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선생이 본 '역사의 진실'
2011.10.16 10:21
[고영환, “황장엽 선생이 본 '역사의 진실,'” 조선일보, 2011. 10. 12, A39쪽; 전 북한외교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전략실장.]
2010년 10월 10일, 북한의 당(黨) 창건 기념일인 이날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서거일이다. 김씨 왕조의 3대 세습을 보며 오죽했으면 이날에 돌아가셨을까. 1997년 2월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망명하는 순간부터 돌아가신 그날까지 한 편의 역사를 보는 느낌이다. 당시 해외의 한 방송사가 필자에게 황장엽 비서의 망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소련공산당의 이론담당 비서가 미국에 망명한 것과 같다"고 답변했다. 모스크바종합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김일성의 이론담당 서기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노동당 과학담당 비서와 국제담당 비서로,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수십 년간 김 부자를 최측근에서 보좌한 사람이 황 선생이었다. 북한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능가한다고 자랑하는 주체사상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북한 최고위 간부가 최대 적국(敵國)인 한국으로 망명한 것은 북한 정권에 유례없는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황장엽 비서의 가족과 친척, 벗과 선후배 등 무려 2000여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보다 그를 더 큰 슬픔과 좌절 속에 몰아넣은 것은 그가 흉중에서 피로 뿜어내는 대북(對北)정책에 대한 조언과 절규에 대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철저한 무시와 그의 신변에 대한 억압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황 선생을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에서 쫓아냈고 국정원까지 황 선생을 외면했다. 이사장직 해임을 결정한 회의에 참석했던 필자는 당시 정부와 국정원, 그리고 이전 정권에서 황 선생에게 그토록 살갑게 굴었던 사람들이 그를 매몰차게 몰아내는 것을 보며 '권력의 시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에게는 국가의 이익과 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리와 출세였던 것이다.
이런 박대를 당하면서도 황장엽 선생은 굴하지 않았다. 그가 많은 희생을 각오하고 남한에 망명한 것은 북한의 멸망이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는 황 선생의 저서는 마치 절규와 같았다. 황 선생은 "북한 일반경제와 군수경제가 다 무너져 로켓포 생산도 중단했던 그 시절, 한국 정부가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남북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고, 핵개발도 저지시킬 수 있었다"며 늘 아쉬워했다.
현재 탈북자 수가 2만3000여 명을 넘는다. 그리고 그 숫자는 빠르게 증가하여 올해 말에는 3만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북한 사회를 경험하고 죽음을 불사하며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한다면 종북(從北)세력은 탈북자들이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황장엽 선생은 탈북자들은 통일을 미리 경험한 귀중한 보배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실력을 쌓아 통일의 역군(役軍)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 왕조가 '강성대국의 원년(元年)'으로 내세운 2012년엔 남한에서도 총선과 대선이 치러진다. 남과 북을 동시에 살아본 탈북자들은 내년 총선과 대선이 한반도의 운명을 가름할 결정적 순간임을 직감하고 있다. 김정일과 부화뇌동해 국가를 말아먹을 세력의 집권을 막고 자유민주주의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황장엽 선생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밝히려 했던 역적의 무리들의 정체를 우리 국민이 명확히 알아볼 수 있도록 탈북자들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2010년 10월 10일, 북한의 당(黨) 창건 기념일인 이날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서거일이다. 김씨 왕조의 3대 세습을 보며 오죽했으면 이날에 돌아가셨을까. 1997년 2월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망명하는 순간부터 돌아가신 그날까지 한 편의 역사를 보는 느낌이다. 당시 해외의 한 방송사가 필자에게 황장엽 비서의 망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소련공산당의 이론담당 비서가 미국에 망명한 것과 같다"고 답변했다. 모스크바종합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김일성의 이론담당 서기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노동당 과학담당 비서와 국제담당 비서로,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수십 년간 김 부자를 최측근에서 보좌한 사람이 황 선생이었다. 북한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능가한다고 자랑하는 주체사상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북한 최고위 간부가 최대 적국(敵國)인 한국으로 망명한 것은 북한 정권에 유례없는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황장엽 비서의 가족과 친척, 벗과 선후배 등 무려 2000여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보다 그를 더 큰 슬픔과 좌절 속에 몰아넣은 것은 그가 흉중에서 피로 뿜어내는 대북(對北)정책에 대한 조언과 절규에 대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철저한 무시와 그의 신변에 대한 억압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황 선생을 통일정책연구소 이사장에서 쫓아냈고 국정원까지 황 선생을 외면했다. 이사장직 해임을 결정한 회의에 참석했던 필자는 당시 정부와 국정원, 그리고 이전 정권에서 황 선생에게 그토록 살갑게 굴었던 사람들이 그를 매몰차게 몰아내는 것을 보며 '권력의 시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에게는 국가의 이익과 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리와 출세였던 것이다.
이런 박대를 당하면서도 황장엽 선생은 굴하지 않았다. 그가 많은 희생을 각오하고 남한에 망명한 것은 북한의 멸망이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는 황 선생의 저서는 마치 절규와 같았다. 황 선생은 "북한 일반경제와 군수경제가 다 무너져 로켓포 생산도 중단했던 그 시절, 한국 정부가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남북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고, 핵개발도 저지시킬 수 있었다"며 늘 아쉬워했다.
현재 탈북자 수가 2만3000여 명을 넘는다. 그리고 그 숫자는 빠르게 증가하여 올해 말에는 3만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북한 사회를 경험하고 죽음을 불사하며 한국으로 온 탈북자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한다면 종북(從北)세력은 탈북자들이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황장엽 선생은 탈북자들은 통일을 미리 경험한 귀중한 보배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실력을 쌓아 통일의 역군(役軍)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 왕조가 '강성대국의 원년(元年)'으로 내세운 2012년엔 남한에서도 총선과 대선이 치러진다. 남과 북을 동시에 살아본 탈북자들은 내년 총선과 대선이 한반도의 운명을 가름할 결정적 순간임을 직감하고 있다. 김정일과 부화뇌동해 국가를 말아먹을 세력의 집권을 막고 자유민주주의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황장엽 선생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밝히려 했던 역적의 무리들의 정체를 우리 국민이 명확히 알아볼 수 있도록 탈북자들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