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 송재윤, "독재자와 협상, 정의가 최고 카드다"
2021.01.13 11:36
2021.01.13 11:36
1980년대 말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을 외치던 주사파의 입문서 ‘주체사상에 대하여’(김정일 저)를 읽고 확인했다. “현명한 수령의 영도를 받아야만 인민 대중이 자기 운명을 성과적으로 개척할 수 있다”는 김정일의 수령론은 삐라 속 선전 문구 그대로임을. 그 당시 대학가에 널리 퍼진 ‘봄우뢰’ ‘피바다’ 등 북한 소설을 읽고 또 깨달았다. 전단이 예시했듯 김씨 왕조는 전체주의 인격 숭배의 디스토피아임을.
과거 남한의 권위주의 정권은 북한 삐라에 과민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삐라를 교보재로 사용해 반공 교육을 강화했다. 반면 남녘에서 날아오는 풍선에 북한의 전체주의 정권은 경악하며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왜 그럴까? 현장의 물증에 범죄의 맥락이 각인되듯, 삐라엔 외부 세계의 실상이 응축되기 때문이다.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의 삐라는 이념의 백신이었다. 오늘날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의 삐라는 자유의 바이러스다.
최근 ‘남측 정부’가 휴전선 풍선 날리기를 불법화했다. 그 의도를 짚어보면, 북한 ‘최고 영도자’의 비위를 맞춰 남북 관계를 개선한다는 순진한 계산속이 읽힌다. ‘햇볕 정책’ ‘전략적 인내’ 등 외교 수사를 동원하지만, 결국 독재 정권을 강화해주는 미봉책일 뿐이다. ‘사악한 독재자’(malevolent dictator)와 협상할 때 국제사회가 흔히 써온 ‘정의와 평화를 맞바꾸는’(trade justice for peace) 전술이다.
국제 정치사에서 이 전술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30만명을 학살한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Idi Amin·1925~2003)은 1979년 사우디로 망명한 후 2003년까지 호텔의 두 층을 독점하고 고액 연금을 받으며 호화롭게 살았다. 아민의 선례로 세계의 다른 독재자들까지 유인하려 했던 국제사회의 트릭이었지만, 그의 뒤를 이은 밀턴 오보테(Milton Obote·1925~2005)는 더 큰 학살을 저질렀다. 정의를 버리고 평화도 잃는 전술적 패착이었다.
반면 2003년 나이지리아 정부는 반군과 대치 중인 라이베리아의 학살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1948~)를 구슬려 망명을 유도한 후 잡아서 특별법정에 세웠다. 그 결과 내전을 막아 수십만 생명을 구했고, 독재자의 반인류 범죄를 단죄할 수 있었다. 이후 라이베리아의 기대 수명과 교육 수준 등 인간 발달 지수(HDI)는 지속적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독재자를 궁지로 모는 영리한 협상으로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되찾은 윈윈 전략이었다.
과거 ‘주사파’ 선봉장 노릇을 하던 오늘날 ‘남측 정부’의 주요 위정자들은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라. 고작 전체주의 정권의 협박에 밀려 ‘표현의 자유’를 내팽개치나. “최고 영도자를 모독하는데 장사정포를 안 쏘겠냐?”는 내재적 접근법은 흘러간 자주파의 레퍼토리다. 매번 정의를 팔아 평화를 사려 했지만, 북한은 이미 핵 무장에 성공했다. 결국 핵 가진 전체주의 정권의 비대칭 군사 협박에 밀려 인류의 근본 가치를 내준 꼴이다.
현 상황에서 아민에게 호화 생활을 보장했던 그 어리석은 전술이 북한의 ‘최고 존엄’에게 먹힐 리 없다. 차라리 독재자에겐 테러·살인·강간 등 11가지 중죄로 50년형을 받은 테일러의 운명을 정확하게 알려줘야 한다. “악마와 대화”할 때는 보편 가치를 최후의 보루로 삼아야만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남측 정부’는 현재 궁지에 몰려 있다. 세계 여러 나라가 한목소리로 한국의 과잉 진압을 규탄하고 있다. 특히 미국 의회에선 곧 ‘대북 전단 금지법’ 관련 청문회가 열릴 예정이다. 국제사회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빅터 차 교수의 지적대로 ‘남측 정부’는 북한 인권 운동을 탄압하는 어리석은 ‘자멸 정책’을 쓰고 있다.
막아도 소용없다. 개방의 마파람을 타고 삐라는 오늘도 북으로 간다. 삐라에 담긴 자유의 바이러스는 무섭게 번져간다. 압록강 국경 너머 장마당 DVD에 실려, 꽃제비 누더기에 묻어 인민의 실핏줄에 퍼지고 있다. 정의를 세워야 평화가 온다. 정의를 포기하면 평화도 잃고 만다. 감옥 속의 테일러가 증언한다. 독재자를 상대할 땐, 보편 가치가 최고의 협상 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