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누군가의 생각과 주장을 반영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든 사람의 의지를 대신하는 대리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는 픽션이든 다큐멘터리이든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다루게 될 경우 ‘이것은 사실이므로 따라서 내용은 모두 진실’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려 한다.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재현한다고 강조할수록 왜곡의 수위도 높아진다. 보는 사람을 설득하고, 어느 한 쪽의 입장을 강조하면 할수록 대립적인 입장에 있는 인물 또는 집단의 행위를 부당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부각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광주 5·18은 아직도 일방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만 존재할 뿐 객관적인 성찰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영화는 특히 더 그렇다.
<오! 꿈의 나라>에서 시작한 광주영화
광주사태가 영화로 재현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 ‘장산곶 매’라는 영화집단이 <오! 꿈의 나라>를 만들면서부터. 16mm 필름으로 제작한 90분 짜리 이 영화는 광주사태가 진압되고 난 후 시위대 중의 한명인 전남대학교 학생 종수가 광주를 떠나 경기도 동두천으로 흘러든 뒤 겪는 ‘한국 속의 미국’을 체험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수배를 피해 고향 형뻘 되는 태호라는 인물을 찾아 동두천에 자리를 잡은 것인데, 그곳에서 종수는 미군들의 모습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사는 주민들의 모습을 체험한다. 제도권 밖에서 만든 영화인 탓에 제작 규모나 구성은 ‘스케일은 작고, 주장은 강한’ 경우로 남아 있다.
<오! 꿈의 나라>는 운동세력이 만든 운동권 영화로서, 제도권을 흔드는 선봉 역할을 했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들고 상영을 시도하는 행동 자체가 운동이었다. 5·18에 대한 적대적 비판과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전면에 세운 첫 번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부활의 노래>(1991)는 제도권 영화에서 처음 만든 ‘5·18’ 영화. 신생영화사인 새빛영화사가 창립 작품으로 만든 이 영화는 5·18을 정면으로 다루기 보다는 운동권의 회상과 의식 속에 어떤 형태로 영향을 미쳤는가 라는 점에 더 비중을 뒀다.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온건하다 싶을 정도로 5·18을 전후한 주변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5·18을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심의 과정에서 5·18의 시위, 전투 장면 등과 관련하여 25분 정도의 분량이 삭제되는 등 파란을 겪었다. 5·18을 소재로 삼은 첫 제도권 영화라는 기록을 만들기는 했지만 영화로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북한에서 만든 5·18 <님을 위한 교향시>
<부활의 노래>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이 북한에서도 5·18을 소재로 한 <님을 위한 교향시>(1991)라는 영화를 내놓았다. 1,2부로 구성된 이 영화는 5·18을 전후한 무렵, 학생 시위를 주도하던 대학생 청년과 그의 연인이 겪는 사연을 담고 있다. 광주 시민 봉기를 찬양하고, 이를 진압하는 계엄군을 미제의 앞잡이 쯤으로 매도하는 내용을 열거한다.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공수부대원들에게 강제로 환각제를 먹여 미치게 만든다는 등의 장면이 담겨 있다. 5·18 사태의 진행 경과를 보여주기 보다는, 저항운동을 벌이는 주인공의 행동이 얼마나 영웅적인가를 강조하며, ‘민중이 주인 되는 참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두가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북한 영화는 남한에 비해 조악한데다, 등장 인물의 대사를 통해, 표현하려는 주제를 장황하게 읊조리는 경향이 두드러져 북한 영화는 극적 짜임새가 많이 느슨해 보이기도 한다. 제작 당시에는 북한 영화를 공개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루트가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유튜브 등을 통해 비교적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상태다. <님을 위한 교향시>도 그런 영화 중의 하나지만 조회 수는 별로 많지 않다.
장선우 감독이 연출한 <꽃잎>(1996)은 5·18을 다룬 영화 중에서 규모를 크게 키운 경우. 금남로에서 벌어진 군인과 시민군의 충돌을 대규모로 재현했다. 대학생 남녀 일행이 5·18 이후 종적을 감춘 어떤 여자 아이를 찾아나서는 과정을 통해 5·18이 얼마나 참혹한 사건이었는가를 복기한다. 여자 아이가 받은 충격과 공포는 5·18의 참극으로 인한 것이고, 그 때 군인들은 무자비한 학살자들이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5·18의 경과와 실상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고, 시위 현장에 있던 무고한 시민이 일방적으로 진압군의 발포로 희생되었다는 내용만을 강조할 뿐이다. 여자 아이의 희생을 부각시키기 위한 대비로 어린 시절의 그 아이가 얼마나 천진난만하고 귀여웠는지를 시시각각 회상한다. 계엄군은 잔인무도한 학살자들일 뿐이고, 광주 시민들은 이유도 없이 광포한 권력의 총칼에 스러져 가는 꽃잎이라는 구도를 이룬다.
5·18 광주의 충격과 기억이 한 개인의 인생을 어떻게 무너트리는지에 대한 연대기적 서술은 <박하사탕>(1999)의 뻬대를 이룬다. 하지만 영화 속 시간의 흐름은 순차적이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옛날로 돌아가는 역회전 구성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일도, 가정도. 사랑도 식어버린 중년의 남자 영호는 양파 껍데기처럼 한겹씩 인생의 각질을 벗겨낼 때마다 이전의 시절로 회귀한다. 스치는 바람과 반짝이는 햇빛만으로도 충만하던 그의 청춘은 5·18 광주의 진압군으로 참가한 이후 크게 변한다.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눈다는 행위와 피를 경험한 후부터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다. 광주가 끝난 뒤에도 그의 내면에는 악몽처럼 그 피가 흐르고, 그의 삶을 뒤틀어버린다. 잔혹한 경험이 당시의 충격일 뿐만 아니라 긴 여운과 그림자로 이어지는 치명적 내상이었다는 서술은 광주사태를 다룬 영화 중에서는 가장 사색적이고 성찰적이라고 할 만하지만, 계엄군은 무자비한 폭력 집단이고, 광주시민은 오직 선량하고 무고한 시민이었다는 이분법적 설정은 다른 영화들과 바를 바 없다.
임상수 감독이 연출한 <오래된 정원>(2006)은 5·18 광주를 다루기는 하지만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기억에 남아 있는 관념으로 들여다 본다. 1980년대.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운동을 하다 수감되어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다시피 한 청년(!)이 17년의 수감생황을 마친 뒤 다시 마주친 세상에서 옛날의 열정을 돌아보는 과정을 그린다. 광주 5·18을 다루기는 하지만 다른 영화들처럼 당시의 광주를 열정적으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지진희, 염정아 주연.
<화려한 휴가>의 과장, 왜곡
<화려한 휴가>(2007)는 5·18 소재 영화 중에서 규모나 내용 면에서 대표작으로 꼽는 경우. 제목 ‘화려한 휴가’는 광주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에게 하달된 작전 명령의 이름. 광주에서 택시 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민우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 진우를 끔찍이 아끼며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원 신애에게 마음을 두근거리는 성실한 총각이다. 평온하던 그의 일상은 어느 날 들이닥친 공수부대원들의 구둣발과 진압봉에 무참하게 조각난다. 시민들은 무기를 탈취해 무장하고 진압군과 맞선다. 진압군은 초법적 폭력집단이고, 시민군은 선량한 사람들의 자위적 행동의 표현이라고 극단적으로 양극화 한다. 장면 중 특히 논란을 빚은 대목은 진압군이 시민군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하는 장면. 이 설정으로 광주에 출동한 공수부대는 대한민국의 군인이 아니라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는 무자비한 폭력 집단처럼 매도되었고, 시민군은 일방적인 희생자로 설정되었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했다’는 자막을 내보내기는 했다. 광주에서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서 교전이 벌어졌다는 큰 사실을 제외한 나머지 설정은 모두 픽션이다. 특히 집단 발포 장면은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조작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공수부대가 누군가로부터 사격명령을 받고 탄창을 M16 소총에 일제히 끼운 뒤 무릎 쏴 자세를 취한 다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일제히 사격한다. 그날 전남도청 앞에서는 그런 사격도, 그런 사격 명령을 내린 장교도 없었다. 광주사태에 대해서 가장 정밀하게 조사했던 1995년의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의 조사에서도 사격 명령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영화는 ‘사실에 근거하여 극화’하였다고 했지만 사실은 영화의 주장과 효과를 높이기 위해 허구의 내용을 조작한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그 자체로 ‘화려한 거짓말’과 선동을 유도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26년>(2012)은 광주 5·18 사태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책임자는 단죄되지 않은 채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는 전제를 설정하고 있다. 어떻게 하든 그 책임자를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 영화의 구성. 같은 제목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경우다.
오는 8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택시운전사>는 1980년 5·18 당시 외국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현장에 잠입해 시위 과정을 촬영한 독일기자 유르겐 힌츠피터, 그를 광주 현장으로 안내해준 택시기사 김사복 씨를 모델로 삼아 만든 영화. 영화에서는 각각 피터, 만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실화를 바탕에 깔았다. 유르겐 기자가 당시 광주의 실제 상황을 취재했던 만큼 이번 영화에서도 광주의 잠입까지가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그곳을 빠져나와 방송이 TV로 송출되기 까지 과정이 얼마나 드라마틱했는지를 보여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현장을 취재했다고 해서 그곳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해가 될 수 있다. 일방적 시선에서 ‘내가 본 것’만이 전부이고, 진실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객관적 사실과는 다른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조차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선택적 입장 만을 보여줄 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어느 영화든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지금까지 나온 5·18 소재 영화들은 선악의 극단적인 대립을 기본 구도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5·18을 역사적 사건으로 보면서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건으로 재현하며, 선전과 선동의 수단으로 동원하려는 의도가 완강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