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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사태에 북한군 개입에 대한 18개의 증거들(Smoking Guns)


[지만원, 『5.18분석 최종보고서』 (시스템, 2018), 267-276쪽.]


1) 1980년, 광주 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학생, 운동권들은 5월 17일 밤중에 모두 지하로 숨거나 예비 검속에 걸려들어 심한 고문들을 받았다. 따라서 1980년 5월 18일 새벽부터 대한민국 땅에는 젊은이들을 거의 구경할 수 없었다. 경찰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광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공포의 시간대인 1980년 5월 18일 오전 9:30분에 날렵한 학생 200여 명이 전남대 정문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20여 명의 계엄군 병사에게 다가가 시비를 걸다가 돌을 던져 부상을 입히고 계엄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충장로와 금남로로 달려가 대기하고 있던 다른 대학생들과 파출소, 건물, 차량 등에 불을 질러 광주 시민들을 불러모았다. 불을 지르면 반드시 사람들이 꼬인다. 이들 학생무리들은 광주의 대학생들이 아니었지만 검찰-보고서는 대학생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광주시에는 5.18유공자들이 진술한 바와 같이 대학생들은 꼭꼭 숨었다. 이런 칼바람 부는 시기에 “광주대학생 200여 명이 책가방에 돌멩이를 가져와 계엄군에게 던지고 달아났다”면 이들은 분명 광주대학생이 아닐 것이 분명한데, 서울 검찰과 군검찰은 ‘수사경과보고서’에 이들을 북한특수군이라고 의심하지 않고, 로봇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대학생 200여 명”으로 기록하였다. 검찰이 청맹과니였다.


2) 5월 21일, 서울 출발한 20사단 지휘부가 08:00시 정각에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 중 극비 정보를 입수한 300여 대학생 시위대가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몽둥이, 화염병 등으로 기습공격을 가해 사단용 지프차를 위시한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하여 군납업체인 아시아 자동차공장에 가서 이들 지프차를 증표로 보여주며 장갑차 4대와 트럭 374대를 공출하였다. 또 다른 300여명의 대학생 시위대가 대형 버스 5대를 타고 아시아 자동차 공장으로 와서 이날 09시에는 600명이 이곳에 집결하였다. 당시 광주에는 이런 능력을 가진 600명이나 되는 대학생도 없었고, 이런 공적으로 민주화인사가 된 광주인이 전혀 없다. 한국에는 이 정도의 배포와 훈련 수준을 가진 집단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5.18에 동원됐던 광주인들은 사리 판단 능력이 없는 10대 아이들이거나 20대 막노동꾼들이었다. 단 한 번도 모여본 적이 없는 이런 애송이들이 300명씩 2개조를 편성해 그 중 1개조가 이동 중인 정규군 사단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으로 보고서 문장을 작성한 검찰은 이들 600명을 그냥 광주 학생 시위대라고 기계적으로 적기만 했다. 머리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손가락만 타자기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던 것이다. 이 보고서가 바로 전두환을 내란범으로 몰아가기 위해 작성된 검찰 보고서인 것이다.


3) 이들 600명은 전남 17개 시 .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낮 12시부터 오후 4까지 털어 5,308정의 무기와 탄약, 8톤의 TNT를 탈취하였다. 광주에 이런 능력을 가진 대학생 시위대는 없었다.


4) 광주 대학생들은 8톤 트럭 분량의 TNT를 폭탄으로 조립하여 도청 지하실에 쌓아놓았다. 이런 기술을 가진 사람은 전라도 계엄분소에 오직 한 사람 5급 갑의 배승일 문관뿐이었다. 광주의 핵심유공자들은 그들의 증언집에서 광주에는 이런 능력 가진 시민 없었다고 했다. 외지인이 한 것이다.


5)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 있었을 때에는 이들 600명이 활약했지만,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기인 5월 22일부터는 600명이 모두 복면을 한 상태에서 광주 시민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철칙 대문이었다. 폭도 역할을 한 광주의 10대 및 20대들은 복면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광주유지들이 무기반납을 위해 이들 비범했던 대학생들을 만나고 싶어 찾았지만 이들은 영영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광주인들은 광주 대학생이 모두 꼭꼭 숨어 있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들 600명을 서울에서 내려온 연.고대생 600명이라고 호칭했다. 5.18일부터 21일,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추방할 때까지의 무서운 조직력과 전투력, 이는 광주 시민들이 발휘한 것이 아니라 외지인 600명이 발휘한 것이었다.


6) 이들 600명은 5월 21일 오후와 22일 새벽 사이에 광주교도소를 6회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을 것이다. 이 무모한 작전은 북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 광주 시민들 중, 북의 지령을 직접 받고 매우 무리하게 야간에 광주교도소 공격을 지휘한 사람이 없다.


7) 광주에는 장갑차 4대를 운전할 수 있는 4명의 장갑차 운전수가 없었고, 이를 운전한 공적으로 유공자가 된 사람 또한 없다.


8) 1980년 재판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5월 26일 낮과 밤에 개념 없이 설치던 20세의 구두공, 20대 중반의 화물차 운전수 등 개념 없고 뿌리 없는 떠돌이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정보 당국은 5월 18일~21일까지 화려한 파괴-선동-엽기살인 기술을 보였던 600명 중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잡지 못했다.


9) 총에 맞아 사망한 광주 시민의 70%가 무기고에서 꺼낸 총에 의해 사망했다. 광주 시민이 광주 시민을 조직적으로 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10) <5.18분석 최종보고서> 사진들에는 광주인일 수 없는 얼굴과 포즈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수장갑을 끼고 장갑차 위에 기관총을 걸고 사격준비 상태를 유지하면서 눈에서 빛을 내뿜는 고도로 훈련된 몸매, 막대기 하나로 20사단을 습격한 날랜 몸매들, 육중한 유탄 발사기를 한 손으로 파지한 용병의 몸매, 복면한 얼굴들, 광주 시민들의 구경거리가 된 집단행동 등을 보인 용맹한 전사 집단은 광주의 양아치,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석공, 목공, 구두공 등일 수 없다. 이런 몸매는 3년 정도의 군대생활을 한 우리 정규군 병사들에서도 나올 수 없는 몸매요, 철저하게 다듬어진 자세이다.


11) 광주의 정의평화 천주교 신부들과 북한이 주고받으면서 반복적으로 발행한 사진첩들이 있다. 으깨진 얼굴, 전기톱 같은 것에 의해 반이 잘려진 얼굴 등을 담은 사진첩이다. 이런 으깨진 얼굴들을 놓고 천주교 신부들과 북한은 계엄군이 난자한 얼굴이라고 뒤집어씌우지만 우리의 자식들로 이루어진 계엄군은 이렇게 악랄한 심성을 갖고 있지도 않고 그렇게 잔인한 얼굴을 조각해 낼 시간도 없었다.


12) 광주의 도시가 파괴된 정도를 보면 양아치 계급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거대한 MBC 건물은 아무리 많은 화염병을 던졌어도 타지 않았다. 광주인들의 중언에 의하면 광주인이 아닌 외지인이 대형변압기를 폭파시켜서야 비로소 소각될 수 있었다. 파괴되고 소각된 잔해들을 청소하는 일은 계엄군이 담당했다. 40일 정도나 걸렸다.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려고 왔다던 계엄군이 어린아이들의 따름을 받으면서 40일씩이나 땀을 흘리며 광주사람들을 위해 청소를 해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런 장면을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을 보면 계엄군은 천사이고, 파괴자들은 전문전인 악마들이었다. 이런 능력 있는 악마들이 광주의 양아치 계급일 수는 없다.


13) 광주 5.18묘지에는 한국인으로 판명되지 않은 시체가 12구 있다.


14) 2013년 5월 15일, 채널A의 ‘김광현의 탕탕평평’ 프로는 실로 충격적인 프로를 진행했다. 5.18광주에 5.18광주작전을 총 지휘-점검하기 위해 북한의 광주작전지휘관 ‘문제심’(그 후 북한에서 국방차관으로 승진)이 광주로 급파되었다는 사실과 지금 분당에 살고 있는 당시 19세의 특수군 전사가 문제심을 호위하는 호위병으로 5.18광주에 내려왔었다는 사실을 1시간에 걸쳐 방송했다.


15) 2013년 4월 22일의 TV조선 방송이다. 전 월간조선 편집장이었던 김용삼씨가 1996년과 1998년에 황장엽과 김덕홍으로부터 확인한 내용을 밝혔고, 더 자세한 내용이 2013년 월간조선 4월호에 게재됐다. “5.18은 북한이 배후 조종한 후 계엄군에 뒤집어씌운 사건이고 그 작전을 기획한 대남부서 사람들이 5.18종료 직후 무더기로 훈장을 받고 술파티를 했다”는 요지의 증언이었다.


16) 탈북자들의 대부분이 5.18은 북한군이 남한에 가서 일으킨 폭동이라고 말하고, 5.18의 내용을 가장 확실하게 안다는 탈북자 16명이 2009년에 450여 쪽에 이르는 증언집『화려한 시기극의 실체 5.18』을 냈다. 이 내용들의 거의 모두가 남한의 수사자료와 일치했고,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보관돼 있는 북한 문서들과 일치했다.


17) 1982년에 북한 조국통일사에 실린 상황 자료 내용들이 1982년에 정리한 안기부의『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자료와 일치할 뿐만 아니라 더 자세하다. 북한군이 광범위하고 다이나믹하게 움직이던 폭동의 상황들을 자세히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계엄군이 소규모 단위로 진압할 때와 대대 단위로 진압할 때에 각기 전략을 달리해 싸웠다는 전략 전술 교훈까지 기록돼 있다. 북한군이 광주에서 직접 작전을 하지 않고서는 작성될 수 없는 대남공작 역사책이다.


18) 1982년 북한 조국통일사가 발행한『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들의 투쟁』595쪽과 1985년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발행한『광주의 분노』35쪽에는 “600여 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이 이룩한 성과와 역할이 기록돼 있고 1985년 안기부가 작성한『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40쪽에서부터는 여러 페이지에 걸쳐 “광주공원 학생시위대 300명”, “유동3거리 학생 시위대 300명”, “학생시위대 600명”이라는 표현이 매우 많이 나온다.


이상의 18가지 사실들은 5.18이 북한특수군 600명이 저질렀고 광주의 떠돌이, 노동자, 무직자 등 사회불만계층이 부나비가 되어 부화뇌동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smoking gun과 같은 증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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