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의 붉은 민주 투사들
2006.11.25 14:31
[송의달, “월남의 ‘붉은 민주 투사’들,” 조선일보, 2006. 10. 30, A31쪽; 홍콩 특파원.]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우리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北爆)을 중지시키고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 1967년 9월 월남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11명의 입후보자 중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 그는 유세 중 이런 선동성 연설로 반전(反戰) 여론을 부추기며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창했다. 공산화 후, 그는 월맹의 고정간첩이었음이 드러났다.
사이공(현 호찌민시) 함락 당시 타임지 특파원이었던 팜 쉬안 안(당시 47세). 그 역시 친척이 정보기관 최고 책임자였던 점을 이용, 디엠 대통령 시절부터 50여회에 걸쳐 핵심 군사첩보를 월맹에 넘겨준 거물 프락치였다. 뗏 전투(1968년)에서 월남 7사단의 대패를 초래한 공로로, 월맹 최고 군사훈장과 육군 소장 대우까지 받았다.
베트남 통일(1975년) 당시 월남의 패퇴를 예상한 이는 거의 전무(全無)했다. 58만명의 병력에 미군이 넘겨준 첨단 무기들로 월남군의 전력은 세계 4위 수준이었다. 경제력도 월남의 압도적 우위였다. 반면 월맹군은 소금만 갖고 하루 두 끼로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였다. 그런데도 월남은 월맹군의 침공 4개월여 만에 허망하게 항복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월남에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전쟁 피로증 같은 표면적 현상 외에 민주화 인사로 위장해 월남의 신경망을 장악·마비시킨 간첩 세력을 꼽는다. 쭝딘쥬와 팜 쉬안 안, 유명 도지사였던 녹따오 등이 월맹과 내통해 안에서부터 자유 월남을 무너뜨린 대표적인 ‘붉은 민주 투사’들이다. 이들은 비밀 공산당원(9500명)과 지하 인민혁명 당원(4만명) 등을 합쳐 월남 총인구의 0.5% 남짓했다. 하지만 정치권과 시민·종교단체, 언론 등에 침투한 이들은 ‘친(親)월맹-반미(反美) 감정’ 확산 등을 통한 월맹의 공산화 통일전선 공작의 선봉장이었다. 한 전직 월남 주재 외교관은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티우의 비서실장도 간첩이었다”고 전했다.
월맹에 대한 이들의 충성은 맹목적이었다.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의 땅굴에 있던 베트남 지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 각 부처와 군 총사령부에서 이뤄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 후면 상세하게 보고됐을 정도였다. 이들은 휴전협정 체결(73년)로 미군과 한국군이 월남에서 철수하자 100여개의 애국·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어 좌경화 총공세에 나섰다. 집요한 선전·선동술로 이들에 대한 수사는 양심적인 반전·민주·평화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매도당했다. 동족간의 전쟁은 미국을 위한 ‘절대 악(惡)’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졌고, 월남의 정보·대공(對共) 기관은 무력화됐다. 월맹에 대한 주적(主敵) 심리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전쟁의 승패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붉은 민주 투사’들의 말로(末路)는 비참했다. “자본주의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대부분 체포·처형당한 것이다. 티우 정권 시절 ‘반미자주’를 외치던 도안 토아이 전 사이공대 학생회장은 뒤에 “월맹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우리는 완전히 속았다. 수많은 양심인사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갔다”고 폭로했다.
당시 베트남을 휩쓴 광풍(狂風)의 역사를 복기(復棋)하노라면 31년이 지난 요즘 한반도 상황이 겹쳐 떠오른다. 기우(杞憂)이길 바라지만….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우리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北爆)을 중지시키고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 1967년 9월 월남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11명의 입후보자 중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 그는 유세 중 이런 선동성 연설로 반전(反戰) 여론을 부추기며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창했다. 공산화 후, 그는 월맹의 고정간첩이었음이 드러났다.
사이공(현 호찌민시) 함락 당시 타임지 특파원이었던 팜 쉬안 안(당시 47세). 그 역시 친척이 정보기관 최고 책임자였던 점을 이용, 디엠 대통령 시절부터 50여회에 걸쳐 핵심 군사첩보를 월맹에 넘겨준 거물 프락치였다. 뗏 전투(1968년)에서 월남 7사단의 대패를 초래한 공로로, 월맹 최고 군사훈장과 육군 소장 대우까지 받았다.
베트남 통일(1975년) 당시 월남의 패퇴를 예상한 이는 거의 전무(全無)했다. 58만명의 병력에 미군이 넘겨준 첨단 무기들로 월남군의 전력은 세계 4위 수준이었다. 경제력도 월남의 압도적 우위였다. 반면 월맹군은 소금만 갖고 하루 두 끼로 연명하는 비참한 신세였다. 그런데도 월남은 월맹군의 침공 4개월여 만에 허망하게 항복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월남에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전쟁 피로증 같은 표면적 현상 외에 민주화 인사로 위장해 월남의 신경망을 장악·마비시킨 간첩 세력을 꼽는다. 쭝딘쥬와 팜 쉬안 안, 유명 도지사였던 녹따오 등이 월맹과 내통해 안에서부터 자유 월남을 무너뜨린 대표적인 ‘붉은 민주 투사’들이다. 이들은 비밀 공산당원(9500명)과 지하 인민혁명 당원(4만명) 등을 합쳐 월남 총인구의 0.5% 남짓했다. 하지만 정치권과 시민·종교단체, 언론 등에 침투한 이들은 ‘친(親)월맹-반미(反美) 감정’ 확산 등을 통한 월맹의 공산화 통일전선 공작의 선봉장이었다. 한 전직 월남 주재 외교관은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티우의 비서실장도 간첩이었다”고 전했다.
월맹에 대한 이들의 충성은 맹목적이었다.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의 땅굴에 있던 베트남 지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 각 부처와 군 총사령부에서 이뤄지는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 후면 상세하게 보고됐을 정도였다. 이들은 휴전협정 체결(73년)로 미군과 한국군이 월남에서 철수하자 100여개의 애국·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어 좌경화 총공세에 나섰다. 집요한 선전·선동술로 이들에 대한 수사는 양심적인 반전·민주·평화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매도당했다. 동족간의 전쟁은 미국을 위한 ‘절대 악(惡)’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졌고, 월남의 정보·대공(對共) 기관은 무력화됐다. 월맹에 대한 주적(主敵) 심리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전쟁의 승패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붉은 민주 투사’들의 말로(末路)는 비참했다. “자본주의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에서도 똑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대부분 체포·처형당한 것이다. 티우 정권 시절 ‘반미자주’를 외치던 도안 토아이 전 사이공대 학생회장은 뒤에 “월맹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우리는 완전히 속았다. 수많은 양심인사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갔다”고 폭로했다.
당시 베트남을 휩쓴 광풍(狂風)의 역사를 복기(復棋)하노라면 31년이 지난 요즘 한반도 상황이 겹쳐 떠오른다. 기우(杞憂)이길 바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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