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아침, 광주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그날 새벽 진주한 계엄군과 전남대 학생이라면서 학교에 들어가겠다는 젊은이들 사이의 충돌이 발단이 되어 빚어진 광주사태는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다시 광주에 진입함으로써 종결되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광주사태는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국군’과 무장한 ‘시민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던 당시의 상황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민족사의 씻을 수 없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진행 과정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희생자와 그 가족들, 그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시민들의 상처는 세월이 지난다고 쉽게 치유될 수는 없을 것이다. 광주사태의 상처가 완치되지 않은 채 긴 후유증을 앓고 있는 큰 이유는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정치사회적 논란과 몇 차례 뒤집힌 사법적 판단들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내란’으로 판정되었던 광주사태는 어느날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되더니 어느 순간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객관적 사실 대신 정치적 신화로 바뀐 5·18
역사는 수정되었고 그 역사는 사회적 통념으로 굳어졌다. 정치적으로는 ‘신화’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민주화운동’이라는 인식에 어긋나는 어떠한 이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국민의 가슴 한편에는 우리 사회 저변에는 군수공장과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한 ‘시민군’이 국군을 공격했던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한 의문을 증폭시키는 새로운 진술들과 정황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지만 이를 공론화하는 길은 봉쇄되어 있는 것 같다. 도대체 광주사태 때 무슨 일들이 벌어졌으며 그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잠복해 있을 뿐 정리되지 않고 있다. 논란이 정리되지 않는 한 그 비극의 상처도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하겠다. 광주사태는 아직도 진행 중인 역사인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광주사태가 ‘정권욕에 사로잡힌 군부의 명령을 받은 공수부대가 민주화 시위를 하던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으로만 알고 있다. ‘전라도의 씨를 말리기 위해 환각제를 먹은 병사들이 총칼을 이용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참혹하게 살해했으며, 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는 등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들이 더해져 전해지고 있다.
광주사태와 관련해서 상반된 주장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발포 문제다. “무장한 시위대의 공격에 대한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어쩔 수 없는 총기 사용이 있었다”는 군 측의 입장과 “공수부대가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총기 공격을 했다”는 시위대 측의 입장이 그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현장도, 증거도, 시신도 남아 있지 않은 현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남아 있는 객관적 증거와 논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시민을 향한 무차별 사격은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은 광주사태 당시의 희생자 수다.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광주사태가 끝난 후 1980년 6월 19일 광주지검이 민 관 군 합동으로 철저한 조사를 거쳐 집계한 민간인 사상자 수는 165명이다. (5·18 검찰수사기록 103,009면).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 있는 장소에서 무차별총기공격을 했다면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을 거라는 사실은 굳이 군 경험이 없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 165명 중에는 총기 오작동 등 폭발물 안전사고로 발생한 사망자, 음주 운전 및 과속을 인한 교통사고로 발생한 사망자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건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총기로 인한 사망자 가운데는 계엄군이 사용하지 않은 카빈 등에 의한 사망자도 적지 않다. 이 사실은 인명 살상이 발생할 수 있는 총기 사용을 최대한 억제했다는 군 당국의 주장에 신뢰를 갖게 하는 일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일은 무장시위대의 공격에 의한 군경사망, 화염병 공격과 낫 등 흉기로 참혹하게 난자당해 숨진 국군병사들, 도청 지하실에 설치된 엄청난 분량의 폭약을 해체하려다 피살된 학생의 희생은 말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또 많은 사람이 모르는 부분은 정말 민주화를 위한 평화시위였느냐 하는 점이다. 당시 시위대는 군수업체인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해 장갑차와 군용차량을 탈취하고 불과 4시간 만에 38곳의 무기고를 탈취했으며 이 과정에서 탈취된 무기는 총기가 5400여정, 탄약 28만8000발, 폭약 2180톤의 규모이다.장갑차와 군용 트럭에 수천 정의 총기로 무장한 속칭 시민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자위권 발동이란 점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군대에게 더해진 불명예
광주 문제를 말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써야 했던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렵고 불편한 일이라 하더라도 진실을 밝히는 것만이 희생자들을 위한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광주사태를 둘러싼 모든 논란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시비와 논란을 종결짓고, 비극적 사태의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일도 나의 몫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집권 욕심 때문에 최규하 대통령을 비롯 내각과 군수뇌부를 강박해 계엄령을 선포케 하고, 군병력을 투입하기 위한 명분을 위해 과격시위를 방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시민의 반발과 폭력시위를 유도하려고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광주사태의 원인과 그 결과가 모두 나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내가 사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5·18사태 이후 3개월여 만에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내가 청와대를 향해 달려가는 어느 길목에 광주사태라는 장치를 설치해놨다고 믿는 것이다.
내가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사람들은 역사와 국민의 이름을 앞세운 채 나에게 5·18사태의 진실에 관해 물었다. 묻는 데 그치지 않고 추궁과 공격이 이어졌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자 나와 5·18은 새삼 사법적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그 결말은 나 개인의 수형(受刑)에 그치지 않고 역사의 전도(顚倒)로 나타났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고착화 된 것 같다. 광주사태의 자초지종이 모두 나의 머리와 손발에 의해 저질러진 거라며 마치 광주사태 당시 내가 군을 통수하는 지위에 있었거나 아니면 계엄군 사령관이었을 거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광주사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후 출간된 그의 마지막 회고록은 내가 12·12 후 계엄사령관에 취임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아마도 그 회고록을 집필한 작가의 실수인 듯 싶지만, 어쨌든 그런 실수가 생길 만큼 광주사태 당시 나의 역할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못박혀 있는 것이다.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았고 단편적 정보만 접해본 젊은 세대들은 내가 당시 대통령도, 계엄사령관도 아니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할 것이다.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고 있었으나,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사이의 그 어느 시간에도, 전남 광주의 그 어느 공간에도 나는 실재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계엄군의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지시하거나 실행하기 위한 그 어떤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이 없다. 그러나 나의 생애를 회고하며 정리하는 이 글에서 나는 어느 대목보다도 광주사태에 관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상세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광주사태와 관련한 논란의 중심에 내가 있는 한, 그렇게 하는 것이 역사와 국민의 요구에 따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세상이 나를 단죄하기 위해 ‘무고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국민을 학살한 군대’라는 오명을 덧씌운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를 되찾아줘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
국군 장병들은 자위(自衛) 목적이 아닌 한 총기를 사용하지 않도록 훈련받는다. 4·19 때 계엄령에 따라 출동했던 국군 장병들은 국민의 환영을 받았다. 부마사태 때도 시민들은 위력시위를 하는 공수부대와 해병대 장병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
지금 와서 되돌아볼 때 정보기관 책임자로서 아쉽기도 하고, 또 책임감을 느끼는 점은 광주사태의 전조(前兆)를 전혀 알아챌 수 없었다는 것과 5월 19일 이후 상황이 폭동사태로 악화될 때 정보기능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계엄사의 합동수사본부장인 보안사령관은 상관인 계엄사령관의 참모 중 한사람으로서 그 어떤 조언을 하거나 건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 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조차 할 수 없었다. 파출소는 물론 경찰서까지 경비병력조차 남겨두지 않은 채 모두 피신해 보안사령부로서는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안부대 요원이나 정보부 요원은 경찰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경찰이 존재해야만 치안이 유지되고, 치안이 유지되어야만 정보부 요원도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5월 27일 광주가 수복되기까지 정보 수사 기능은 완전 마비된 상태였다.
당시 5·17 시국수습방안은 계엄의 전국 확대 이외에도 국기문란 사범과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수사를 포함하고 있어서 나는 그 일에 힘을 쏟아야 했다. 5월 17일 밤 10시부터 관련 혐의자들을 연행하는 등 수사를 본격화했던 것이다. 또 광주사태 초기에는 상황이 그처럼 악화될 것으로 예상할 수도 없었고, 또 5월 20일 상황까지는 부실한 정보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5월 21일까지 2개 공수여단과 20사단이 순차적으로 증파되어 작전에 투입했지만 전투 정보의 수집 및 분석은 작전부대 자체의 정보·작전 기능이 담당하는 일이고 중앙정보부나 보안사 등 일반 정보기관이 관여할 여지는 없는 것이다.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할 즈음에는 북한이 우리의 혼란을 틈타 군사행동을 취할 가능성에 대비한 정보분석에 주력했다. 북한은 5월 19일 무기검열, 비상소집, 생필품 비축 등 전쟁준비 계획을 점검 보완하는 한편 5월 21일에는 출장 중인 군인들에 대한 귀대명령을 내렸다. 5월 20일부터 5월 25일 사이에 통혁당 대변인 성명, 19개 정당-사회단체연합 성명, 평양시 군중대화 등을 통해 민중혁명을 선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광주 상황이 악화되면서 미국이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조기경보기 2대와 수빅만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코랄시호를 우리 해역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한 이후에는 국방부, 한민연합사와의 정보 협조를 강화해야 했다.
진상조사와 후유증 치료에 미진한 부분은 아쉬워
또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광주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 후유증을 치료하는 데 좀 더 노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뒤에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상황이 종료된 직후 최규하 대통령은 정부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진상을 조사케 하고 그 책임 소재와 대책까지 보고받았으나 ‘과거는 물에 흘려보내고 국민이 다시 화합해서 새출발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더 이상 광주사태가 재론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최 대통령 정부를 승계한 나 역시 그 시점에서는 중첩해 있는 국가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일이 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해 광주 문제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이 책에서 12·12와 5·17과 관련해서는 내가 했던 일과 알고 있는 사실들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5·18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 것이고, 내가 직접 겪은 사실들에 관한 내용은 매우 적다. 그 까닭은 다시 말하지만 5·18 사태에 관해 내가 한 일, 직접 겪은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5·18 사태의 발단에서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할 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5·18 특별법에 따른 검찰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관계자들의 많은 진술과 증언들이 나왔다.
나는 광주사태에 관한 한,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새삼 알게 된 사실이 적지 않다. 계엄사령부, 2군사령부, 전남북계엄분소인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와 31향토사단 그리고 현지에 출동해서 전교사와 31사단의 통제를 받았던 3개 공수여단, 20사단의 지휘관과 관련 장병들이 정확하고 소상한 내용들을 검찰과 법정에서 진술했고, 그 기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재판에서 나는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모든 부정적 결말을 덮고도 남을 귀중한 자산을 남겼다는 것이다.
방대한 양의 수사기록, 재판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정직하게 진실을 밝혀준 장병들의 용기에 감사한다. 김영삼 정권은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 아래 역사를 정치 보복의 법정에 세웠던 것인데 그들의 권력 의도와 달리 진실을 말해줄 소중한 기록들이 남겨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