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에 들어간 엄마들은 다른 말을 못 했다. "○○야, ○○야, ○○야!"만 반복했다. 어떤 엄마들은 그 소리도 안 나와 그저 "아아악, 아아악, 아아아아악!" 했다. 아빠들 울음소리도 한 옥타브 낮을 뿐 똑같이 처절했다. 생살을 찢을 때, 사람이 이런 소리로 울 것 같았다.
5년 전 열흘간 팽목항 시신 확인 천막 앞을 지켰다. 그때 들은 비명을 떠올리면 지금도 명치가 먹먹하다.
울음이 좀 잦아들기까지 매번 대략 20분쯤 걸렸다. 한 가족이 꺽꺽 울며 걸어나온 천막에 다음 시신이 들어가고, 다음 가족이 불려갔다. 천막 뒤에서 아이들 시신을 태운 앰뷸런스가 한 대, 한 대 안산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그해 봄 내 기억에 가장 깊게 새겨진 장면은 팽목항이 아니라 진도체육관에서 벌어졌다. 침몰 이틀째 밤, 몇몇 사람이 "교감 어딨어?" "교감 나와!"를 외치기 시작했다. 외침은 곧 아우성이 됐다. 아이들과 함께 탔다 구조된 교감에게 사람들은 '살아남은 죄'를 물으려 했다.
교감 대신 교장과 교사들이 일렬로 단상에 꿇어앉았다. 욕설이 돌팔매처럼 쏟아졌다. 수많은 사람이 "왜 당신들은 살아 있느냐"고 악을 썼다. 교감이 그 이튿날 목을 매 숨졌다.
하지만 내가 그날 밤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 건 군중의 고함이 아니었다. 고통은 으레 인간을 광폭하게 만든다. 거기 맞서던 세 사람의 선한 얼굴이 내 기억에 각인됐다.
교감도 실은 체육관에 있었다는 걸 뒤에 알았다. 마지막까지 제자들이 먼저 탈출하게 돕다가 저혈당 쇼크 상태에서 해경에 구조된 사람이었다. 장내가 거칠어지자 교장이 교감에게 "선생님은 체육관 2층에 가 계시라"고 했다. 몇 분 안 가 부모들이 "교감 내놓으라"고 달려들 듯 교장에게 다가섰다. 교장은 "제가 대신 나가겠다"고 했다. 숙연한 얼굴, 차분한 말투였다. '이게 선생님이구나' 했다. 그는 두 달 뒤 직위 해제됐다.
광풍이 지나고 교장과 교사들이 단상에서 내려간 뒤, 한 엄마가 단상 앞에 나와 마이크를 들고 "이러지 말자. 우리 조금만 참자"고 했다. 누군가 "미친 ○, 조용히 해!" 했다. 그 엄마는 마주 악쓰지 않았다. 목멘 소리로 "그래요, 저 미친 ○이에요" 했다. "딸이 물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래도 참아요" 했다.
그 엄마가 들어간 뒤 다른 아빠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우리, 마음을 좀 바꾸자"고 했다. 해경 직원들을 가리키며 "저분들 내일 일하게 해줘야 한다. 캔커피도 하나 뽑아 드리고 '수고하신다' '고맙다' 그런 말씀도 좀 드리자"고 했다. 나중에 헤밍웨이 책에서 "용기는 압박을 견디며 보이는 기품"이란 구절을 읽었다. 이 세 분을 생각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세 가지다. 첫째, 한국은 그때보다 안전해졌나. 이 정부 들어서도 KTX가 뒤집히고, 목욕탕과 노인 병원에 불이 나고, 서울 도심 공립 유치원이 주저앉았다. 둘째, 그렇다면 지난 5년간 우리는 대체 뭘 했나. 그 많은 논의와 조사와 수사와 재판은 정확히 무엇을 위한 거였나.
세월호 5주기 직후, 한국 사회를 깊이 아는 영국 언론인이 조선일보에 "세월호 추모 시설을 광화문광장에 세우는 건 적절치 않다"는 글을 썼다가, K BS 기자에게 "원문 보여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가 "원문을 다른 언론사에 보내줘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하면서 던진 질문이 있다. "근데 KBS가 왜 이러는 거예요?"
'KBS가 왜 이러나.' 이건 영국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왜 이렇게 됐는지' 물어야 할 말이다. 5년간 우리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얘기만 줄곧 해온 것 아닌가.
5년 전 열흘간 팽목항 시신 확인 천막 앞을 지켰다. 그때 들은 비명을 떠올리면 지금도 명치가 먹먹하다.
울음이 좀 잦아들기까지 매번 대략 20분쯤 걸렸다. 한 가족이 꺽꺽 울며 걸어나온 천막에 다음 시신이 들어가고, 다음 가족이 불려갔다. 천막 뒤에서 아이들 시신을 태운 앰뷸런스가 한 대, 한 대 안산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그해 봄 내 기억에 가장 깊게 새겨진 장면은 팽목항이 아니라 진도체육관에서 벌어졌다. 침몰 이틀째 밤, 몇몇 사람이 "교감 어딨어?" "교감 나와!"를 외치기 시작했다. 외침은 곧 아우성이 됐다. 아이들과 함께 탔다 구조된 교감에게 사람들은 '살아남은 죄'를 물으려 했다.
교감 대신 교장과 교사들이 일렬로 단상에 꿇어앉았다. 욕설이 돌팔매처럼 쏟아졌다. 수많은 사람이 "왜 당신들은 살아 있느냐"고 악을 썼다. 교감이 그 이튿날 목을 매 숨졌다.
하지만 내가 그날 밤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 건 군중의 고함이 아니었다. 고통은 으레 인간을 광폭하게 만든다. 거기 맞서던 세 사람의 선한 얼굴이 내 기억에 각인됐다.
교감도 실은 체육관에 있었다는 걸 뒤에 알았다. 마지막까지 제자들이 먼저 탈출하게 돕다가 저혈당 쇼크 상태에서 해경에 구조된 사람이었다. 장내가 거칠어지자 교장이 교감에게 "선생님은 체육관 2층에 가 계시라"고 했다. 몇 분 안 가 부모들이 "교감 내놓으라"고 달려들 듯 교장에게 다가섰다. 교장은 "제가 대신 나가겠다"고 했다. 숙연한 얼굴, 차분한 말투였다. '이게 선생님이구나' 했다. 그는 두 달 뒤 직위 해제됐다.
광풍이 지나고 교장과 교사들이 단상에서 내려간 뒤, 한 엄마가 단상 앞에 나와 마이크를 들고 "이러지 말자. 우리 조금만 참자"고 했다. 누군가 "미친 ○, 조용히 해!" 했다. 그 엄마는 마주 악쓰지 않았다. 목멘 소리로 "그래요, 저 미친 ○이에요" 했다. "딸이 물속에 들어가 있어요. 그래도 참아요" 했다.
그 엄마가 들어간 뒤 다른 아빠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우리, 마음을 좀 바꾸자"고 했다. 해경 직원들을 가리키며 "저분들 내일 일하게 해줘야 한다. 캔커피도 하나 뽑아 드리고 '수고하신다' '고맙다' 그런 말씀도 좀 드리자"고 했다. 나중에 헤밍웨이 책에서 "용기는 압박을 견디며 보이는 기품"이란 구절을 읽었다. 이 세 분을 생각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세 가지다. 첫째, 한국은 그때보다 안전해졌나. 이 정부 들어서도 KTX가 뒤집히고, 목욕탕과 노인 병원에 불이 나고, 서울 도심 공립 유치원이 주저앉았다. 둘째, 그렇다면 지난 5년간 우리는 대체 뭘 했나. 그 많은 논의와 조사와 수사와 재판은 정확히 무엇을 위한 거였나.
세월호 5주기 직후, 한국 사회를 깊이 아는 영국 언론인이 조선일보에 "세월호 추모 시설을 광화문광장에 세우는 건 적절치 않다"는 글을 썼다가, K BS 기자에게 "원문 보여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가 "원문을 다른 언론사에 보내줘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하면서 던진 질문이 있다. "근데 KBS가 왜 이러는 거예요?"
'KBS가 왜 이러나.' 이건 영국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왜 이렇게 됐는지' 물어야 할 말이다. 5년간 우리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얘기만 줄곧 해온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