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식, "法治 파괴하는 최고의 기술자는 법률가," 조선일보, 2020. 10. 5, A31쪽.]
판사 출신의 한 로펌 대표가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판사가 법복을 벗고 곧장 정치로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법이 정치에 오염되는 신작로를 닦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본성(本性)을 감안한 말이었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을 가진 판사가 정치인으로서 몸담으려고 하는 특정 정당에 유리하거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리려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퇴임 직전 그런 판결을 함으로써 그 정당과 지지층에게 러브콜을 보내려는 유혹을 떨쳐낼 수 있을까. 그 판사가 법복을 벗기 직전 내린 판결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여당엔 법복을 벗자마자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된 세 사람이 있다. 이탄희, 이수진, 최기상 의원이다. 셋 다 양승태 대법원을 적폐로 몬 인물이다. 이들이 국회로 가서 한 일이 있다. 약속이나 한 듯 각각 ‘법원조직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탄희 의원 발의 법안은 대법관을 현재의 14명에서 48명으로 늘리자는 것이다. 이수진 의원 법안은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고 법관과 비(非)법관 위원을 동수로 하는 사법행정위원회를 신설하자는 내용이다. 최기상 의원 법안은 법관인사위원회 위원을 11명에서 21명으로 늘리고, 그중 10명을 법관이 아닌 일반인으로 채우자는 것이다.
이들이 발의한 법안 내용은 섬뜩할 정도로 독재 정권이 취해온 방식을 똑같이 따르고 있다. 대법관 정원을 늘리자는 것, 법관 인사를 외부에서 관여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독재자 우고 차베스는 2004년 대법관 정원을 20명에서 32명으로 늘리면서 그 자리를 정권의 충견(忠犬)들로 채웠다. 이후 2013년 차베스가 사망하기까지 베네수엘라 대법원이 내린 판결 4만5000여 건 중 정권에 반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폴란드의 막후 독재자 야로스와프 카친스키가 이끄는 법과정의당(PiS)은 2015년 집권하자마자 ‘사법 개혁’ 기치를 들고 판사 정년을 낮추고, 판사 인사를 사실상 의회가 좌우하게 만들었다. 사법부 독립은 무너졌고 판사들은 친(親)정권 인물들로 물갈이됐다.
여당의 판사 출신 의원 3인방이 법원을 ‘개혁’하겠다고 낸 법안에도 그 나름의 취지는 있다. ‘대법관 한 사람이 처리해야 할 사건이 너무 많고, 대법관 구성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사법 행정과 법관 인사에 외부 통제와 관여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법원 개혁 논리가 현실에선 삼권분립이라는 민주 국가의 핵심 시스템을 붕괴시켰고, 사법부를 정권의 시녀로 전락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김명수 대법원 체제에서 이미 법은 흔들릴 대로 흔들리고 있다. 이재명 경기도 지사, 은수미 성남 시장,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동생 등 여권 인사에 대해서는 온갖 억지 논리로 무죄를 내리거나 감형(減刑)했고, 문 대통령을 비판한 대자보를 대학 캠퍼스에 붙인 청년에 대해선 대학이 처벌을 원치 않는데도 유죄판결을 내렸다. 하버드대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 “독재자는 법률을 차별적으로 적용해 정적(政敵)을 차단하고 동지는 보호하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는다”고 했다. 독재는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법원이 정권의 적을 차단하고 동지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있는가.
독재 정권하에선 합법과 불법이 언제든 전도(顚倒)된다. 합법의 이름으로 폭력이 일상화된다. 그렇게 법치를 파괴한 최고 기술자들은 항상 법관과 법률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