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재간을 부리며 쓸데없는 입씨름을 벌이자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리고 기가 막힌 건 이게 다른 것도 아닌 왕년의 민주화 운동 뒤끝이란 점이다. 권위주의를 향해 ‘민주·해방·정의’를 부르짖던 민주화 운동, 그렇던 그것이 이제 와선 국민의 신체 이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짓누르는 억압의 기제(機制)로 변모했다면 이 역설을 과연 어떤 논리로 설명해야 할 것인가?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 대학 특임교수 헤닝 멜버의 글 “해방 투쟁가들이 어떻게 억압자로 바뀌었는가?”는 위 질문에 앙골라, 모잠비크, 짐바브웨, 나미비아, 남아 연방 사례를 들어가며 명쾌하게 답했다. 식민 통치의 체포·구금·고문(拷問)에 맞서 죽기 살기로 투쟁하다 보니 저항자들은 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적 아니면 동지, ‘그들’ 아니면 우리로 갈라쳐 ‘그들’에겐 무자비한 섬멸전으로 임하는 습성, 이게 독립 후에도 그대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그들만의 강철 대오, 타자에 대한 극도의 의심, 나만 옳다는 독선·아집·폐쇄, 그리고 선민(選民)의식·특권의식이 그것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뱅당, 러시아 혁명기의 볼셰비키가 그랬다.


앙골라의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정권,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정권, 모잠비크 해방전선, 나미비아의 서아프리카 인민기구, 남아 연방의 아프리카 국민회의 등이 모두 그런 철혈(鐵血) 독재로 갔다. 살아남자니 지독해졌고, 지독하니까 독재 권력이 되었다. 그들은 저항하는 약자에서 새 권력 엘리트, 새 억압자로 변모했다. 구(舊) 엘리트와 신(新) 엘리트는 그래서 서로 ‘친근한 적’ 관계라고 헤닝 멜버 교수는 풀이했다.


‘해방’을 부르짖던 그들은 정권을 잡은 후엔 반대자들을 대량 학살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네 조직을 국가와 동일시했다. 합법적 경쟁자와 반대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들 내부에서도 개인의 자율을 용납하지 않고 집단 의사를 강제했다. 여성에 대한 성폭행도 많았다. 한국의 운동도 군사 권위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렇게 독재화하지 않았나 돌아볼 일이다. 사실이라면 그 운동은 이미 일종의 양산박 산채(山砦) 놀이, 패거리 한탕주의이지 민주화 운동이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오늘의 진정한 민주화 운동은 어떤 모습, 어떤 몸짓들일까? 유형이야 여럿 있을 수 있다. 특히 손꼽아야 할 게 ‘북한 체제 변혁 투쟁’일 것이다. 중국 닝보에 있던 유경식당 종업원 12명을 이끌고 탈북한 평양외국어대 출신 엘리트 허강일 유튜버가 한 사례다. 그는 ‘빼앗긴 들판’이 돼버린 한국에서 버티기 힘겨웠던지 미국으로 갔다. 최근엔 국제사회에 더 많이 알려진 여성 북한 인권운동가 박현미와 더불어 ‘북한을 바꾸다’란 채널을 개설했다. 두 사람은 남한 운동권이 아닌 자기들이야말로 이 시대 엄연한 민주화 운동가임을 선언했다. 전체주의·일당독재 반대 투쟁이야말로 민주화 운동 본연의 주제란 뜻이다. 한국의 일부 운동 양상은 “중간 좌파 아닌 극좌”라고도 박현미는 말했다. 진보를 자임하는 어느 평자인들 이 부분을 이렇듯 까놓고 다뤄본 적이 있었을까?


최근 한국 범좌파 내부에도 노선 분화가 일어나고는 있다. 운동 이력이 있는 눈으로 봤을 때도 지난 한 해 있었던 ‘동물농장’ 시리즈는 정말 해도 너무했다 싶었던 모양이다. 구(舊)소련·동유럽에서도 물리학자 사하로프, 전 유고슬라비아 부통령 밀로반 질라스가 ‘타락한 혁명’에 정면으로 맞섰다. 오늘의 한국 진보 일각의 내부 비판도 ‘운동의 타락’에 대한 그들의 참을 수 없는 경멸감이자 구역질이었을 것이다.


범좌파 일각의 이런 기운과 때를 같이해 범우파 내부에도 자유 포럼, 선명 야당 모색 등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사회정의를 위한 전국 교수모임’은 오늘의 상황을 유사 전체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자유인들은 자유 회복을 위해, 진보 일각은 진정한 진보를 위해, 유사 전체주의에 “아니요”라고 말해야 할 때다. 이게 ‘지금 이곳’의 진짜 민주화 운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