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고종이 1890년 6월 양어머니인 조대비가 서거했을 때 청나라 황제에게 보낸 서신이다. "당신의 신하 조선의 왕 이희는 어머니 조씨가 서거했음을 공손히 알립니다. 저는 폐하 앞에 큰 걱정과 슬픔에 잠겨 무릎을 꿇습니다. 종은 폐하께서 자비롭게 배려해주시기 청합니다." 이 정도면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시진핑의 말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 외에도 조선은 왕이 부임 시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매년 엄청난 공물을 바쳤다. 중국 사신이 황제의 친서를 가지고 오면 왕이 이마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네 번 절했고, 사신이 떠날 때는 백성들이 길에 나와 황제의 은총을 기뻐하며 춤을 춰야 했다. 청나라 황제는 "주변국 중 이희만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없다"고 칭찬했다.
지금 시각에서 보면 선조들의 행위가 창피하기 짝이 없지만 비판만 할 수는 없다. 중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나라이다. 주변 55개 민족을 병합했고 특히 티베트와 위구르는 무력으로 잔혹하게 짓밟은 전력이 있다. 우리가 이 정도 살아남은 것은 조상들이 비굴하게나마 목숨을 부지한 덕택이다.
그랬던 우리가 근세에 들어 중국보다 잘살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 조상들이 환생해서 지금 우리가 중국에서 발 마사지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중국과 관계를 끊고 서구 문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진작 이렇게 해서 세계 대국으로 굴기했는데, 우리는 한발 늦어 수모도 많이 당했지만 그나마 이 정도 살고 있다. 여기에는 외세를 막아주고 엄청나게 큰 자유 시장을 내준 미국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근자에 들어 중국이 급성장하면서 과거 영화를 재현하려는 중국몽을 키우고 있다. 그 속내는 칭화대 옌쉐퉁 교수가 밝혔듯이 주변국들이 다시 중국의 신하 국가로 복귀하는 것이다. 특히 가장 충성스럽던 우리에게 미국과 관계를 끊고 중국 편에 서라는 압박이 커지고 있어 우리로서는 갈수록 난감한 상황이 되고 있다.
강자 편에 서는 것이 안전하다면 미국이 답이다. 셰일 혁명으로 미국산 원유는 중국이 수입하는 중동산보다 배럴당 5~10달러 이상 싸졌다. 달러라는 기축통화의 힘도 막강하고, 세계 모든 혁신이 미국에서 일어날 만큼 과학기술도 최고 수준이다. 인구 구조도 중국은 생산가능 인구가 2016년부터 계속 감소하지만 미국은 향후 100년간 튼튼하게 늘어난다. 이번 우한 폐렴 사태에서 보듯이 중국은 사회 시스템도 취약하여 이변이 없는 한 현 세기 내 미국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논리적으로는 미국 편에 서는 것이 맞겠지만 현실적으로 경제 의존이 높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을 멀리할 수도 없다. 미국이 고립주의가 심화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것도 꺼림칙하다. 그렇다고 중국 편에 서는 것은 더 절망적이다. 미국이 떠나는 순간 경제 폭락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속국 신세가 되면서 겪어야 할 수모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도 저도 안 되니 묘안이라고 나온 것이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지만 이것 역시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의 뜻대로 움직인 사례는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대전환기에는 역사에서 답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역사의 교훈은 '힘이 약한 나라는 결국 당한다'는 것이다. 조선 역시 힘을 키울 생각은 안 하고 중국만 믿고 있다가 망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부국강병하는 길 외에는 없다. 경제는 중국 의존도를 완화하고, 외교에서는 한쪽에 편향되지 않게 원칙을 가지고 대응하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싶다. 외국 석학들은 미·중 외에 우방을 많이 가질 것을 조언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상황은 전혀 반대이다. 부국강병은커녕 국민은 분열되고, 경제는 이념화로 뿌리째 흔들리고 있으며, 북한만 바라보는 외교로 국제사회에서는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우방인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이다.
현 정권의 지나친 친중 편향도 우려스럽다. 여권 인사들이 중국몽을 칭송하
고, '주한미군 철수해도 된다' '중국의 핵우산으로 들어가자'는 등 주장하는 것은 가볍기 짝이 없다. '미국, 일본이라는 원심력이 없으면 중국의 구심력에 빨려 들어갈 수 있다'는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 전략 책임자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지금은 현란한 수사(修辭)보다 미래 생존을 위해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힘이 없으면 지혜라도 있어야 한다.
힘이 없으면 지혜라도 있어야 한다
2020.02.11 16:33
힘이 없으면 지혜라도 있어야 한다
[김대기, "힘이 없으면 지혜라도 있어야 한다," 조선일보, 2020. 2. 5, A30쪽; 단국대 초빙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 대한민국 수호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2/04/202002040386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