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형(56·명지대 교수) 전 KBS 이사가 자신에 대해 이런 표현을 하기 전부터, 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에 끝없이 쫓기는 것 같았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자 그는 KBS 이사에서 물러나라는 여러 형태의 압박을 받았다. 이를 거부하고 버티면서 그는 '그 전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삶'과 직면했다. 물론 이사직에서도 해임됐다. 그에게는 작전상 후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이사에서 해임한 문재인 대통령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다.
이광범 변호사가 지휘
요즘 세상에서 행정법원의 판결은 그의 손을 들어줬다. 문 대통령이 재판 당사자로서 패소한 사례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해임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한 뒤로 이번 1심 판결이 날 때까지 2년 반이나 걸렸지요?
"재판을 지연시켜 왔습니다. 그동안 재판장만 세 번 바뀌었습니다.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졌거나 판결을 빨리 했으면 제가 이사로 복직하고, 제 후임으로 들어왔던 현 김상근 이사장이 나가야 했을 겁니다."
―당신의 이사 임기는 2018년 8월까지여서, 이제 승소가 확정돼도 복직은 어렵겠지요?
"지금 승소해도 복직은 안 됩니다. 다만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다시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 봐야 얼마나 배상을 받겠습니까. KBS 이사의 수당을 계산하면 별로 큰 금액이 아닐 겁니다. 무엇보다 그 돈을 받으려고 이 고생을 했겠습니까."
―실익이 없다는 걸 알면서 왜 소송을 걸고 힘들게 해왔나요?
"정권과 KBS 언론노조의 압력에 결코 굴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싸운 겁니다. 제 자존심을 걸었습니다."
―이번에 승소한 행정소송 말고도 다른 송사 건(件)이 많이 걸려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명예훼손·모욕·특수상해 등으로 고소·고발이 이뤄졌습니다. 무혐의·항고·무죄·재판계류 등을 합치면 20여 건이 됩니다. '송사 노이로제'에 걸려 있습니다."
―얼마나 매듭됐습니까?
"현재까지 제가 10여 건 모두 이겼습니다. 한 사건에서 다시 다른 건으로 파생되기도 합니다. 오늘 학교에 나가보니 또 소장(訴狀)이 날아와 있었습니다. 저쪽에서 걸었는데 검찰 무혐의로 났고, 다시 항고했으나 각하된 사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건으로 이번에는 민사소송을 걸어온 겁니다."
―송사에 휘말리면 자기 시간과 정력을 날리는 손실 못지않게 변호사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은데?
"상대는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돕거나 노조 기금으로 하지만, 저는 순전히 개인으로 버텼습니다. 소송을 해보면 1억여 원 정도는 순식간에 깨집니다. 대부분 이 때문에 손들게 됩니다."
―통상 정권이 바뀌면 방송을 장악하려고 하지요. 전(前) 정권에서 임명한 방송사 사장은 어떤 식으로든 물러나게 만들었지요.
"과거에는 방송사 사장을 직접 겨냥했지만, 현 정권은 방송사 내부 사람들을 동원해 이사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2017년 당시 언론에 더불어민주당의 '방송 장악 문건'이 보도된 적 있습니다. 방송사 구성원 중심의 사장 퇴진 운동 전개, 야당 추천 이사진 퇴출, 감사원 국민 감사 청구, 방송통신위원회 활용한 경영 비리 조사 등의 내용이었지요. 현장에서 이 시나리오 그대로 진행됐습니다."
―왜 방송사 사장이 아닌 이사(理事)가 표적이 됐나요?
"이사진은 사장에 대한 임명·해임 추천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권이 교체됐을 때 KBS 이사 구성은 여권 추천 4명, 야권 추천 7명이었습니다. 임기는 2018년 8월까지였지요. 현 정권으로서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지요. 야권 이사 2명 내보내고 그 자리를 가져가면 여야 숫자가 6대5로 역전돼, 제도적으로 사장을 교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유독 당신을 찍어내려고 했지요?
"야권 이사 중 저와 K 교수, 대형 로펌 소속 L 변호사가 표적이었습니다. 압력이나 바깥 여론에 취약한 교수나 대형 로펌 변호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나요?
"KBS 언론노조원들이 고성능 마이크와 스피커로 제가 속한 대학교를 난장판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대형 스크린을 장착한 트럭까지 몰고 왔습니다. 온갖 허위 사실이 담긴 지라시를 다량 배포했고요. KBS 언론노조에 동조한 MBC PD수첩 팀은 강의실과 교수식당까지 쫓아와 카메라를 들이댔습니다."
―저렇게 나오면 대학교 입장에서도 난감했을 텐데.
"이들은 총장실로 전화를 걸어 '강 교수를 KBS 이사에서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내용의 건의서도 보내왔고요. 지금 교육부 장관인 유은혜 민주당 의원은 저와 관련된 자료를 다 가져갔습니다. 제 모든 것을 털어보겠다는 식이었지요. 어느 날 부총장께서 저를 불러 'KBS 이사 그만두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저를 보호하려는 뜻이 더 컸을 겁니다."
홍위병 행태
―본인 문제로 소속 대학에 너무 부담을 주고 있다는 마음도 들었겠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학교에 너무 누를 끼쳤다. 교수직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KBS 이사직에서 버티기 위해 학교를 떠나겠다고 한 건가요?
"KBS 이사 임기는 다음해 8월까지였습니다. 그 시점에 제 정년이 11년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쪽에서 내 직장을 약점 삼아 공격해오니 거기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부총장은 '사표 카드는 정년이 다 된 나 같은 사람이나 쓰는 것이다. 학교가 좀 더 버텨보겠다'고 했습니다. 학교가 고마웠습니다."
―KBS 이사회에 참석하려다 노조원들에게 봉변당한 적도 있었지요?
"제가 KBS 이사회에 참석할 때마다 노조원 수십 명이 일제히 팔을 휘두르며 비방 구호와 막말을 해왔습니다. 저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기가 생겨 똑같이 팔을 휘두르거나, 일부러 이들과 함께 인증 사진을 찍었습니다."
―노조에서는 '공영방송 정상화'를 내세웠고, 그때는 국민에게 상당히 먹혀들었지요?
"중국 문화혁명보다는 덜 거칠고 덜 폭력적이지만 본질은 비슷했습니다. 자신이 정의롭다고 착각하고 집단 광기에 빠졌던 홍위병과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대중을 선동하고 동원하는 행태까지 빼닮았습니다."
―감사원 감사에서 법인 카드 사용액 중 300여 만원을 유용한 것으로 나와 더욱 퇴진 압력에 몰렸지요?
"이미 감사원 정기 감사에서 문제없는 것으로 통과됐는데, 언론노조가 감사원에 특별 감사를 요청해 먼지 털기가 시작된 겁니다. 그동안 적용되지 않은 잣대를 들이대니 'KBS 이사 11명 전원이 문제 있다'는 해괴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사직에서 꼭 쫓아내야 할 제가 KBS 언론노조의 타깃이 됐습니다. 내 집 앞에서 가족들 사진을 몰래 찍은 뒤 '취재'라는 명목으로 동네방네 사진을 보여주며 '가족들이 강 이사의 법인 카드를 쓰지 않았느냐'고 탐문하고 다녔습니다."
―광화문에서는 소위 '비리 KBS 이사 해임 촉구' 릴레이 시위도 있었지요?
"첫 발언을 한 KBS 아나운서 Y씨는 회사에 알리지 않고 몰래 행사를 뛰어 억대가 넘는 부당 이득을 취한 게 감사원 감사에서 드러나 징계에 회부돼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코미디가 있습니까."
―그 뒤 감사원이 당신에 대해 해임 등의 중징계를 방통위에 권고했는데?
"방통위는 해임 의결을 위해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그해 처음 도입된 제도였습니다. 청문 주재인은 당시 이효성 방통위원장의 지인이었습니다. 청문회장이 '봉숭아 학당' 같았습니다."
―청문회가 어떠했기에?
"청문 주재인이 제게 '왜 빨리 안 나가고 시간을 끌고 버티느냐. 가장 만만한 게 교수라서 건드리는 거 모르느냐'고 대놓고 말하자, 뒷자리에 앉아있던 방통위 직원들이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는 '솔직하게 이야기합시다. 힘센 놈이 먹게 돼있어요 방송은. 그게 방송의 속성이에요. 우리 흔한 말로 예쁜 여자 보고 총각들이 집적거리는 거 그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라고 했어요. 이는 법원에 제출된 녹취록에 다 나옵니다."
―방통위는 그날 해임 건의안을 의결했고, 문 대통령이 하루 뒤 재가함으로써 해임된 거죠?
"기다렸다는 듯 초스피드로 진행됐습니다. 만약 우파 정권에서 이랬다면 좌파 인사 중에 순순히 물러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저는 이 일을 겪으면서 우파의 나약과 비겁함을 많이 봤습니다. 좌파처럼 함께 싸워줄 민노총 산하 언론노조와 유사 언론들, 민변, 민언련 같은 조직도 우파에는 없습니다."
우파의 나약과 비겁함
―KBS 이사직을 자진 사퇴했으면 어땠을까요?
"편하게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사표를 냈으면 대통령 상대로 해임 처분 취소 소송을 낼 수 없었습니다. 저쪽에서 야비하고 폭력적으로 안 나왔으면 저도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버티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견뎌낸 건 자칭 '정의'이고 '민주화 세력'이라는 이들의 위선과 폭력성을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우파에도 저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맞지만, 그가 겪은 고초를 떠올리면 선뜻 긍정해주기가 어려웠다.
이번 재판부는 2년간 업무추진비 중 327만원을 사적으로 유용한 사실이 없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업무추진비만을 이유로 임기가 원칙적으로 보장돼야 하는 이사를 해임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대통령 측 변호인단은 항소 여부를 이번 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