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3·1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온 것이다. 3·1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리 민족이 독립을 외친 사건이다. 그러나 3·1운동은 단지 잃었던 독립을 되찾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이다.
그 국가는 한반도에는 일찍이 없었던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이다. 이런 정신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 1919년 4월 11일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다. 그 첫 번째 조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고 못 박고 있다.
해방정국과 건국투쟁
하지만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반도에 다른 국가를 건설하려는 세력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이다. 그들은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를 원했다. 이것이 바로 인민공화국이다. 이 세력이 1920년대부터 해방 직전까지 지속되어 왔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한반도에는 해방이 왔다.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우선 한반도에는 3·1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해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세력과 공산당 지하운동을 계승해서 인민공화국을 만들자는 두 세력이 격렬하게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은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할 싸움이다.
고하 송진우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공화국 세력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함께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추구했다.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인민공화국 세력은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에 속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계를 꿈꿨다.
이 두 세력은 해방 후 서로 자신들이 주장하는 국가를 세우려고 싸웠다. 결국 남한에는 송진우 선생의 주장을 받아들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여운형의 주장이 더 멋있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송진우의 주장이 옳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택한 북한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자유가 없는 나라가 되었지만 민주주의를 택한 남한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가 되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송진우의 길을 따랐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송진우는 해방 직후 국내에 남아 있던 가장 중요한 정치가였다. 그래서 해방 직전 총독부는 송진우에게 권력을 이양하려고 했다. 하지만 송진우는 일본으로부터 정권을 인수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총독부는 여운형을 찾아갔고, 여운형은 총독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해방 직후 정국의 주도권은 여운형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송진우는 당시 해외에서 귀국하는 임시정부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송진우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세력에 의해서 1945년 12월 말 암살되었고 그는 오늘의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제일 처음 목숨을 바친 애국자가 되었다.
송진우의 민주주의 사상 형성
그러면 송진우 선생의 정치사상의 기원은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 필자는 여기에서 간단히 송진우의 민주주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송진우의 민주주의 사상은 그의 일본 유학을 통해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메이지시대가 지나간 다음 1910년대 일본의 사상계에는 소위 다이쇼(대정) 데모크라시가 전파되었다. 이들은 일본이 제국주의를 떠나 민주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도쿄대학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를 중심으로 이런 사상이 널리 전파되었다. 송진우는 이런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송진우는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송진우는 3·1운동의 핵심인물로서, 학생들을 동원하고, 특히 천도교세력과 기독교세력을 하나로 만드는 데 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서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적인 국제질서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본다. 3·1운동은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출발한 운동이며, 그 결정체인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미국 중심의 국제연맹에 가입할 것을 천명했다. 송진우는 이런 임시정부를 귀하게 생각했다.
송진우는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이런 그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920년대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고립주의에 실망한 나머지 좌익으로 전향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1925년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문제연구회에 참여해 미국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게 되었다. 그는 당시 세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가 서로 싸우고 있지만 결국은 미국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런 송진우의 결론은 그의 신중한 국제정세 분석의 결과이다. 그는 자신의 옆에 영미통인 장덕수와 소련을 잘 아는 김준연을 두고, 국제정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이런 송진우의 국제정세 분석은 태평양전쟁을 통해 더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송진우는 소련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수행하고, 또한 미국의 요청으로 소련이 코민테른을 해체시키는 것을 보면서 전후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것은 미국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송진우는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은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국제질서에 편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송진우와 임정봉대론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송진우 선생이 어떻게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했는가 하는 것이다. 송진우의 생각과 대척점에 서 있던 여운형과 비교하면서 그가 대한민국 건국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송진우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생각이 있다고 본다.
첫째, 송진우는 새로운 나라의 건국 주체는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는 이 민족의 가장 중요한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민주공화국을 세우려고 했다. 물론 해방 직전에 좌우합작을 했지만 이것은 민주주의의 원칙 아래서 사회주의의 요소를 수용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가장 정통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여운형은 새로운 나라는 일제 말 지하 공산당 혁명세력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제 말 지하 공산당 세력이 국내에 뿌리를 두고 혁명운동을 했다는 점은 장점이지만 실질적으로 이들이 얼마나 어떤 규모로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이들이 국민 대부분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가도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직후 아직 외국에서 연합군이나 독립운동가들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이 건국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운형은 임시정부가 건국의 주역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첫째, 임시정부는 인민의 토대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여운형은 진정한 국가는 노동자와 농민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모든 계급을 부정하고 주권은 모든 국민에게 있다고 믿는다. 둘째, 임시정부 외에도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임시정부 외에도 만주와 연안에서 좌익계열의 독립운동이 있었다. 이런 단체들이 민주공화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해체시키려고 했다.
중경에서 임시정부 내의 좌익세력들은 해방이 되자 임정해체론을 들고 나왔다. 여기에 앞장 선 사람이 김원봉이다. 임시정부가 귀국하면 좌익이 세운 인민공화국에 가장 큰 위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임정해체론자들은 국내의 좌익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해방공간에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좌익세력이다. 여기에 맞서 싸운 사람이 바로 송진우이다. 사실 송진우만이 아니다. 대다수의 한국민족운동가들은 임정이 새로운 나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한의 조만식도, 한때 건준에 참여했던 안재홍도, 유림의 대표 김창숙도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가장 정통성 있는 독립운동 단체였고, 이것은 대부분이 원하는 민주공화국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송진우가 있었던 것이다.
송진우는 한편으로는 좌익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 임시정부를 환영하여 이들이 국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사실 임시정부와 국내의 정치를 연결한 사람이 송진우였다. 그는 대중을 설득해서 새로운 나라의 주체는 임시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군을 설득해서 임시정부를 귀국하도록 했다. 송진우의 임정봉대론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초가 흔들렸을 것이다. 임시정부 100주년을 지나가면서 우리는 송진우의 공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송진우와 국민대회론
둘째, 송진우 선생은 임시정부가 국민대회를 통하여 국내 대다수의 국민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진우 선생은 서구민주주의의 본질을 잘 알았다. 그것은 통치자는 피통치자의 동의로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핵심이다. 송진우는 해방 이후 평양의 조만식과의 전화에서 진정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지 총독부로부터 나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한다면 새로운 나라는 국민의 동의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방 직후 송진우가 가장 큰 신경을 쓴 것은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노동자와 농민이므로 이들이 주축이 되는 인민대회를 개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1946년 9월 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서울과 인천지역의 공장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 조선인민공화국은 1919년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국가였다. 이들은 소련식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사실 송진우를 중심으로 하는 우익 민족주의 세력들은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건전한 시민세력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해방공간에서 이들을 유지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건계급에도, 노동계급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건전한 민주주의국가를 만들기를 원했다.
처음에 이들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함께 행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건준 내의 좌익 강경파들은 이들이 들어오면 건준에서 자신들이 헤게모니를 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송진우는 이들을 다시 모아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열었다. 이 모임에는 전국의 중요 민족주의 인사들이 다 망라되어 있었다.
사실 송진우가 주도한 이 모임은 한국사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사실 조선인민공화국은 여운형과 박헌영이 만든 지엽적인 단체였다.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여운형과 함께 했던 안재홍도 이미 탈퇴했다. 원로 공산당 모임인 장안파도 박헌영의 독주에 밀려났다. 그러나 송진우가 주도한 이 모임은 3·1운동 이후 대한민국의 주류세력이 다 참여했다. 여기에는 동아일보와 전라도 세력, 이승만의 기호세력, 안창호의 서북세력, 여기에 경상도를 중심으로 하는 각지의 유지들이 협력했다. 원세훈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 계열도 같이 했다. 그리고 여기에 한때 건준에 참여했던 안재홍과 장안파 공산당도 함께 했다. 바로 이들이 대한민국의 주류인 것이다.
임시정부가 3·1운동으로 만들어졌지만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가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기 위해서는 전체 국민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송진우는 바로 국민대회가 이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국민대회론을 발전시킨 것이 1948년 5·10선거를 통한 국회의 구성이다. 송진우의 계승자인 한민당은 일찍이 이승만과 함께 보통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주장한 것이다. 아무리 임시정부가 정통성이 있다고 해도 이것은 해방공간에 사는 한국인들이 인정해 줘야 한다. 따라서 임시정부에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법통이 있지만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선출한 국회를 통해서 헌법을 제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송진우의 국민대회론은 김구의 단순한 임정법통론을 넘어서는 것이다.
송진우와 미국중심의 국제질서
셋째, 송진우 선생은 새로 세워지는 나라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민주주의사회와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진우 선생은 3·1운동과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을 잘 알고 있었다. 3·1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함께 시작되었고, 임시정부는 국제연맹에 가입해 민주세계의 일원으로 활동할 것을 약속했다. 이런 정신은 그 후에도 지속되었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국민당정부와 그리고 미국의 협조를 얻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다. 해방 직전 송진우의 입장은 분명했다. 새로운 나라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과 협력해서 서구식민주주의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비해서 좌익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련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되고자 했다. 그래서 이들은 해방 직후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문을 듣고 환호했으며, 각종 대회에서 “스틸린 만세,” “소련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이들은 소련이 지시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결국 그들을 반탁의 입장을 취하게 만든 것이다.
송진우는 공산주의를 막고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세력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했을 때 가장 안심했던 것이 바로 송진우를 중심으로 하는 건전한 민주주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미군정은 송진우의 협조를 받아 남한을 통치했다. 실제로 미군정은 송진우를 중심으로 한민당 간부들을 고문으로 임명했다.
송진우는 해방 당시 국내 정치가들 사이에서 가장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민족주의자로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이런 신탁통치 반대가 바로 미군정 반대로 이어지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되, 국제적으로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견해는 국제사회를 모르고, 단지 민족감정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았다. 결국 송진우는 1945년 12월 말 그런 세력에 의해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송진우의 입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1948년 대한민국이 탄생했을 때 이 대한민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합에 의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았다. 이런 국제연합에 의해 승인된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침략을 받았을 때 미국을 비롯한 서구민주주의 국가들은 군대를 보내 대한민국을 지켜 줬다. 송진우가 처음 생각했던 나라는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민주주의 국가들과 연대해서 국제사회에 우뚝 선 나라가 되는 것이다.
송진우와 오늘의 대한민국
김성호 연세대 교수는 한 국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정통성과 법률적인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데, 3·1운동과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지지해 준다면, 1948년 5·10선거는 법률적인 정당성을 확보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붙이고 싶다. 국가가 제대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국제적 승인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1948년 유엔이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한 나라가 제대로 구성되려면 역사적 정통성, 법률적 정당성 그리고 국제적 승인이 이이뤄져야 한다. 그렇다면 해방공간에서, 적어도 국내에서 이런 것을 생각하며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구상한 지도자는 누구일까? 고하 송진우 선생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임시정부에 뒀다. 그러나 이것이 합법적이기 위해서는 국민대회를 통해서 인정받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울러 그는 새로운 나라가 민주공화국으로서 존립하려면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와 협력해야 한다고 봤다. 송진우는 한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대한과 민국이라는 두 가지 단어로 구성되었다. 대한이라는 단어는 민족공동체를 말한다. 송진우 선생은 민족불멸론을 말할 정도로 강력한 민족주의자이다. 민국이라는 단어는 정치공동체를 말한다. 송진우 선생은 민족도 중요하지만 그 민족이 민주주의 체제를 택해야 번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임시정부라는 기초, 국민대회에 의한 국민의 동의,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봤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런 건국정신을 얼마나 지탱하고 있는가. 오늘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를 말하면서도 임시정부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1919년 임시정부는 말하면서도 이것의 법률적인 정당성인 1948년 5·10선거는 말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위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도 매우 혼란스럽다. 한미동맹이 흔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해방 이후 송진우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 건국세력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 연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이 나라를 바른 방향에 놓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런데 대한민국을 세운 세력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기념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대한민국을 세우지 못하도록 만든 세력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역사교과서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인 송진우 선생은 거의 언급되지 않으면서 거꾸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우려고 했던 세력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송진우는 전라도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직후 국내에 있었던 모든 정치가 가운데 가장 우뚝 선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 친구 김성수와 함께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오늘의 대한민국이 흔들리고 있다. 많은 전라도 사람들은 김대중을 사랑하고, 그를 추앙하고 있다. 하지만 전라도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김대중 훨씬 이전에 송진우가 있었고, 그는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초를 놓았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전라도는 김대중의 햇볕정책만이 아니라 송진우가 남겨 놓은 유산, 즉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를 계승해야 한다.
하지만 송진우는 전라도만의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는 해방 직후 다양한 민족주의 세력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동아일보의 사장이었고, 북한의 최고지도자 조만식의 막역한 동지였으며, 미군과도 협력할 줄 아는 국제적인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재정으로 독립을 도운 김성수만이 아니라 장덕수나 김준연 같은 국제정치를 잘 아는 동지들이 있었다. 그는 반공에는 분명한 입장이었지만 다양한 우파세력을 하나로 묶을 만큼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이런 지도자가 있는가. 누가 자유대한민국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송진우의 유지를 계승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시금 대한민국을 세계에 우뚝 선 나라로 만들 수 있는가.
(본 원고는 2019년 5월 8일 고하 송진우 탄생 129주년 기념강연을 약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