘신복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미국의 풀러신학교 초대 교장 해롤드 오켕가는 1957년에 “신복음주의는 그 전략을 분리에서 침투로 바꾸었다”고 말하였고, 또 후에 그는 “신복음주의는 분리를 거절함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달랐다”고 회고했다.

1942년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가 조직되었고, 1947년 미국의 풀러(Fuller)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51년 20개국의 복음주의자협회들이 모여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조직했다(이 단체는 2001년 세계복음주의연맹[WEA]으로 개명함). 1956년 신복음주의적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 tianity Today)지가 창간되었다.

역사적 대교단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된 후,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온 소수의 보수적 교회들이 과연 기독교회의 참된 계승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리의 입장을 포기하고 대교단들 속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것들을 개혁시키고 회복시키기를 원하는 소위 ‘침투’의 입장과 전략을 가지게 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싫어하였고 ‘복음주의’라는 말을 전유물처럼 사용하였다. 각국의 ‘복음주의자협회’(NAE)나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는 다 ‘복음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죠지 마스든의 관찰대로, 신복음주의자들은 점차 자신들을 단순히 복음주의자로 부르기 시작하였고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흔히 단순히 ‘복음주의’로 불린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신복음주의와 동의어이다.


자유주의적 교회의 포용

복음주의의 자유주의적 교회 포용의 대표적 예는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활동이었다. 그는 뉴욕,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컬럼버스 등에서의 전도 집회들에서 자유주의적 교회협의회의 후원을 공공연히 받았다.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는 처음부터 자유주의적 대교단들의 지교회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성경 무오와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 교리를 포함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마틴 마티는 1992년 미국복음주의자협회에서 강연하였다.

풀러신학교는 처음부터 대교단들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키기를 원했다. 또 이 학교는 프린스톤 신학교 전 교장 신정통주의자 죤 매케이를 연사로 초청하였었다. 그 학교의 1984-85년 요람은 자유주의적 천주교 신부 레이몬드 브라운을 강사로 열거하였다. 이 학교는 처음에는 성경 무오를 옹호했으나 오늘날에는 이 교리를 거부하고 은사운동을 조장하며 여성 안수를 강하게 지지한다.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회장 데오도르 윌리암스는 WEF 뉴스레터 1993년 8월호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소속 교단 내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대로 머물러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그 교회 안에서 복음주의적 영향을 끼치려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복음주의 대변지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1998년 9월 7일자는 레이몬드 브라운의 신약개론을 높이 추천하였다. 그러나 브라운은 예수께서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오류를 범하였다고 말한 자유주의적 천주교 신부이다. 그는 1971년 미국 뉴욕의 자유주의적 유니온 신학교에서 처음으로 종신직 천주교 교수가 되었다.

복음주의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우리나라의 예들은 수없이 많다. 1986년 9월 8일 한국장로교협의회는 새문안교회에서 노춘경씨 수세 100주년 기념 행사로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장, 예장고신, 예장대신 등 5개 장로교단 연합성찬예배 및 강연회를 가졌다.

1990년 11월,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홍콩 국립경기장에서 개최되는 빌리 그레이엄 홍콩 전도대회의 한국 위성중계 전도대회의 장소로 부산 수영로교회, 대구 서문교회, 대전 중앙교회 등 예장합동측의 큰 교회들을 채택하였다.

1993년, 한국장로교협의회 소속 5개 장로교단 총회장 공동선언문은 한국 장로교회들이 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면서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은 신앙의 본질적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선언하였다.

199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발표회에서, 홍순우 목사는 진보적 교회와 보수적 교회가 다 반성하고 한국교회 전체 정서에 맞는 연합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앞으로 NCC나 한기총 등의 연합기관이 합력하여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199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발표회에서 한명수 목사(한기총 전 총무, 당시 합동측 기독신보 주필)는 진보와 보수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어느 한 쪽을 강조하면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기총과 교회협[NCC]이 새로운 이름을 가진 단체로 우뚝서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 김명혁 목사(합동신학교 교수, 강변교회 목사)도 “양기구는 기구적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7년, 예장대신측 전 총무 조순태 목사는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윤리적으로 위기상황일 때 교회연합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마땅치 않게 여기는 교파도 같은 사도신경을 믿고 있으며 . . . 교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7년, 예장고신 총무 심군식 목사는 사회 문제와 사이비 이단이 판치는 현실에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여 힘을 약화시키지 말고 일치단합된 연합운동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8년 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지 덕 대표회장은 기자회견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차이가 이제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말했다.

1998년 6월, 예장합동, 예장통합, 예장고신, 기장의 목회자로 구성된 한국장로교목회자협의회(회장: 옥한흠 목사)는 “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은 늦출 수 없는 긴박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1998년,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의 회원교단 신임총회장과 총무 임원 축하예배에서 길자연 목사(예장합동 총회장)는 “장로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고 자기 입장만 고집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며 “이제라도 우리 모두 하나 되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자”고 말하였다.

1999년, 복음주의 장로교단인 예장합동측 총회총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0% 이상이 예장통합과의 강단교류와 신학교류, 연합사업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또 64%가 통합측과의 교단 통합에 대해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9년 6월 27일, 예장합동측의 역사적 승동교회(박상훈 목사)와 예장통합측의 대표적 교회인 영락교회(이철신 목사) 간의 강단교류가 양교단의 분열 40년 만에 승동교회에서 이루어졌다.

2009년, 예장합동, 예장통합, 예장고신, 기장의 총회장들이 강단 교류를 하였다.

2012년 11월 30일,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의 제30회 대표회장이며 예장합신 총회장을 역임한 권태진 목사(군포제일교회)는 정기총회에서 “한장총은 보수와 진보의 두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무엇보다 극진보와 극보수를 아우르는 일에 힘쓸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조직에는 한철하, 림인식, 최복규, 김상복, 김명혁, 이정익, 이수영, 전병금, 오정호, 김기영, 김영한, 강승삼, 손봉호, 권성수, 김경원, 김삼환, 박병식, 박성민, 박종화, 이영훈, 이 철, 정일웅, 최성규, 최이우, 최홍준 등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은사운동과 천주교회의 포용

복음주의는 은사운동에 대해 포용적이다. 아니, 포용적인 정도가 아니고 많은 은사주의자들을 포함한다. 1993년, 카리스마지는 오순절파가 미국복음주의자협회(NAE) 회원교회들의 약 51%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어떤 보고서는 약 80%라고 한다. 또 미국복음주의자협회 회장 케빈 매노이아는 자신이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간에 일치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 같은 은사운동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포용적이다. 1993년 6월,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1,050개의 교회들과 65개 교단들이 협력한 세 번째 전도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대회는 여섯 명의 천주교인들을 실행위원에 포함시켰다.

199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이사 스털링 허스턴은 말하기를, “지난 10-15년간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천주교회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으며 소수의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전도대회 계획위원회들의 공식적 대표자들로 봉사한다. 천주교회 신자들은 안내위원들, 성가대원들, 심지어 상담위원들로 환영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8월 10일자는 카나다 오타와 지역을 위한 6월 25-28일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활동에 대해, “그 전도대회를 후원한 470개의 지역 교회들 가운데, 60개는 천주교회이었다”고 말하였고, 또 새 신자들 중 얼마는 천주교회에서 데려갔다고 했다.

대학생 선교회(CCC)의 창설자요 총재이었던 빌 브라잇은 1969년 천주교회에 대해 “우리는 천주교회를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 안에서 힘있는 역사를 하고 계심을 믿으며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일을 돕기 위하여 수백만의 천주교인들을 사용하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대학생 선교회에는 이미 1970년대에 천주교인 간사들이 있었고 1973년의 ‘키(Key) ’73’이나, 1976년 집회들에는 천주교인들의 참여와 협력이 있었다.

빌 브라잇은 촬스 콜슨, 제임스 패커 등과 함께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상호 인정을 선언한 1994년의 선언서에 서명한 일로 비난을 받고 그의 입장을 취소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또 빌리 그레이엄뿐 아니라, 제리 팔웰, 잭 반 임페, 제임스 로빈슨, 에드 답슨 등의 복음주의자들은 천주교회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1985년, 에드 답슨은 말하기를, “교황 제도가 적그리스도적이라고 말하는 극단주의자들은 . . .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고 했다.

달라스 신학교 교장 척 스윈돌은 1997년 10월의 한 서신에서 테레사 수녀를 ‘주목할 만한 여자’라고 불렀다. 제임스 답슨은 테레사 수녀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했고 그것은 “그가 그의 생애에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잭 반 임페는 그녀가 구원받지 못한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꾸짖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3월 2일자에 의하면, 잭 반 임페는 최근에 교황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변호하는 데 그의 전체 방송을 사용하였다. 또 그는 다음번 교황이 요한계시록의 그 거짓 선지자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경고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로서 결합되었다”고 말했다.

미국복음주의자협회의 전 회장 존 화이트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잘못된 문서에 서명하였고 천주교인들을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확실히 교회들과 성도들을 매우 혼란시키고 있다.



4. 은사운동

은사운동의 역사와 특징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체험을 주장하고 강조하는 입장을 가리킨다. 은사운동은 20세기 초에 시작된 방언운동에 뿌리를 둔다. 여기서 오순절 교회가 생겼다. 20세기 중엽에, 이 운동은 오순절파를 넘어 다른 교파들 속에 퍼졌고 1960년 말에는 천주교회에까지 들어갔다. 이것을 신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운동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는 신사도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 운동은, 이인규에 의하면,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 존 아노트의 토론토 블레싱, 피터 와그너의 신사도연맹, 마이클 비클의 IHOP(국제기도의 집), 마이클 비클과 밥 존스와 폴 케인의 캔서스 예언자그룹(KCF), 베니 힌의 올랜도 크리스쳔센터, 조용기 목사의 교회성장연구소(CGI, 미국대표 피터 와그너, 베니 힌)을 비롯해, CI(Christian Inter., 빌 해몬, 김태진), HIM(Harvest Inter. Ministr., 체 안, 이성대), WLI(Wagner Leadership Inst., 홍정식), 한국기독교영성총연합회(예영수), 큰믿음교회(변승우), 에스더기도운동(이용희), HTM(손기철), 영동제일교회(김혜자) 등이 참여하고 있고, 인터콥(최바울), 예수 전도단(로렌 커닝햄) 등 여러 단체들이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신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운동은 몇 가지 특징적 주장을 한다. 첫째, 은사운동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령받는 경험을 강조한다. 둘째, 은사운동은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로 방언을 강조한다. 셋째, 은사운동은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지금도 다 계속되고 있거나 회복되었다고 주장한다. 넷째, 은사운동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 은사 체험을 강조한다.


성령세례

성령세례란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시는 사건이다. 그것은 곧 신자의 중생 사건과 동일하다. 신자는 중생 시 성령을 받으며 그것이 성령세례인 것이다. 중생 시 받는 성령을 성령세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으시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살리시기 때문이다.

성령세례의 시간에 관해서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 전과 후를 구분해야 한다. 오순절 사건 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으나, 오순절 사건 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 신약성경은 예수 믿는 자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또 세례는 죄씻음을 받는다는 뜻이 있는데, 예수 믿는 자들은 성령 안에서 씻음을 얻었다(고전 6:11). 그것이 성령세례이다.

단지, 사도행전 8:15-17에 기록된 사마리아 교인들은 예외적이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의 특별한 신분과 집사 빌립의 전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 보기에 반쯤 이방인이었다. 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자는 사도가 아니고 집사 빌립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 내리시는 일을 지연시키셨던 것 같다. 그러나 사도들이 내려와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성령께서 임하셨고 사마리아 교회와 유대 교회와의 일체성은 확립되었다.

사도시대에 이 한가지 경우 외에, 신약성경은 전체적으로 오순절 사건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때와 성령받는 때 곧 성령세례의 때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신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든가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믿었을 때 즉 중생했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다시 성령받기를 구하거나 성령세례 받기를 간구할 필요가 없다. 단지 이미 오신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의 영육의 각 부분과 각 기능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그에게 겸손히 복종하고 그를 의지해야 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

하나님께서 사도시대에 교회에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전달하시고 확증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그 은사들은 비록 사도 시대의 성도들에게 어느 정도 경험되고 그들에 의해 행해졌을지라도 주로 사도들에 의해 행해졌었다. 그것들은 사도들의 표이었다(행 2:43; 5:12; 고후 12:12).

교회 역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사도시대의 특징이며 그 후 시대에는 사라졌음을 증거한다. 따라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중단 혹은 폐지를 인정하고 가르쳐 왔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사라진 까닭은 두 가지 때문일 것이다. 첫째,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독특한 목적 때문에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과 확증인데, 그 목적은 사도시대에 신약성경의 기록이 완성됨으로써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 때문에 사라졌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을 보인다. 초자연적 은사들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온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일시적이었고 부분적이었다.

특히 고린도전서 13:10에 의하면, 그것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사라질 것이었다. ‘온전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신약성경의 완성을 가리킨다. 사도시대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통한 계시의 단편적 내용들에 비교하면,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하고 온전한 계시의 책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의 저장소인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곧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의 것들은 자연히 폐지되고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은사운동 비평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된다.

첫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계속 있었다거나 회복되었다는 주장, 특히 하나님께서 성경 외에 다른 계시들과 예언들을 주셨고 또 주신다는 주장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 즉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라는 믿음에 모순된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계시하신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계시의 필요성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도 시대 후 1900년 기독교 역사상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로운 계시 활동을 통해 동일한 내용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고 말씀하심으로 성경이 사람의 구원을 위해 충족하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또 요한계시록 22:18-19는 이 책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라고 교훈했다.

사도 시대 이후 기독교 역사는 기적 행함의 역사가 아니고 십자가의 말씀을 전한 역사이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했다(고전 1:22-23). 중생과 회개의 내면적 기적은 늘 있었지만, 외적 기적은 오랫동안 사라졌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충족한 말씀으로 일해 오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변화된 삶을 위해 충족한 수단이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성경말씀을 통한 성령의 잔잔한 내면적 활동은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백성을 떠난 적이 없었고, 신자들은 그 속에서 만족을 누렸다.


신앙생활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킨다.

둘째로, 은사운동은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을 무시하고 성령 체험을 강조한다. 즉 신앙생활을 성경말씀보다 은사 체험에 의존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 체험에 근거하지 않고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에 근거한 새 생활이다. 사도 바울은 기적을 전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했다(고전 1:22-23). 또 사도 시대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진리들을 전달하고 확증하기 위함이었고 부분적, 일시적, 초보적 성격의 것들이었고 그에 비해 성경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의 말씀이다. 또 방언, 예언 등의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인격과 삶이다(고전 13장).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 또 진리대로 사는 바른 삶을 강조해 왔다. 그것이 옛 길이며 건전한 길이다. 그것이 성경적 기독교이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소유한 교회이었지만(고전 1:7) 영적으로 어린아이였다(고전 3:1). 영성의 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삶에 있지, 어떤 은사에 있지 않다. 은사는 영성의 표나 척도가 될 수 없다.

신구약성경은 초자연적 은사들의 경험보다 성도들의 바른 지식과 바른 인격과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모하거나 구하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오직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믿고 순종하고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도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새롭게 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성장케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자. 교회의 참 부흥은 다른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 오직 신구약 성경의 성실한 강론과 전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초자연적 은사들의 실재성이 의문된다.

셋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실재성이 의문된다.

첫째, 계시와 예언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2:18은 성경 외에 무엇을 더하지 말라고 했다. 또 교회 역사는 은사주의 주장에 반대된다.

둘째, 방언에 대하여,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방언 현상은 외국어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 같다. 또 방언 현상은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어떤 불건전한 단체나 이단 종파에도 있었고 심지어 기독교 밖에도 있었다. 또 오늘날 은사운동에서 흔히 방언 훈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인위적이며 비성경적이다.

오늘날의 방언 현상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과 성경의 충족성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일 가능성은 매우 작다. 오히려, 많은 비평가들은 오늘날 방언 현상이 심리적 현상이거나 위조품이거나 심지어 마귀에게서 기원한 것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병고침에 대해서도, 성경에서의 병고침의 사례들은 즉각적이고 비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의 신유 은사들은 이런 특징을 가지지 않는 것 같다. 또 병고침의 현상은 기독교 안팎의 신비주의적 집단들에서도 있어 왔다.


교회연합운동과 함께 간다.

넷째로, 은사주의자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천주교회를 배격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의 점들을 종합할 때, 오늘날의 은사운동과 신사도운동은 하나님께서 현대교회에 주신 부흥의 표가 아니고 영적 어두움과 혼란을 추가시키는 일일 뿐이라고 판단된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과 신자들은 은사운동과 신사도운동의 위험을 인식하고 그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5. 선교 개념의 변질과 윤리적 부패

선교 개념의 변질

전통적으로, 선교(宣敎, mission)는 주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켰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얻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에 대한 이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개념이 변질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활동으로만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행할 사회적,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지금의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소위 ‘1967년 신앙고백’을 채택했는데, 그 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사명[선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인간을 향한 그의[그리스도의] 봉사는 교회가 모든 형태의 인간 복리를 위하여 일할 것을 위탁한다. 그의 수난은 교회가 인류의 모든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여 각종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도록 만든다(2.1.1).

교회는 모든 민족 차별의 폐지를 위하여 노력하며 그것으로 인해서 상해를 받은 자들을 위하여 봉사한다(2.1.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인간생활 전체 곧 사회와 문화, 경제와 정치, 과학과 기술, 개인과 단체, 전부를 포괄한다(3.1.1).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강조되는 선교 개념도 이런 개념이다. 1980년 멜본에서 열린 WCC의 세계선교 및 전도대회는 말하기를, “인권을 위한 투쟁에의 참여는 그 자체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말과 행위로 선포할 교회의 전체적 선교의 중심적 요소이다”라고 했다. WCC의 전 총무 필립 포터도, “우리는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자유와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을 하나님의 선교를 통한 세계의 전체적인 해방의 요소들로 본다”고 말했다.

WCC 1983년 선교와 전도 선언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개인의 회개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 . . 복음 전도는 이 세상의 구조들, 즉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에 대해 말한다”고 말하였다.

1996년, 한국 개혁신학회 제1회 정기학술심포지엄에서 장로회신학대학의 이형기 교수는 불신자들을 회심시키는 일에 초점을 두었던 19세기 선교 개념이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 측면을 포함하게 되었다고 전제한 후, 이 두 흐름의 선교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전체적(whole)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즉 ‘전체적 선교 개념’ 혹은 ‘넓어진 선교 개념’이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러한 ‘넓어진 선교 개념’을 받아들인다. 1974년 복음주의자들의 로잔 언약은 교회의 사명에서 전도가 일차적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전도와 사회정치활동의 불가결의 연관성을 강조함으로 선교 속에 두 요소를 포함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로잔 선교대회의 지도적 인물인 죤 스토트는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마 28:19]의 결과들뿐 아니라 그 실제의 부탁 자체가 전도의 책임뿐 아니라 또한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나는 지금 더 분명하게 본다”고 말하였다. 밀라드 에릭슨은 교회의 삼대임무에 사회적 관심을 추가하였고, 웨인 그루뎀은 구제를 추가하였다. 총신대 교수 김광열은 총체적 복음사역을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자들과 교회연합운동가들과 또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넓어진 선교 개념’ 즉 ‘전체적 선교 개념’은 정당하지 않다. 교회의 사명(mission)은 복음 전도 외에 사회정치활동을 포함하지 않는다.

전통적 신학의 정리대로, 교회의 삼대 임무는 예배와 영적 건립과 전도이다. 이 중에 전도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해 가지는 임무이며 이것이 주께서 세상에 남겨두신 제자들 즉 교회에 주신 특수한 임무, 즉 사명(使命, mission)이다. 또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계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주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이 사회봉사활동에 해당하며 그것이 주의 사명의 일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가르치심과 전파하심의 일과 분리된 것이 아니고 그 일에 종속된 부차적인 것이었고, 더욱이 주께서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단지, 긍휼과 능력이 많으신 구주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실 때 불쌍한 병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고쳐주신 것이었고, 또 그러한 치료의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또 병고침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왔던 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찾아다니신 것이 아니고 그에게 찾아온 자들을 고치셨고, 그에게 나아왔던 자들은 대부분 그를 믿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은, 오늘날 교회가 교회 안에 병든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이나 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병자들을 치료하는 행위에 해당하지, 독립적 의료 활동이나 사회정치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자신의 사명 즉 선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넓어진 선교 개념을 의식하며 선교가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선언의 초안자 피터 바이엘하우스는 “고전적, 전통적 선교 개념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사회정치활동이 교회의 임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주께서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회정치활동을 명령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는 그들에게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를 명령하셨다. 또 주의 제자들 즉 초대 교회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확증하는 바다. 사회정치문제에 대한 신약성경의 교훈은 소극적이고 온건하다. 신약성경은 성도들이 사회의 질서를 존중하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고 규정된 세금을 바치고 또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칠 뿐이다. 또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대 사회적 말씀들은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에게 해당되었던 것이므로, 오늘날의 세속사회에 직접 적용되지 않고 일차적으로 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교회의 사명이나 임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주 예수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얻게 하는 사명이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장 귀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이 전통적 성경적 개념을 수정하고 선교를 단지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활동으로 보지 않고 교회가 세상에서 행해야 할 사회적,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소위 넓어진 선교 개념은 잘못된 개념이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자신의 사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적, 전통적 입장에서 이탈하였다. 교회의 사명에 대한 개념의 변질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 전도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하는 중대한 오류이다.


윤리적 부패

낙태

오늘날 낙태는 성적 문란과 더불어 행해지는 매우 심각한 사회악이다. 낙태로 죽어가는 생명은 셀 수 없이 많다. 1990년의 한 보고서는 전세계적으로 인공유산은 매년 5천 5백만건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한국도 연간 150만건에 달하였다. 낙태가 합법화된 1973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에서 낙태된 유아들의 수는 약 1,500만명이라고 하며, 세계적으로 연간 5,500만명이라고 하니, 이는 유아 대학살이 아닐 수 없다. 낙태는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죄악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낙태를 용납하고 있다. 1970년대 초 낙태를 합법화한 미국의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 미국 연합감리교회 총회는 낙태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니며 여성이 자유롭게 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었다. 1986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도 낙태에 관해 281대 266으로 ‘각자의 자유의사에 맡긴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미연합그리스도교회도 공식적으로 낙태를 지지했다.


동성애

동성애는 동성간의 성행위를 말한다. 오늘 사회에는 동성애를 용납해야 한다는 소리가 강해지고 있고 교회들 안에서도 동성애를 용납하려는 일이 널리 일어나고 있다.

1972년, 미연합그리스도교회는 윌리암 존슨의 안수를 허락하였다. 그는 대교단에서 안수받은 첫 번째의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 1980년, 그 교단은 현행적 남녀 동성애자들을 목사로 봉직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한 최초의, 유일한 대교단이 되었다.

1988년, 카나다 연합교회는 카나다에서 동성애자들의 목사 안수를 합법화한 최초의 교단이 되었다.
1997년 9월,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제일연합감리교회의 지미 크리치 목사는 그의 교인들 중 두 명의 여자 동성애자들을 위해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1998년 1월, 연합감리교회 목사들 일부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국의 대표적 동성애교회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교회 세계협회의 지도자 그윈 깃보드는 1999년 미국교회협의회(NCC) 총회에서 연사로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회집된 교회협의회 대표들 중 최소한 절반은 서서 그 여자에게 갈채를 보내었다. 2001년, 그 여자는 캘리포니아 교회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99년, 미합중국장로교회는 동성애 전도자 제인 스파를 그 해의 ‘신앙의 여성’ 수상자로 지명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둔 이 이혼모는 그 교단을 섬기는 첫 번째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

2000년 2월 12일, 미감독교회의 올림피아 교구 세인트 마크 대성당에서는 공공연한 동성애자 로버트 테일러 주교의 수석주교 임명식이 거행되었다. 200명에 달하는 교구 대표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수백명의 성직자와 교회 대표들이 그 의식에 참석하였다.

2003년 6월 7일, 미국 뉴햄프셔주 관구는 미감독교회 역사상 최초로 공공연한 동성애자 진 로빈손을 주교로 선출하였다.

심지어, 일부 복음주의자들도 동성애를 옹호한다. 랄프 블레어가 인도하는 ‘관심 있는 복음주의자들’이라는 친(親)동성애 단체는 연례 여름수련회들을 가진다. 그 단체의 주요 강사들의 명단에 풀러신학교 윤리학 은퇴교수 루이스 스미즈 등도 포함되었다.


여자 목사

1997년에, 229개의 북미 신학대학원 학생들의 30퍼센트는 여성이었는데, 그것은 1972년의 10퍼센트와 비교할 때 크게 증가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개신교 감독교회 신학교와 디스트릭에 있는 연합감리교회 웨슬리 신학교는 학생들의 절반이 여성이다.

2003년 4월,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여목사 안수허용 문제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 교단은 기감, 기장, 예장통합, 기하성, 성공회와 더불어 여목사 안수를 인정하는 교단이 되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그 이듬해 여성 안수 허용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여성 안수는 확실히 비성경적이다(고전 14:34-38; 딤전 2:11-14).


현대기독교음악(CCM)

오늘날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교회음악의 변질이다. 이것은 특히 청년집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다. 음악에서 교회와 세상의 구분선이 없어졌다. 온갖 세상적 음악 형식이 교회에 도입되고 있다.

W. A. 크리스웰 목사가 원로목사로 있는 남침례교단 소속 달라스 제일침례교회의 1998년 7월 25일 밤 청년 집회에 대해 그 지역의 한 신문은 “떠들석한 춤과 천둥 같은 기타들과 크리스챤의 경건으로 어울러진 연주회로 인하여 그 교회의 부속건물인 장엄한 스펄젼 해리스 빌딩은 흔들린 것 같았다”고 보도하였다.

미국 남침례교단의 2000년 신년 전야제에서 약 4만 6천명 이상의 남침례교 청년들은 미국 내에서 알려진 ‘기독교’ 록 밴드들에 의해 귀가 찢어지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찬양과 예배 음악을 즐겼고 약 새벽 2시까지 웃으며 노래하며 소리치며 춤추었다고 한다.

예장합동측의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에는 재즈피아노, 재즈기타, CCM 재즈반주법, 색소폰 등을 가르치는 실용음악아카데미가 있고, 광신대학교에는 팝과 재즈를 가르치는 실용음악과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와 장로가 임직서약에서 수납하는 예배 모범에 어긋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음악의 질서와 안정성과 아름다움을 버린 비성경적 풍조이다. 이것은 교회 음악의 세속화 현상이다.


열린 예배

오늘날에는 예배 형식까지도 세속화되고 있다.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처음 구상하였고 새들백 교회의 릭 워런 목사에 의해 인기를 얻은 열린 예배는 구도자들을 위해 밴드와 현대음악, 멀티미디어와 드라마 등을 사용한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교회들이 이런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시청각적 효과와 축제적 분위기는 그 예배의 한 특징이다.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이들은 교회의 외형적 구조 변경을 강조한다. 강대상을 큰 강대상 대신 작은 이동식 탁자로 대치하고 의자는 등받침 없는 것에 걸터앉게 하고 노래나 춤이나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요란스런 조명 세트를 장치한다. 조화나 생화로 강단을 단장한다. 전광판을 세우고 전문적 음향 장비를 설치한다. 목사나 안내 위원이나 성가대원은 청바지나 가벼운 옷을 입고, 전자 기타, 드럼, 심벌즈, 키보드 등을 사용해 기독교적 록 음악을 연주한다.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들은 찬송 대신 현대기독교음악(CCM), 곧 기독교 록 음악을 부른다. 릭 워런은 크리스챤 록 음악을 새 노래라고 말하며 새 노래를 부르라고 강조한다. 릭 워런은 교회가 해야 할 첫 번째 일 중의 하나가 오르간을 밴드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그는 몰아대는 비트를 가진 큰 소리의, 쉰 목소리의 음악이 그의 회중이 듣는 종류의 음악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주말 집회 때 정말, 정말 소리가 크다. . . . 나는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자 그 이유는, 어린아이 같은 대중은 음악을 느끼기를 원하지, 단지 그것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심지어 전통적 음악의 사용을 주장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죄와 동일시하였다.

성경에 근거하여 작성된 전통적 예배 모범은 번거롭고 낡은 진술로 여겨지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연 이런 예배를 받으실까? 이런 예배의 변질이 교회의 세속화가 아닌가?



6. 바른 길

이제까지 우리는 오늘날 교회들의 신학적, 윤리적 여러 문제들을 말하였다. 그러면 바른 길은 무엇인가?


개혁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의 차이

우선,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개혁주의는 교파적 개념이다. 개혁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루터파와 구별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의 주류는 루터파와 개혁파와 영국교회이었다. 개혁주의는 개혁파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물론, 그것은 신학적으로 개혁신학을 의미하고 교회행정적으로 대의정치체제를 의미한다. 개혁신학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도르트 신경, 그리고 그 후 촬스 핫지, 루이스 벌코프, 헤르만 바빙크, 박형룡 등의 신학자들의 조직신학에서 잘 정리되었다. 내세론, 특히 천년왕국설에 있어서, 한국장로교회는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고 보지만, 역사적 전천년설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가장 자연스런 해석이라고 본다.

복음주의는 본래 개신교를 가리키는 용어이었다. 그것은 천주교회와의 구별에서 나온 개념이었다. 천주교회는 성례주의, 의식주의이었고, 또 행위주의적이었다.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왜곡시켰고 또 구원이 인간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구원의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이며 바울이 경고한 다른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천주교회의 복음 왜곡과 구별하여 은혜의 복음을 재발견한 것이며 재천명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복음주의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가지는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킨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적 교회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을 가지지 않는다. 복음주의자들은 말로는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교훈은 순종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상 가장 심각한 이단이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이상하게도 자유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오늘날 대표적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은사주의를 용납하고 또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다.

근본주의는 20세기 미국교회에서 일어난 입장 혹은 운동이다. 그것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의 수호이고, 둘째는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첫 번째 특징이 성경적이며 기독교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두 번째 특징도 성경적으로 옳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성경적 분리의 원리

현대교회문제를 생각할 때, 교회의 바른 길은 결국 교제 문제에 있다. 성경은 성도간의 사랑을 가르치지만, 동시에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것은 개혁교회가 말하는 참 교회의 세 번째 표지인 권징의 충실한 시행에 내포된 바이기도 하다.

분리의 대상들

첫째로, 성경은 우리가 불신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리요”라고 말한다(고후 6:14-15). 교회와 세상,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있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교회적 교제에는 어떤 선이 있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오라고 초청되지만, 믿는 자들만 성도로서의 교제를 서로 나눌 수 있다.

둘째로, 성경은 우리가 이단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말하고(롬 16:17), 또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말한다(딛 3:10). 사도 요한도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고 말한다(요이 10-11). 오늘날에 이단들 중 대표적인 것은,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이단종파들과,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해서는 안 되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을 권징하거나 출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복음주의는 잘못된 입장이다.

셋째로, 성경은 우리가 드러난 죄를 짓고 회개치 않는 자와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말한다(고전 5:11, 13).

넷째로, 성경은 우리가 사도들의 교훈 곧 신약성경의 교훈을 고의적으로 어김으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말한다(살후 3:6). 특히 이 말씀은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 비록 복음주의자의 다수가 우리와 같이 복음을 믿는 참된 형제라고 생각되지만, 우리는 그들의 불순종과 타협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만일 그들이 그 행위를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할 것이다.


분리의 이유들

우리가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끊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교회의 본질 때문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성도라면 성경적 교리를 믿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기독교는 결코 물량주의, 숫자주의, 실용주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성경주의, 진리주의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며 또 거룩해야 한다(엡 5:26-27). 교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이단은 저주받을 사상이며 멸망케 할 사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단이나 고의적 죄악을 포용해서는 안 된다. 비록 지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겠지만, 우리는 순결한 교회, 흠 없는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는 뻔뻔스런 불신앙이나 고의적 불순종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이유는 악의 전염성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에 들어온 교리적 오류를 책망하면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했고(갈 5:9), 또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했다(딤후 2:17-18). 교회가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조만간 부패되고 회복 불가능한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이다. 교회가 윤리적 죄악을 포용하면, 세상 사람은 교회를 비난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다.


분리의 방법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교제를 끊어야 하는가?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훈과 입장과 활동들은 지적되고 비평되어야 한다. 또 교회 안에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이 있을 경우, 성도들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문제를 제기하고 또 교회 헌법의 권징 규칙을 따라 행해야 할 것이다(마 18:15-17).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막힌 담뿐 아니라 인간들 상호 간의 막힌 담도 허무신 위대한 화해자이시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진정한 형제요 자매이겠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함께 천국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불신앙, 이단, 회개치 않는 악, 고의적인 불순종에 대한 적절한 권징과 교제 단절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다. 교회는 권징을 충실히 행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교회적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과 개인적 교제를 가지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무분별한 교제로 악을 용납하고 승인하는 인상을 주위에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여호사밧의 실패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제를 끊을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교제 단절은 먼저 우리의 성실한 노력을 전제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의 교정을 위해 먼저 진지하게 권면하고 교회적으로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또 우리는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미움이나 교만은 그 어떤 죄 못지 않은 큰 죄이다.


기타 문제들

이제까지 말한 대로, 현대교회는 자유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운동, 복음주의, 은사주의, 선교개념의 변질과 윤리적 부패 등의 중요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제자훈련 방식의 목회와 교회제도, 신약성경의 전통본문의 회복 등도 우리가 조만간 다루어야 할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좁은 길

오늘날 교회의 바른 길은 좁은 길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바른 길은 좁은 길이었다고 본다. 노아는 좁은 길을 걸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은 좁은 길을 걸었다. 엘리야도, 미가야도, 또 아다나시우스도, 루터도, 칼빈도 그러했다. 주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라고 우리에게 명하셨다(마 7:13-14). 우리는 성경적 교훈에 충실히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바른 정신, 건전한 정신을 지키기를 원한다. 우리는 앞에서 논한 여러 주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물론 독선에 빠져서 경솔하게 남을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또한 진리의 확신이 없어 악과 타협하지도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아끼고 서로 사랑하자. 그러나 상대방의 부족을 지적해주고 책망도 하자.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사도 바울의 교훈과 권면을 기억하자.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디모데후서 4:2-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근본주의 장로교회와 협의회의 필요성

장로교회

우리는 우리나라에 근본주의적 장로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장로교회가 무엇인가? 장로교회는 대의(代議) 정치와 개혁신학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지고 있다.

대의(代議) 정치란, 교인들이 택한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교인들의 영적 특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들이며(벧전 2:5, 9) 따라서 교회의 중요한 일들에 참여하였다(행 1:15-26; 6:5-6; 14:23; 15:22). 감독교회는 교인들의 참정권을 인정치 않고 감독들만이 교회를 운영할 권한을 가진다고 보고, 회중교회는 일반 교인들의 영적 특권은 매우 중시하지만, 목사와 장로들의 감독적 직무와 권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으로서의 영적 특권을 가지고 있지만 목사와 장로들에게는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특별한 직무와 권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요 21:15-17; 행 20:28; 벧전 5:1-4).

개혁신학이란, 로마 천주교회와 루터교회와 알미니우스파 교회와 구별되는 사상 체계를 말한다. 개혁신학은 천주교회에 대항하여 16세기 종교개혁의 원리들을 따른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천주교회가 부정했던 ‘오직 성경!, 오직 은혜!, 만인제사장직!’ 등의 원리들을 강조하였다. 개혁신학은 또 종교개혁 때로부터 루터파 신학과 구별되었다. 특히, 성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의 방식에 대한 이해에서 그 둘은 서로 달랐다. 루터교회는 주님의 몸과 피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성찬의 빵과 포도즙 안에, 곁에, 아래 임재한다고 생각했으나, 개혁교회는 주의 영께서 성찬에 함께하실 뿐이라고 보았다. 또 교리 체계에 있어서 구원론적 강조나, 신인협력설적 경향, 및 성경이 명백히 정죄하지 않는 교회 전통과 의식의 보존 등도 루터파 교회가 개혁파 교회와 구별되는 점들이었다.

개혁신학은 17세기 개혁파 교회 안에서 일어난 알미니우스파와의 논쟁에서 그 특징이 더욱 분명하게 정립되었다.
(이하 생략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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