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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 “당신은 전쟁 관심없어도 전쟁은 당신에 관심있다,” 미래한국, 2013. 3. 6.]

속삭임은 달콤하고 구호는 화려하다. 세상을 속이는 말은 그렇다. 그러나 진실은 달콤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진실은 좋은 약이 그렇듯 쓰디쓰고 태양의 작렬처럼 따갑다. 그래서 맛보기 거북하고 직시하기 힘겨워 거절하고 외면하고 싶어지기 일쑤다.

하지만 진실의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은 한 푼의 에누리도 없이 이자를 청구한다. 회피했던 만큼의 연체이자까지 붙여서!
‘최종파괴’ 협박, 진실의 순간이 왔다
지금 이 나라가 직면한 상황, 북한 핵문제가 바로 그렇다. 북한은 미국까지 닿을 수 있는 장거리 로켓까지 갖춘 ‘핵무기 체계’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북한은 멀게는 미국의 특정 타깃을 지렛대로 한미동맹의 균열을 꾀하고 가깝게는 남한의 전 지역 어디에든 직접적으로 괴멸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전력을 갖게 됐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응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 핵전력이라는 비대칭전력 앞에선 재래식전력은 군사적으로 무용지물이다.
제네바 유엔군축회의에서 북한측은 남한에 대한 ‘최종파괴’를 언급하며 우리를 위협했다. 진실의 순간이다. ‘같은 동족끼리 설마’라는 어설픈 감상의 시간은 끝났다. 우리는 이제 본격적인 핵 협박 아래 놓이게 됐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포용이든 봉쇄든 지난 20년의 대북정책은 실패였다.” 지난 2월 19일 아산정책연구원 주최 ‘핵 포럼 2013’에서 클린턴 미 행정부의 국무부 차관보였던 갈루치가 한 토로다.

그는 1994년 미국 북한 간 제네바 합의의 주역이었다. 뒤늦은 자탄이다. 미국의 정책 실패에 대한 지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 그것은 미국의 탓만도 아니었고 봉쇄정책의 실패는 더욱 아니었다. 우리 쪽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클린턴 당시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한때 심각히 검토했다. 그러나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이를 극구 만류했다. 클린턴의 후임인 부시 정권은 대북압박정책으로 분명하게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한국의 김대중 정권은 완전히 엇박자였다. 소위 ‘햇볕정책’이다. 덕분에 대북압박은 완전 무력화됐다. 그리고 그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10년, 한국의 대북정책은 ‘햇볕’ 운운의 현란한 말장난이 지배했다.

세월을 허송했을 뿐만 아니라 갖은 명목으로 돈까지 퍼주었다. 북한이 핵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명백히 바로 그 기회 덕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 노무현 두 정권은 의도했든 아니든 북한의 핵개발의 공범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들의 책임과는 별도로 뼈아프게 직시해야 할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우리 국민 자신이다.

착시와 이완, 현실감을 상실했나 한국은 이스라엘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의 치열한 대치상태에 있는 나라다. 그러나 어느덧 그 엄연한 현실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풍요가 가져다준 착시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긴장의 일상화로 인한 이완이기도 했다.

성장의 과실을 나누는 데 더 몰두하고 민주주의를 더 많이 누리는 데 몰두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지키는 문제의 엄중함은 수시로 잊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다 날뛰고 갖은 생떼를 부려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심리로 애써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었다.
‘햇볕론’의 행세에는 분명 친북좌파세력의 집요한 선전의 역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알량함을 결코 직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국민들 사이에 상당 정도 존재했던 게 문제였다. 편하고 안전해 보이는 길에 현혹당할 마음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적잖이 그렇다고 하면 너무 예민한가? 그러나 북한이 로켓을 쏘고 핵실험을 해도 우리의 일상은 참으로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태연하다.

방송에선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이 여전히 걸 그룹들의 화려한 쇼가 계속된다. 출생의 비밀에 걸핏하면 불치병, 오늘도 드라마는 변함이 없다. 명동은 여전히 붐비고 강남은 여전히 화려하다.
그뿐인가?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선심예산은 몰래 늘리면서도 국방비는 삭감한다. 종북 의원이 인사를 시비하고 여기저기서 이런 파업 저런 시위가 꼬리를 문다.

“광화문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칠 수 있어야 민주주의”라고 하는 자가 서울시장을 하고 있고, 어느 구청에서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강연을 하려 한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자칭 보수라는 어떤 교수는 “공산주의도 선전할 수 있어야 선진사회”며 그게 ‘국민통합’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북한이 남한의 ‘최종파괴’를 협박해도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여전히 안녕하다. 우리 정치는 여전히 뻔뻔하고 종북들은 여전히 날뛰고 책상물림 먹물들은 변함없이 뜬구름이다. 무신경인가 강심장인가? 아니면 현실의 엄중함을 외면하다 못해 아예 현실감을 상실한 것인가?

한류가 각광을 받고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를 휩쓰는 것을 보며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도 K-POP으로 북한 핵을 제압할 수는 없다.
대학등록금을 절반으로 깎고 복지예산을 아무리 늘려도 그 덕분에 북한 핵이 폐기되지는 않는다. 북한이 남한 어딘가에 ‘핵실험’을 해야 그때서야 정신이 들 것인가? 하지만 그때는 이미 정신 차릴 틈도 없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
누군들 전쟁을 바랄 것인가? 그러나 “당신이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의 말이다. 전쟁은 어떤 점에서 마치 스토커다. 마냥 피해 다니기만 하면 오히려 계속 따라 붙는다. 그러다 뒤통수를 보이면 어느새 목덜미를 낚아채듯 닥쳐오는 게 전쟁이다.

2차 대전 직전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히틀러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그 협정은 히틀러의 전쟁 도발을 막는 데 아무 쓸모가 없었다. 스탈린도 히틀러와 독소불가침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결국 소련을 공격했고 소련은 2천만 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었다.

평화의 구호는 천국처럼 달콤하고 햇볕의 구호는 무지개처럼 현란하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지옥을 각오하지 않은 평화의 외침은 오히려 지옥을 자초할 수도 있다. “천국으로 가는 길만 말하고 그리로만 가자고 하는 사람은 자칫 모두를 지옥으로 이끌게 될 수도 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말이다.

고대 로마의 베제티우스(Vegetius)는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名著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이를 인용해 “로마인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했다”고 갈파했다.

전쟁을 잊은 나라에는 평화가 없다. 게다가 한국은 전쟁을 잊고 평화를 만끽해도 좋은 그런 나라는 더욱 아니다. 우리는 종전이 아니라 단지 휴전을 하고 있을 뿐이다. 적의 도발은 계속되고 있으며 이젠 핵무장까지 갖췄다. 북한 핵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면서도 자위적 핵무장의 길도 당연히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 이전에 중요한 게 있다. 정신자세다. 개발시대, 우리는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했다. 한 손에 망치 들고 또 한 손에 총을 들고, 그 시절 우리는 그렇게 고비를 넘고 넘어 대한민국의 오늘을 개척했다.

그 깃발은 결코 낡은 것이 아니다. “평화를 향한 길은 … 당신과 내가 우리의 적에게 ‘용납하지 않는 대가가 있다’고 말할 용기에 있다.” 레이건의 말이다. 우리는 지금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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