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작인가
2017.01.08 10:11
'혁명'의 시작인가
[김대중, “'혁명'의 시작인가,” 조선일보, 2016. 12. 20, A34.]
다음 대권을 노리는 민주당 문재인씨의 본색(本色)이 드러나고 있다. 사드 배치 반대, 한․일위안부합의 및 군사정보보호협정 재검토 등 박근혜표 외교를 거의 백지화하더니, 드디어 "당선되면 북한부터 먼저 가겠다"며 친북 노선을 거리낌 없이 천명했다. 그뿐이 아니다. "이번에 촛불 혁명의 힘으로 제대로 바꿔보자"며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탄핵을 기각하면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고 했다.
문씨는 '최순실 게이트' 이래 헷갈리는 발언들을 해왔다. 때로는 엄청 강경했다가 때로는 박 대통령의 '명예로운 퇴진'을 약속(?)하는 등 박 정부에 실망한 일부 보수층과 중도층을 겨냥한 '미끼'를 던지더니, 이제 촛불의 위력이 굳어지는 듯하니까 마침내 본심을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촛불을 총지휘하는 지휘탑이 그의 유연함을 연약함으로 질책하고 차기 대선의 왕관을 세상판 뒤엎기로 보상하기로 한 것일까?
어떤 경우든 이제 박근혜의 실정으로 야기된 '촛불사태'는 그 성격이 변질되고 있다. 촛불은 더 이상 박근혜 탄핵에서 멈추지 않는다. "촛불 혁명의 힘으로 (세상을) 한번 제대로 바꿔보자"는 것이고, 단순히 정권 교체에 그치지 않고 기존의 보수적 노선을 일거에 폐기하고 좌파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엊그제의 촛불이 박근혜 탄핵에 그치지 않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퇴진까지 요구하며 헌재의 심리를 협박하는 것은 이제 촛불이 좌파 혁명의 길로 가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씨류(類)의 촛불 세력과 맞서는 반대쪽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행보는 일사천리다. 그동안 보수나 중도층에서도 많은 사람이 박 대통령의 행동과 발언들에 실망하고 분노하고 질책하면서 그의 퇴진 요구에 동참해왔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권력 남용의 개선과 정치 구조의 개혁과 진척을 위한 것이었지, 법치를 넘어선 정치혁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법에 따라 대통령을 퇴진시키고 선거를 통해 다음 정부와 대통령을 선출하자는 것이었지, 헌재에서 탄핵안이 기각돼도 비법적(非法的) 혁명으로 정부를 뒤엎자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촛불에의 동참은 그들이 원한 것이든 아니든 결국 혁명에의 동조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혁명'을 바란 것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더이상 '촛불'에 동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문제는 보수․중도층의 뜻과 바람을 담아낼 정치적 '그릇'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을 대변하거나 대신할 정치 도구는 정당이고 그 정당은 새누리였다. 그 새누리당이 지금 궤멸의 길로 가고 있다. 그들끼리는 분당이니 제3세력이니 하고 떠들어대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그것은 보수 정당의 자살일 뿐이다. 지금 여론상 40%의 지지를 얻고 있는 민주당과 맞서 그들의 집권을 막고, 설혹 지는 경우라도 새 여당을 견제하고 좌파의 길을 막아야 하는 보수 정당의 사명으로 볼 때 새누리당의 분당은 최악의 적전 분열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들만 죽는 것이 아니고 야당의 혁명 위협 앞에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보수․중도층도 함께 죽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금 친박과 비박은 성정상 동거(同居)하기 어려운 파탄 가족인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새누리 역시 오늘날 탄핵 사태를 유발한 정치적 공범이고 방관자였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기들 정치 생명을 걱정하기 이전에 세상판 뒤엎기의 위협 앞에 불안해하는 이 나라 보수․중도층의 생각을 대변할 더 큰 책무가 있다. 그 세월 좋은 때 오늘의 새누리를 만들어주고 먹여주고 키워준 국민이 허탈해 있는 상황에서 친박․비박이 서로 삿대질하며 사느니 못 사느니 하는 꼴은 정말 가관이다. 배은망덕도 유분수다.
친박과 비박은 타협해야 한다. 서로의 감정을 잠시 접고, 서로의 다름을 잠시 숨기고, 비록 '각방을 쓰더라도 한 지붕을 벗어나지 않는' 리더십이 아쉽다. 자기들끼리의 불협화음도 조절하지 못하는 정치력으로 다른 정당이나 집단과 어떻게 대응하고 싸워나갈 것인가? 박 대통령은 조만간 퇴진할 수밖에 없다. 그는 헌재가 탄핵을 가결하면 당연히 법에 따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 헌재가 기각한다고 해도 그는 대통령에 복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못할 것이다. 그의 통치 능력은 효용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결국 박 정부도 끝나고 새누리당도 해체되고 새로운 대선 주자도 찾지 못하면 이 땅의 보수는 설 곳이 없다.
결별을 봉합한 새누리당이 박근혜 탄핵 사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새로운 대선 체제를 갖춘다면 대선에서 경쟁력 있는 주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길을 터줄 마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헌의 길로 나설 수도 있다. 집권이 장중에 들어왔다고 기고만장한 민주당으로서는 개헌으로 시간을 끌거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싶지 않겠지만 새누리당이 협력하면 야권 내 개헌 추진 세력에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또한 좌파의 '혁명'을 막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