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잘하는 한국 정부
2011.06.22 13:50
[김태훈, “용서 잘하는 한국 정부,” 조선일보, 2011. 5. 11, A 38.]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의 정권을 잡았던 군부가 국민에게 자행했던 국가 테러리즘을 뜻한다. 이 기간 아르헨티나 군부는 야당 인사와 언론인․지식인 등 3만명을 납치해 고문하고 살해했다. 비행기에 태워 태평양 위로 끌고 가 산 채로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하고 군정(軍政)이 무너지자 군부는 사면법을 만들어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한 뒤 정권을 이양했다. 이어 들어선 민정(民政)이 단죄를 시도하자 군부는 쿠데타 위협으로 맞섰다. 알폰신 대통령에 이어 메넴 대통령까지 '국민화합'이란 명분을 내세워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과거의 상처를 잊고 화합하자는 논리였다.
그러나 국민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더러운 전쟁'의 주역 중 한 명인 레이날도 비뇨네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지난달 15일 아르헨티나 법정에서 종신형에 처해졌다. 이미 죄를 사면받았던 83세 노인을 다시 법정에 세우자 너무한다는 동정론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보다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요구가 더 엄중했다. 군부의 다른 주역들도 법의 심판을 받았다.
개인에게 용서는 내면의 평화를 얻기 위해 행하는 윤리적 결단일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정부에 섣부른 용서와 화해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내팽개치는 도덕적 해이가 된다. 국민을 또 다른 폭력에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테러 집단에 용서 없는 단죄(斷罪)를 결행하는 것도 그래야 국민을 잠재적 테러 위협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0년간의 추적 끝에 "남의 땅에서 군사작전을 한다"는 비난까지 무릅쓰며 빈 라덴을 사살한 것은 결국 "미국 국민을 건드리면 죽을 각오를 하라"는 강력한 경고다.
이런 원칙을 지키려는 정부는 희생과 헌신을 각오해야 한다. 테러범을 찾아다니느라 국민의 세금을 쏟아붓고, 추적 과정에서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해 책임을 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해를 본 국민에게 "잊으라"며 적당히 위로금을 쥐여주는 게 차라리 속 편할 것이다.
눈을 안으로 돌려본다. 우리 정부는 국민이 외부세력의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때 가해자에게 어떤 책임을 물어왔는가. 금강산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박왕자씨의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가해자와 화해의 악수를 해야 하는가,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천안함 수병(水兵)들의 생명을 앗아간 세력을 향한 분노를 접고 6자회담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이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때까지 불용(不容)해야 하는가.
역사는 이미 그 답을 주었다.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기 폭파 등 수많은 테러를 저지른 세력은 화해 테이블에 앉은 우리를 몇 번이고 배신했다. 무슨 짓을 해도 쉽게 용서하고 잊어주는데 무엇이 아쉬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겠는가. 폭력을 쉽게 용서하는 정부는 국민을 위험에 빠뜨린다.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의 정권을 잡았던 군부가 국민에게 자행했던 국가 테러리즘을 뜻한다. 이 기간 아르헨티나 군부는 야당 인사와 언론인․지식인 등 3만명을 납치해 고문하고 살해했다. 비행기에 태워 태평양 위로 끌고 가 산 채로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하고 군정(軍政)이 무너지자 군부는 사면법을 만들어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한 뒤 정권을 이양했다. 이어 들어선 민정(民政)이 단죄를 시도하자 군부는 쿠데타 위협으로 맞섰다. 알폰신 대통령에 이어 메넴 대통령까지 '국민화합'이란 명분을 내세워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과거의 상처를 잊고 화합하자는 논리였다.
그러나 국민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더러운 전쟁'의 주역 중 한 명인 레이날도 비뇨네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지난달 15일 아르헨티나 법정에서 종신형에 처해졌다. 이미 죄를 사면받았던 83세 노인을 다시 법정에 세우자 너무한다는 동정론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보다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요구가 더 엄중했다. 군부의 다른 주역들도 법의 심판을 받았다.
개인에게 용서는 내면의 평화를 얻기 위해 행하는 윤리적 결단일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정부에 섣부른 용서와 화해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내팽개치는 도덕적 해이가 된다. 국민을 또 다른 폭력에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테러 집단에 용서 없는 단죄(斷罪)를 결행하는 것도 그래야 국민을 잠재적 테러 위협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0년간의 추적 끝에 "남의 땅에서 군사작전을 한다"는 비난까지 무릅쓰며 빈 라덴을 사살한 것은 결국 "미국 국민을 건드리면 죽을 각오를 하라"는 강력한 경고다.
이런 원칙을 지키려는 정부는 희생과 헌신을 각오해야 한다. 테러범을 찾아다니느라 국민의 세금을 쏟아붓고, 추적 과정에서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해 책임을 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해를 본 국민에게 "잊으라"며 적당히 위로금을 쥐여주는 게 차라리 속 편할 것이다.
눈을 안으로 돌려본다. 우리 정부는 국민이 외부세력의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때 가해자에게 어떤 책임을 물어왔는가. 금강산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박왕자씨의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가해자와 화해의 악수를 해야 하는가,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천안함 수병(水兵)들의 생명을 앗아간 세력을 향한 분노를 접고 6자회담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이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때까지 불용(不容)해야 하는가.
역사는 이미 그 답을 주었다.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기 폭파 등 수많은 테러를 저지른 세력은 화해 테이블에 앉은 우리를 몇 번이고 배신했다. 무슨 짓을 해도 쉽게 용서하고 잊어주는데 무엇이 아쉬워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겠는가. 폭력을 쉽게 용서하는 정부는 국민을 위험에 빠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