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부른 유화정책과 뮌헨회담
2007.10.10 13:29
[김정은, “2차대전 부른 체임벌린의 對히틀러 유화정책과 뮌헨회담,” 미래한국, 2007. 9. 8, 5쪽.]
“우리는 크고 강력한 이웃나라와 대결하고 있는 조그만 나라에 동정하지만 어떠한 사정이 있든 다만 그것만을 위해 전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이끌어 넣을 수는 없다. . . . 나는 내 영혼 깊숙한 곳까지 철저한 평화애호자이다. 국가 간의 무력충돌은 내게는 악몽이다.” 히틀러가 체코 주데텐 지역을 침략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1938년 9월 27일,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은 방송에서 국민들을 향해 이같이 말했다.
그가 말한 ‘조그만 나라’란 체코를 의미했다. 히틀러는 이미 수년 전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에서 그의 침략 야욕을 밝혔고,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며 공공연하게 자신의 야망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임벌린 수상은 ‘전쟁을 피한다’는 명목 하에 독일에 타협하는 정책을 계속했다. 은 체임벌린의 ‘평화에 대한 환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영국은 평화의 유지를 원했고, 이것을 위해 나찌 독일의 요구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같은 태도로부터 이른바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이 탄생한다. 1938년의 뮌헨회담은 유화정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히틀러에 굴복하여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독일에 넘겨주도록 결정한 것이다.
당시 체코에는 320만 명의 독일인이 살고있었다. 주데텐 독일인은 민주주의 국가인 체코에서 적당히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1938년 9월 12일, 히틀러는 뉘렌베르크 당대회에서 선동적인 연설을 한다. “주데텐 독일인들이 체코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으며 독일은 그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요지였다.
체임벌린은 연설 다음날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를 만난다. 69세의 나이에 한 번도 비행기 여행을 한 적이 없는 인물이 7시간이나 비행을 하여 독일의 맨 끝에 있는 베르흐테스가르텐까지 날아간 것이다.
체임벌린은 회담 후 “그 사나이는 냉혹하고 고집투성이이지만 나는 그의 참다운 모습을 본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그 인물에게서 한번 약속을 하면 믿을 수 있는 사나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히틀러에 대해 평가했다(윌리엄 L. 샤이러, 제3제국의 흥망, 1993).
영국수상이 왜 이처럼 히틀러의 위험성을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서울대 박지향 교수는 저서(영국사, 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2007)에서 “전통적 정치만을 알고 있던 . . .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자기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형의 악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9월 말까지 그는 세 차례에 걸쳐 히틀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 결과는 독일의 끝없는 요구를 전부 들어준 것 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주데텐 독일인이 50%이상 살고있는 지역은 ‘평화의 유지와 체코의 생명적 이익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독일에 넘겨주어야 한다는 데 합의한다. 체코의 베네슈 대통령은 두 강대국의 태도에 대해 “우리는 치사한 배반을 당했다”고 표현했지만, 두 나라는 베네슈 대통령에게 체코가 영불의 공동제안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단독으로 독일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9월 29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수반이 뮌헨에 모였다. 9월 30일 새벽 1시가 조금 지나서 히틀러, 체임벌린, 무솔리니, 달라디에는 순서대로 10월 1일 독일군이 체코에 진주를 개시하고 10월 10일 주데텐 지역의 점령을 완료할 것을 규정한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뮌헨협정 후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평화선언서를 제안한다. “우리들 독일 총통 겸 수상과 영국 총리대신은 오늘 거듭 회합하여 영독관계의 문제는 양국과 유럽에 있어서 제1급의 중요성을 가진다고 인정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우리는 어젯밤 서명된 협정과 영독 해군협정을, 다시는 전쟁에 이용하지 않는다는 양국민이 희구하는 상징이라고 인정한다.” 히틀러는 그 선언서를 읽고 즉시 서명했으며, 체임벌린은 런던으로 돌아왔다.
히틀러가 서명한 평화선언서를 들고 귀국한 체임벌린은 영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수상은 선언서를 흔들며 “여기 우리시대의 평화가 있다”고 외쳤다. 런던타임스는 “전장에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 정복자의 누구도, 이보다 더 고귀한 월계관으로 장식된 사람은 없었다”고 극찬했다. 체임벌린에게 감사하는 전국 모금운동이 일어났으나 체임벌린이 정중하게 이것을 거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영국 정계에서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사람이 바로 윈스턴 처칠이다. 10월 5일 하원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패배를 맛보았다”고 비판했다. 그가 후일 저술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처칠은 이 발언에 대한 야유가 진정될 때까지 연설을 몇 번씩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인들은 뮌헨회담으로 인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환호했으나, 평화에 대한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에게 수차례 더 이상의 영토침략은 없다고 약속했었다. 그는 “체코는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요구하는 영토”라고 말하기도 했다.
1939년 3월 15일 독일은 프라하에 입성했다. 다음날 히틀러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독일에 병합시킨다고 선언했다. 영국인들의 충격 또한 엄청났다. 불과 6개월만에 여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유화정책의 실상이 드러났다. 이어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 국경을 침략하였고, 4일 영국과 유럽국가들이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세계 제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크고 강력한 이웃나라와 대결하고 있는 조그만 나라에 동정하지만 어떠한 사정이 있든 다만 그것만을 위해 전 대영제국을 전쟁으로 이끌어 넣을 수는 없다. . . . 나는 내 영혼 깊숙한 곳까지 철저한 평화애호자이다. 국가 간의 무력충돌은 내게는 악몽이다.” 히틀러가 체코 주데텐 지역을 침략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1938년 9월 27일,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은 방송에서 국민들을 향해 이같이 말했다.
그가 말한 ‘조그만 나라’란 체코를 의미했다. 히틀러는 이미 수년 전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에서 그의 침략 야욕을 밝혔고,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며 공공연하게 자신의 야망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임벌린 수상은 ‘전쟁을 피한다’는 명목 하에 독일에 타협하는 정책을 계속했다. 은 체임벌린의 ‘평화에 대한 환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영국은 평화의 유지를 원했고, 이것을 위해 나찌 독일의 요구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같은 태도로부터 이른바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이 탄생한다. 1938년의 뮌헨회담은 유화정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히틀러에 굴복하여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독일에 넘겨주도록 결정한 것이다.
당시 체코에는 320만 명의 독일인이 살고있었다. 주데텐 독일인은 민주주의 국가인 체코에서 적당히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었다. 1938년 9월 12일, 히틀러는 뉘렌베르크 당대회에서 선동적인 연설을 한다. “주데텐 독일인들이 체코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으며 독일은 그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요지였다.
체임벌린은 연설 다음날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를 만난다. 69세의 나이에 한 번도 비행기 여행을 한 적이 없는 인물이 7시간이나 비행을 하여 독일의 맨 끝에 있는 베르흐테스가르텐까지 날아간 것이다.
체임벌린은 회담 후 “그 사나이는 냉혹하고 고집투성이이지만 나는 그의 참다운 모습을 본 것처럼 생각된다. 나는 그 인물에게서 한번 약속을 하면 믿을 수 있는 사나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히틀러에 대해 평가했다(윌리엄 L. 샤이러, 제3제국의 흥망, 1993).
영국수상이 왜 이처럼 히틀러의 위험성을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서울대 박지향 교수는 저서(영국사, 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2007)에서 “전통적 정치만을 알고 있던 . . .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자기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형의 악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9월 말까지 그는 세 차례에 걸쳐 히틀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 결과는 독일의 끝없는 요구를 전부 들어준 것 뿐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주데텐 독일인이 50%이상 살고있는 지역은 ‘평화의 유지와 체코의 생명적 이익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독일에 넘겨주어야 한다는 데 합의한다. 체코의 베네슈 대통령은 두 강대국의 태도에 대해 “우리는 치사한 배반을 당했다”고 표현했지만, 두 나라는 베네슈 대통령에게 체코가 영불의 공동제안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단독으로 독일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9월 29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수반이 뮌헨에 모였다. 9월 30일 새벽 1시가 조금 지나서 히틀러, 체임벌린, 무솔리니, 달라디에는 순서대로 10월 1일 독일군이 체코에 진주를 개시하고 10월 10일 주데텐 지역의 점령을 완료할 것을 규정한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뮌헨협정 후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평화선언서를 제안한다. “우리들 독일 총통 겸 수상과 영국 총리대신은 오늘 거듭 회합하여 영독관계의 문제는 양국과 유럽에 있어서 제1급의 중요성을 가진다고 인정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우리는 어젯밤 서명된 협정과 영독 해군협정을, 다시는 전쟁에 이용하지 않는다는 양국민이 희구하는 상징이라고 인정한다.” 히틀러는 그 선언서를 읽고 즉시 서명했으며, 체임벌린은 런던으로 돌아왔다.
히틀러가 서명한 평화선언서를 들고 귀국한 체임벌린은 영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수상은 선언서를 흔들며 “여기 우리시대의 평화가 있다”고 외쳤다. 런던타임스는 “전장에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온 정복자의 누구도, 이보다 더 고귀한 월계관으로 장식된 사람은 없었다”고 극찬했다. 체임벌린에게 감사하는 전국 모금운동이 일어났으나 체임벌린이 정중하게 이것을 거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영국 정계에서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사람이 바로 윈스턴 처칠이다. 10월 5일 하원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패배를 맛보았다”고 비판했다. 그가 후일 저술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처칠은 이 발언에 대한 야유가 진정될 때까지 연설을 몇 번씩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인들은 뮌헨회담으로 인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났다고 환호했으나, 평화에 대한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에게 수차례 더 이상의 영토침략은 없다고 약속했었다. 그는 “체코는 유럽에서 마지막으로 요구하는 영토”라고 말하기도 했다.
1939년 3월 15일 독일은 프라하에 입성했다. 다음날 히틀러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독일에 병합시킨다고 선언했다. 영국인들의 충격 또한 엄청났다. 불과 6개월만에 여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유화정책의 실상이 드러났다. 이어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 국경을 침략하였고, 4일 영국과 유럽국가들이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세계 제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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