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5일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망사건으로 벌써 두 달째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여론이 떠들썩하다. 코로나로 인한 수개월의 경제·사회활동 마비가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BLM)”며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하고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반세기 최저의 실업률과 경기 활력 등으로 재임이 거의 확실시되었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내 코로나 확산에 더해 인종차별 시위와 폭동 국면으로 11월 재선이 불투명해졌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민주당과 반(反)트럼프 주류 언론은 더 불안감을 증폭시키며 민심을 동요시키고 있다.
문제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미국의 주류 언론만 베끼기 급급한 한국 언론들이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들은 미국의 백인 경찰이 무고한 흑인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차별해 살해하거나 과잉진압 및 체포·구금한다는 BLM의 내러티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미국의 구조적 인종차별은 매우 뿌리가 깊으며 심지어 미국의 건국도 사실상 노예제를 위해 세워진 것이라는 전형적인 미국 좌익의 거짓된 역사수정주의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구조적 인종차별’은 허구
하지만 그 어느 통계도 미국 경찰의 ‘구조적 인종차별’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이 엄연한 팩트다. BLM은 거짓말 위에 쌓은 모래성이라는 것이다. 백인과 흑인을 포함한 미국인 80% 가까이는 1964년 공민권법(Civil Rights Act)이 통과되고 50년 동안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실질적으로 사라졌다고 응답한 바 있다.
예일대 학부와 스탠퍼드 로스쿨을 졸업한 헤더 맥도널드(Heather Mac Donald) 변호사는 처음 BLM 운동을 전국적 운동으로 번지게 했던 ‘퍼거슨 소요사태’를 분석한 책 <War On Cops: How the New Attack on Law and Order Makes Everyone Less Safe(경찰에 대한 전쟁: 법과 질서에 대한 새로운 전쟁은 어떻게 모두를 덜 안전하게 만드나)>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구조적 인종차별’의 허구성과 그 위험성을 조명했다.
맥도널드 변호사는 하버드대에서 흑인으로서는 최연소로 종신교수직을 받은 롤랜드 프라이어(Roland G. Fryer Jr.) 경제학 교수의 연구를 인용해 경찰의 총기 발포에 인종적 편향성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전무하다고 밝혔다. 휴스턴의 경우 흑인 용의자가 경찰의 총에 맞을 확률이 백인 용의자가 경찰의 총을 맞을 확률보다 오히려 24% 낮다는 연구 결과도 제시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경찰 총기 발포 데이터베이스 및 연방 범죄 통계’에 따르면 살해당한 백인과 히스패닉의 12%가 경찰에게 죽은 반면 흑인은 단 4%만이 경찰의 진압 과정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또한 흑인들이 인구 비율에 비해 경찰에게 죽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도 인종적 편향성을 증명하지 않는다면서 법무부 연구 발표를 인용해 흑인들은 미국 최대 75개 카운티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있지만 강도사건 혐의의 62%를, 살인의 57%를, 폭행의 45%를 차지하기 때문에 경찰과 무력 대치가 더 많을 수밖에 없음을 밝혔다.
더 나아가 맥도널드 변호사는 사실 비무장 흑인 남성이 경관에게 살해당할 확률보다 경관이 흑인 범죄자에게 살해당할 확률이 18.5배나 높다는 것과, 흑인 살해의 주범은 백인이나 경찰이 아닌 또 다른 흑인이라는 사실(black-on-black crime)을 조명했다.
맥도널드 변호사는 이런 허구에 기초한 BLM 운동 때문에 오히려 흑인들이 치명적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퍼거슨 효과’다. 퍼거슨에서 촉발된 대규모 BLM 운동 때문에, 흑인 범죄가 빈번한 구역에 대한 경찰들의 정상적인 순찰활동이 위축되고, 공권력에 대한 불신감 조성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도 범죄 현장을 신고하는 일에 소극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범죄자들은 더 대범해져 강력범죄는 더 증가하며 더 흉악해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흑인사회에 안겨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흑인 인구가 다수인 도시들은 퍼거슨 사태 이후로 살인 범죄가 급증했다는 것을 여러 통계를 통해 밝혀내고 있다. 맥도널드는 2015년 미국 56개 대도시에서 살인 범죄가 17% 늘었는데 이는 ‘퍼거슨효과’라고 볼 수밖에 없는 유례없는 증가라고 이야기한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재점화되어 2014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확산된 이번 BLM 운동은 더 나아가 경찰의 예산을 대폭 삭감하거나 아예 폐지하는 극단적인 주장으로 번지고 있다. 이런 공권력 감소와 불신으로 인해 초래될 향후 ‘퍼거슨 효과’도 불 보듯 뻔하다. 이는 시애틀의 Capitol Hill Autonomous Zone(CHAZ)와 같은 ‘BLM 자치구역’ 내 심각한 강력범죄 소식들을 통해 이미 확인되고 있다.
맥도널드 변호사는 이번 BLM 운동에 대해서도 사태 초기부터 월스트리트저널과 유에스에이투데이 등에 ‘경찰의 조직적 인종차별이라는 거짓말’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왜곡된 주장들을 바로잡으려 노력해왔다. 물론 좌경화된 리버럴 반트럼프 주류 언론의 논조를 바로잡기에는 한참 부족했지만 그래도 6월 10일 미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관련된 근거들을 제시하고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들이 한국 여론에 거의 소개되지 않는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잘 알려진 영어권 주류 언론이라고 해서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베끼기에만 급급한 한국 언론들에 의해 미국의 ‘구조적 인종차별’ 문제는 한국 여론과 인식에서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특히 언론에 의해 부각되고 재생산되는 미국의 ‘인종차별’ 보도들이 계속 확산되면서 서울에서도 BLM 시위가 일어나거나 수많은 연예인들이 스스로의 도덕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앞다퉈 BLM 지지 표명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6월 한 달간 이 BLM 내러티브의 여론은 21대 국회 개회 시점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여·야 할 것 없이 모든 당이 ‘차별금지’ 프레임에 들어가게 되었다.
먼저 야당인 미래통합당 초선의원 9명이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의 장례식이 열린 6월 10일 국회 로턴다홀에서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고 무릎을 꿇었다. 바로 전날인 9일(현지시각)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8분 48초 동안 의회에서 무릎을 꿇고 묵념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물론 인종차별만이 아닌 장애인차별, 지역차별, 성차별, 학력차별 등에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어 나름 국내 상황에 응용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이 시위를 주도한 한무경 의원은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인간 존엄에 대한 가치를 미래통합당은 중시한다’는 퍼포먼스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BLM ‘바람’ 타고 발의되는 21대 국회 차별금지법
하지만 이들이 “Black Lives Matter”가 아닌 “All Lives Matter”를 연상케 하는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는 것을 미국 민주당이나 BLM 운동가들이 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All Lives Matter(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구호는 미국 내 유색인들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있다는 BLM의 주장을 부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2일 BLM 운동가들에게 “All Lives Matter”라는 발언을 했던 24살의 여성이 흑인시위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녀는 3살 아이의 엄마였다.
그렇다고 “All Lives Matter”를 주장하는 미국 공화당이나 보수진영에 인정받을 퍼포먼스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도 한국 보수야당의 이 모습을 봤다면 기가 막혔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쪽 무릎을 꿇는 행위 자체가 애초부터 미국 NFL 선수 콜린 캐퍼닉(Colin Kaepernick)이 경찰의 조직적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반(反)경찰 퍼포먼스였고, 더 나아가 지난 몇 년간 미국의 건국이념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반(反)미·반(反)체제 행위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나름의 신선하고 대담한 퍼포먼스는 국내적으로도 기대했던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보수진영에는 유행을 타더라도 왜 하필 미국 좌파들을 따라하느냐는 비난을 받았고, 진보진영에는 불과 며칠 뒤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바로 14일 정의당이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 기자회견을 열면서 “통합당의 퍼포먼스가 ‘무릎꿇기 쇼’로 그치지 않으려면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에 동의하라”는 프레임을 만든 것이다. 발언에 참여한 이자스민 전 새누리당 의원은 “조지 플로이드는 국내에도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인종차별과 혐오는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며 국제적 BLM 운동의 동력을 국내 차별금지법의 제정 명분과 효과적으로 엮어냈다.
그러는 사이 국가인권위원회는 국민인식조사를 실시해 6월 23일 “국민 88.5%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 여당보다 화두가 되는 이슈를 먼저 선점하는 것에 혈안이 되었던 통합당은 결국 5일 뒤 “민주당도 외면한 차별금지법” 자체 발의를 준비한다고 발표했다가 보수진영의 거센 후폭풍을 맞기도 했다.
다음날인 29일 정의당이 결국 10명의 정족수를 채워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 한 주 뒤인 7월 7일에는 이낙연 민주당 의원도 차별금지법에 “원칙적으론 동의”한다는 발언을 내뱉었고, 며칠 뒤 이상민 민주당 의원은 최소 100명의 공동발의자를 둔 차별금지법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결국 미국에서 불어온 BLM 운동의 바람을 타고 여야 3당이 모두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서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잊지 않아야 할 분명한 사실은 BLM 운동이나 차별금지법이나 모두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인 교회와 가정을 파괴하는 네오막시즘적 뿌리가 깊다는 것이다. BLM은 2013년 ‘해시태그’ 소셜미디어 운동으로 시작되어 2014년 퍼거슨 사태부터 전국적 운동으로 번진 순수한 인종차별반대 사회운동으로만 비쳐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BLM은 미국, 영국, 캐나다에 약 40여개 챕터를 둔 거대 글로벌 조직이면서 동시에 서구문명의 극단적 체제변혁을 주장하는 네오막시즘 운동이다.
BLM운동본부는 자신들의 그러한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BLM의 창시자 중 한명인 패트리스 쿨러스(Patrisse Cullors)는 60년대와 70년대 악명 높았던 극좌 테러단체 ‘웨더 언더그라운드(Weather Underground)’의 선동전략가였던 에릭 만(Eric Mann)을 자신의 사상적 멘토라고 인정한 바 있다.
또한 인터뷰나 글을 통해 자신들이 “훈련된 마르크시스트(trained marxists)”라고 자랑하거나, 핵가족 전통과 경찰 및 교도소, 자본주의 등을 폐지하고 ‘서구문명’을 붕괴시키는 것을 단체의 목표로 하고 있다고 공언한 바도 있다. 인간사회의 가장 기초단위인 핵가족 체제(남녀와 자녀)를 해체하고 자본주의 체제, 즉 사유를 폐지한다는 주장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이다.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이 단체가 비영리기구로 공식 등록되지 않은 채 어마어마한 후원금을 거둬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방탄소년단도 100만 달러를 BLM에 기부했고 전 세계 BTS 팬들(‘Army’)도 100만 달러를 매칭 모금해 BLM을 포함한 인종차별 반대운동에 기부했다고 알려졌는데 이 후원금의 행방이 사실상 묘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BLM의 최단기적 목표가 미국 민주당의 목표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바로 백악관 주인의 교체다. 미국 민주당은 사실 2016년부터 BLM 운동을 철저히 이용해 대선에서 승리하려 했던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구시퍼2.0’이라는 해킹 블로그에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현 하원의장의 컴퓨터에서 입수한 민주당 내부 문건이 공개되었는데 이 문건에는 BLM 운동가들을 대선에 유리하게 이용하되 적절히 거리를 두고 어떤 정책적 약속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BLM 운동가들에게 “all lives matter”라는 말을 하거나 ‘black-on-black crime’(흑인에 대한 흑인의 범죄) 같은 사실을 언급해 괜히 자극하지 말라는 매우 구체적인 BLM 응대법도 적혀 있었다.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의 전략이 항상 그래왔듯이, 미국 민주당은 BLM을 이용한다고 착각하지만 결국 민주당이 BLM 이면의 네오막시즘 이데올로기에 휘둘린다는 것이다. 한국은 아예 미국의 리버럴 주류 언론에만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 탓에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가 BLM과 미국 민주당의 내러티브에 넘어가고 있다.
정의당과 민주당 혹은 통합당도 마찬가지로, BLM과 자학적 수정주의 역사관 등의 국제적 유행을 힘입어 차별금지법과 같은 정책의 정치적 동력을 얻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 상황을 독식하는 것은 그 이데올로기적 배후에 숨은 극단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일지 모른다. 보수주의자들은 언제나 이러한 경계심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시대를 분별해 좌익의 역사를 멈춰 세워야 할 것이다.
조평세
미래한국 편집위원·트루스포럼 연구위원
킹스칼리지런던 종교학과 졸업
킬스칼리지런던 분쟁안보개발학 석사
고려대 북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