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남침은 기본적으로 소련군의 교리에 따른 기동전이다. 빠른 공격을 통해 최소 전투로 결정적 승리를 달성하는 것, 이게 기본이다. 같은 기동전이라도 소련과 독일의 기동전은 살짝 다르다. 소련군은 철저한 중앙 통제에 적 부대 격멸이 목표다. 반면 독일군은 현장 지휘관의 재량을 일부 허용한다. 북한군은 중앙 통제에는 충실했지만 적 격멸에는 부실했다. 6월 27일 북한 제105 전차 여단은 한강교 점령을 앞두고 있었다. 이어지는 절차는 양익(兩翼) 포위에 따른 국군 주력 박멸. 이 상황에서 김일성은 황당한 명령을 내린다. 전차 여단 목표를 변경해 한강교 대신 중앙청, 서대문 형무소 그리고 방송국을 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점령 지역을 통제하고 방송으로 공산주의를 선동하겠다는 이 발상으로 결국 북한군은 사흘 동안 서울에 발이 묶인다.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긴급 전문을 보냈다. "조선 군사 당국은 전진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가." 이 문장을 의역하면 이렇게 되겠다. "김일성이라는 작자는 정치와 전쟁 구별이 안 되는가." 가까이 있었으면 아마 때렸을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군의 전쟁 수행을 어렵게 만든 또 한 요인은 군 지휘관과 정치위원이라는 소련식 이원 조직 체계였다. 영화 '고지전'이나 '포화 속으로'를 보면 북한군 지휘관에게 툭하면 태클을 거는 장교가 등장한다. 흔히 정치장교라고 부르는 이 인간들의 임무는 지휘관 감시다. 가뜩이나 중앙 통제로 융통성 발휘가 어려운 상황인데 시어머니까지 들러붙어 잔소리를 해대니 전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리 없다. 영화에서는 군 지휘관이 태연하게 정치위원 의견을 깔아뭉갠다. 전쟁을 모르니까 그따위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것이라며 훈계까지 하신다. 현실에서 그렇게 간 큰 지휘관은 없었다. 기개는 잠시지만 감당은 오래다.
전쟁으로 한반도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다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20세기에 세워진 두 성공적인 나라가 있다.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이다. 두 나라의 공통점은 전쟁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19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 선언과 동시에 주변 아랍국들이 축하한다며 선물을 보내준다. 북쪽에서는 레바논과 시리아, 동쪽에서는 요르단과 이라크, 그리고 남쪽에서는 이집트가 한꺼번에 침공한 것이다. 다음 해 3월까지 이어진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국가의 틀이 잡힌다. 다른 점은 이거다. 이스라엘은 이후로도 1973년까지 피 말리는 전쟁을 세 번 더 치러야 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스라엘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3년짜리 하나 끝내고 이후로는 전쟁 걱정 없이 경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새우가 고래를 물고 늘어진 끝에 얻은 한미 동맹 덕분이다.
종전이 아니었기에 모병은 계속되었다. 60년대 대한민국 군대는 65만명으로 국군의 모태인 경비대 시절 6000명에 비하면 100배가 늘었다. 당시 우리보다 인구가 많았던 필리핀은 2만명 안팎이었다. 군인 많은 게 뭐 좋은 일이냐고? 공교육이 확대되기 전 군대는 20대 청년들의 교육 훈련 기관이었다. 1970년대 대기업 건설사에서 일하던 사람들에
게 그 기술 어디서 배웠냐 물으면 답은 하나였다. "군에서 배웠습니다." 6·25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나라 지키다 다치고 죽은 병사들에게도 좋은 일이었냐 물으실 수 있겠다. 그래서 호국 뒤에는 보훈이라는 말이 따라오는 것이다. 보훈을 제대로 하지 않는 나라는 절대 호국 같은 소리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이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