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수소, ESG] 수소경제와 ESG 경영의 함정
2021.11.18 15:27
수소경제와 ESG 경영의 함정
[조형래, "수소경제와 ESG 경영의 함정," 조선일보, 2021. 11. 10, A34쪽.]
우리 기업의 가장 큰 숙제가 수소경제와 ESG(환경·사회적 책임·지배구조 개선) 경영이다. 글로벌 투자 회사들이 “탄소 중립과 ESG를 실천하지 않으면 주식을 몽땅 내다 팔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데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우리나라를 수소경제 선도 국가로’ ‘올해를 ESG 확산의 원년으로’라고 외치고 정부가 ESG 평가 지표까지 만들겠다고 하니 기업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 탓에 요즘 대기업에서 나오는 보도 자료의 절반이 수소경제 아니면 ESG와 관련된 것이다. 심지어 생존을 걱정해야 할 스타트업도 ESG를 내세운다. 지금 분위기 같으면 조만간 수소보일러·수소레인지가 출시되고, 모든 기업 지배구조가 오너 경영인 없는 이사회 중심으로 바뀔 것 같다.
수소는 궁극(窮極)의 친환경 에너지라고 한다. 세상에 널려 있어 고갈 우려가 없고 연료로 사용하면 물만 배출할 뿐 유해 물질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수소는 오염 없는 유토피아를 앞당겨 줄 신의 선물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현실성이 너무 떨어진다.
수소를 대량생산하려면 천연가스에서 수소를 추출하거나 물을 전기분해해야 한다. 하지만 천연가스를 개질(改質)해 수소를 생산하는 방식은 수소를 1톤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10톤이 배출된다. 친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전기분해 방식은 탄소 배출이 없지만 전기를 얻으려 비싼 백금을 촉매제로 써가며 물을 전기분해해 수소전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무려 40~50%의 에너지 손실이 발생한다. 그래서 대기업들은 사우디아라비아나 호주의 사막에서 가동하는 태양광에서 나오는 값싼 전기로 물을 전기분해해 한국으로 가져오는 것을 구상하고 있지만 수송을 위해 수소를 액화하려면 영하 253도까지 냉각하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고, 수소 폭발에 안전한 수송선도 따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 비용까지 감안하면 원전의 안전성을 강화하는 게 훨씬 현실적이다. 수소경제 주창자들도 이 대목에서 스텝이 꼬인다.
그런 탓에 유럽 기업들은 슬금슬금 발을 빼는 분위기다. 폴크스바겐과 벤츠·BMW·아우디·혼다는 기술적 난관과 불확실한 시장성을 이유로 수소차 개발을 중단했다. 사실상 현대차와 일본 도요타만 남았다. 그나마 도요타는 적어도 10년은 화석연료 내연기관과 배터리를 함께 쓰는 하이브리드차로 끌고 갈 생각이다. 이런 현실을 보면 2030년까지 43조원 이상 투자하겠다는 한국의 수소경제가 2000년대 초반 ‘영상통화 시장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 속에 무려 1900억달러(약 224조원)를 주파수 확보에 투자했다가 몰락했던 유럽 통신업계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좋은 말은 다 모아놓은 ESG도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블랙록 같은 행동주의 펀드들이 석유 메이저를 압박해 신규 유전 개발을 중단하게 한 결과, 세계 에너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내년엔 국제 유가가 120달러까지 간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산화탄소 발생의 주범으로 몰렸던 정유 회사들은 투자는 적게 하고도 돈은 더 벌게 생겼다. 게다가 유럽은 바람이 덜 불어 풍력발전이 저조한 탓에 전기료 폭탄을 맞은 데 이어 추운 겨울이 오자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러시아의 눈치만 보는 신세가 됐다. ESG에 가장 뒤처진 러시아의 국영 가스 회사 가즈프롬이 유럽의 에너지 산업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세기의 투자자 워런 버핏은 2019년 FT 인터뷰에서 “기업에 선행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ESG를 위해) 석탄 회사의 문을 닫게 하면 주주나 소비자가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딱 2년 만에 그의 주장은 현실이 됐다.
최근 우리나라 산업계를 뒤흔들고 있는 요소수 대란도 중국이 탈(脫)석탄을 위해 에너지 소비가 많은 요소 공장 가동을 대폭 줄인 탓에 빚어진 참사다. 더 어이없는 것은 ESG를 주창해온 블랙록이 올해 초 기준으로 석탄 채굴·발전 기업의 자산을 850억달러(약 100조원)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ESG 광풍이 우려스러운 것은 ‘ESG 사회주의’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해야 할 책임을 기업에 전가하는 수준을 넘어, 연기금을 앞세운 정부가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 나쁜 기업을 정부가 처단한다. 이보다 좋은 명분이 있을까. 중대재해처벌법 등 이 정부에서 만든 법안을 보면 이미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