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달랐다. 종전 협정 이후가 베트남 전쟁의 진짜 마지막 장(章)이었다. 미군이 빠져나간 남베트남에 1975년 북베트남이 밀고 내려왔다.
우리 대사관이 그해 3월 15일부터 3주에 걸쳐 대사관 직원, 상사 주재원, 교민을 항공기로 귀국시켰다. 그런데도 남은 교민이 1000명이 넘었다.
4월 9일 '십자성 작전'이 그래서 시작됐다. 전세가 긴박했다. 함대가 하루 240마일(384㎞)씩 파도를 헤치고 가는 동안, 목적지 다낭이 북베트남에 함락됐다. 나트랑으로 항로를 틀었다. 여기도 우리 함대가 닿기 전에 적군 손에 떨어졌다.
다시 길을 틀어 4월 21일 사이공에 입항했다. 그때 풍경을 참전용사 박인석 예비역 대령은 "더운 열기 속에 매캐한 화약 냄새가 폐부를 들쑤셨다"고 기록했다. 베트남 피란민이 부두에 밀려들어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베트남판 흥남 부두였다. 우리 함대는 사이공 함락 직전, 적이 출몰하는 바다를 헤치고 교민과 난민 1902명을 탈출시켰다.
베트남 패망 당시 미국 외교관들이 헬기 타고 탈출하는 장면을, 많은 사람이 영화와 다큐로 숱하게 봤다. 우리 군도 똑같이 숨막히는 작전을 펼쳤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 작전을 수행한 이들이 정식 '참전용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그렇다. 서류상으로 베트남전은 1973년에 끝났는데, 십자성 작전은 그보다 2년 뒤라 그냥 작전이지 '참전'이 아니라는 게 국방부 입장이다. 지난달 6·25 때 벌어진 '장사 상륙작전'을 취재하면서, 베트남전에 얽힌 이런 사연도 함께 들었다.
한반도가 부산만 빼고 전부 인민군 손에 떨어진 1950년 9월, 우리 군은 민간 선박 문산호에 학도병과 지원병 828명을 태워 경북 영덕군 장사 해안에 상륙시켰다. 인천 상륙작전에 맞춰 적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끊기 위해서였다. 130여명이 죽었다. 그중 11명이 문산호 선장과 선원이었다. 군번 없이 참전해 군인 못지않게 싸웠지만 전쟁이 끝나자 그대로 잊혔다.
6·25 참전용사인 최영섭(92) 예비역 해군 대령이 2012년 이 사람들 기록을 찾아 훈장 타게 해주는 걸 자기 인생의 '버킷 리스트'로 삼았다. 이후 임성채 해군 군사편찬과장과 함께 7년간 문서고를 뒤져 문산호 전사자 이름이 적힌 옛 서류를 찾아냈다.
지난달 27일 정부가 충남 계룡대 해군본부에서 문산호 선원들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국가의 부름에 응한 사람들의 이름을, 국가가 전사(戰死) 69년 만에 불러주는 자리였다.
최 대령과 임 과장은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국가가 기억해야 하는데 잊어버린 사람이 아직 많다는 얘기였다. 최 대령은 "문산호 전사자들이 훈장 을 탔으니, 이젠 생존자들을 찾아 국가유공자 만들어줄 차례"라고 했다. 임 과장은 "베트남전 때 십자성 작전을 수행한 이들도 여태 참전용사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했다.
최 대령이 "나라에서 불러서 나간 사람들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떤 놈이 목숨을 바치겠느냐"고 했다. 그런데도 국가가 집념을 안 보이니, 자신이라도 남은 생을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