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로
2013.08.25 09:29
교회의 정로(正路)
김효성 목사
교회의 정로(正路)가 무엇인가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고자 한다. 이것은 목사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고 섬기게 하기 위함이며, 일반 신자들로 하여금 혼란한 이 시대에 분별력을 가지고 교회를 선택하고 교회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이며,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기독교와 기독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1. 기독교가 무엇인가?
우선 기독교가 무엇인가부터 간단히 말해 보자. 기독교가 무엇인가 말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전하셨는지, 또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부탁하셨는지, 또 그의 제자들은 무엇을 전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전하셨는가? 마가복음 1:1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또 마가복음 1:15는 예수께서 전하신 내용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음을 증거한다. 즉 예수께서 전하신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와 회개와 복음과 믿음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중요한 주제이었고(마 13장) 또 바울도 전한 중요한 내용이었다. 사도행전 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 받음으로 그의 심령에서 시작되고 장차 그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나라라는 것은 신약성경과 역사적 기독교회들의 이해에서 명확한 것이다.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며, 그것은 곧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소식이다.
특히 복음의 내용은 사도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명확하게 증거되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었다고 말했고 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그 서신을 시작하면서, 그 서신의 핵심인 로마서 3:20-24에서 복음의 내용을 밝히 증거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즉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전한 복음의 골자는 ‘이신칭의’ 곧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갈라디아서의 내용이기도 하다(갈 2:16).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래서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의 서문 첫줄에서 그 서신이 하나님의 바로 그 가장 순수한 복음이라고 증거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24에서 중요한 말을 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것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증거하는 중요한 발언이다. 즉 그는 기독교가 인간의 철학도 아니고 기적주의도 아니고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증거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매우 중요한 점이다. 기독교를 철학화하려는 시도는 교회 역사상 부절히 있어왔으나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을 통해 그러하고, 기독교를 기적주의로 만들려는 시도도 그러하나 특히 오늘날 은사주의를 통해 그러하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치우친 두 경향을 경계하고 성경적이고 사도적인 기독교를 지키며 전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마 16:16, 18)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신 죽음이라는 속죄의 신앙 고백 위에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성경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 있게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을 세우셔서 교회의 기초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성경과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을 확고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초이며 교회의 기초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이 예언하고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외에 다른 예수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만 교회의 기초이다(고전 3:11). 사도들을 통해 증거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갈 1:7-9).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이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성경적 기독교, 즉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만 참 기독교이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성경적 기독교는 이신칭의의 속죄의 복음을 중심하여 일곱 가지의 교리 주제의 내용을 가진다. 그 첫째는 방금 말한 성경의 신적 권위성에 대한 교리이며,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 셋째는 사람에 대한 교리,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 다섯째는 구원에 대한 교리, 여섯째는 교회에 대한 교리, 일곱째는 내세에 대한 교리이다. 이것이 조직신학의 내용이며 교회의 기초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어느 교회이든지 조직신학이 분명치 않으면 기초가 약한 교회가 될 것이다. 목사들이 조직신학만 가지고 목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직신학 없이 목회할 수 없으며, 조직신학을 기본적으로 확고히 가지고 있어야 바른 목회를 할 수 있다.
또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 지침으로 주신 내용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중요하다. 이신칭의가 복음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법적인 의로 만족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의 목적이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삶임을 강조하셨다(딛 2:14).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8-10).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은 의(義)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으로 힘을 얻어 거룩과 의와 선을 행하는 자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구약성경에 근거한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와 윤리를 둘 다 귀히 여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우리가 육신대로 죄 가운데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요일 3:9). 우리의 목회와 설교에는 칭의와 성화의 강조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성화만 전하며 칭의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는 율법주의, 윤리주의에 떨어질 수 있고, 칭의만 전하고 성화를 소홀히 하면 반율법주의, 즉 도덕적 해이와 방종에 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성경적 기독교를 붙들어야 한다.
2. 장로교회
그러면 장로교회는 무엇인가? 장로교회는 과연 성경적 기독교의 흐름을 계승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1) 교회역사 개관
장로교회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우선 교회의 역사를 간략히 개관해볼 필요가 있다. 사도시대 말기에 벌써 여러 이단들의 도전이 있었다(요일 2:18; 유다서). 또 초대교회는 여러 분파들의 도전도 받았다. 이런 도전 속에서 교회 안에는 키푸리안이 주장한 감독주의라는 사상이 싹텄다. 이런 사상이 자라서 마침내 교황제도라는 천주교회의 체제를 이루었다. 펠라기우스 이단과 싸울 때 정통적 사상을 보였던 어거스틴도 도나투스파와 싸울 때는 너무 교회의 외적 일치를 강조하였다고 보인다.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그의 예정론이나 구원론과 조화되지 못하고 훗날의 천주교회 사상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비판을 받는다.
중세의 천주교회는 마리아를 점차 높여 여러 가지 비성경적 교리들(마리아의 무죄 잉태, 평생 무죄, 승천, 협력 구속자, 중보자, 기도의 대상 등)을 만들어냈고, 구원론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의 입장을 버리고 소위 반(半)펠라기우스주의라 말하는 신인협력설을 취하였고 심지어 이신칭의를 부정하였고, 교회론에 있어서는 교황제도를 확립했고 심지어 교황무오설을 주장했고, 거기에 세례나 미사에 대한 성례주의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초, 하나님의 은혜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교회는 다시 성경적 기독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종교개혁의 슬로건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었다. 이것은 천주교회의 모든 비성경적 교리들과 특히 교황제도와 마리아 숭배, 신인협력설과 성례주의를 배척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의 교회들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했고 재천명하였다.
그러나 그 후, 개신교회들은 교리들을 정립하고 교회들을 세워나가면서, 여러 교파들을 형성하였다. 교파들은 대체로 어떤 중요한 교리들에 대한 이해와 신념의 차이와 교회운영방식의 차이 때문에 생겼다. 크게,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와 성공회가 개신교의 주류파이었고 그 외에 회중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등이 출현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와서는,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등 수많은 이단 종파들이 나타났다. 20세기 초에는, 특히 오순절파 교회가 나타났다.
(2) 장로교회의 특징
종교개혁의 유산을 받은 우리는 칼빈에 의해 교리와 교회행정의 기초가 놓여진 장로교회 혹은 개혁교회가 가장 성경적 교회라고 믿는다. 장로교회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개혁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대의(代議)정치이다.
1) 개혁신학
장로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개혁신학이다. 개혁신학이란 천주교회와 루터교회와 알미니우스파 교회와 구별되는 사상 체계이다.
천주교회와 구별됨. 개혁신학은 우선 천주교회에 대항하여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원리들을 따른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만인제사장직!’ 등의 원리들을 강조했는데, 그것들은 천주교회와 구별되는 중요한 점들이었다. 천주교회는 권위의 근거를 성경에 두지 않고 교회 자체와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에게 두었다. 또 천주교회는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부정했고 구원을 위해 성례들의 절대적 필요성을 주장했다. 또 교회와 신부들의 중보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 모든 주장들을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배척하고,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것과, 사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과,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적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을 강조하였다. 이런 강조점들은 개혁신학의 기본적 원리들이다.
루터파 교회와 구별됨. 개혁신학은 또 루터파 신학과 구별되었다. 특히, 성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의 방식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 둘은 서로 달랐다. 루터파 교회는 ‘이것은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즉 그 교회는 주의 몸과 피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성찬의 빵과 포도즙 안에, 곁에, 아래 임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주의 말씀이 비유적 표현이며 예수님의 몸과 피가 실제로 함께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의 영께서 성찬식에 함께하실 뿐이라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개혁교회는 루터파의 교리 체계에 있어서의 인간론적, 구원론적 강조나, 비록 약하지만 신인협력설적 경향, 그리고 성경이 명백히 정죄하지 않는 교회 전통과 의식의 보존 등과도 구별되었다.
알미니우스파 교회와 구별됨. 개혁신학은 특히 17세기 개혁교회 안에서 일어난 알미니안파와의 논쟁에서 그 특징이 더욱 분명하게 정립되었다. 알미니안파의 다섯 가지 요점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선택과 정죄는 사람의 신앙과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豫知)에 근거한다(조건적 예정). (2)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보편 속죄). (3)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구원적 믿음에 이를 수 없다(구원적 믿음). (4) 하나님의 은혜는 저항할 수 있다(저항할 수 있는 은혜). (5) 하나님의 은혜는 상실될 수 있다(견인(堅忍)의 불확실성). 이러한 알미니안파 사상에 반대하여, 개혁교회는 도르트 회의에서 다섯 가지 요점을 선언하였다. 그 다섯 가지 요점은 개혁신학의 특징이다. (1)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회개하고 믿을 수 없다(사람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2)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의 긍휼로 죄인들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셨고 그 나머지를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셨다(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3)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즉 만세 전에 선택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 (4) 성령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사람들이 저항할 수 없다(불가항력적 은혜). (5)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존하신다(성도의 견인(堅忍)).
개혁신학은 이와 같이 천주교회와 루터교회와 알미니안파와 구별됨으로써 그 특징이 정립되었다. 장로교회는 이상에 열거된 개혁신학의 중요한 원리들을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적 교리 체계가 개혁신학에서 가장 잘 정리되었다고 믿는다.
2) 대의정치
장로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대의정치이다. 대의(代議)정치란, 교인들이 뽑은 대표자들(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교인들의 영적 특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비록 목사와 장로들의 직무와 권위를 인정하지만, 동시에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며(벧전 2:5, 9) 따라서 교회의 중요한 일들에 참여하였음을 증거한다(행 1:15-26; 6:5-6; 14:23; 15:22).
감독교회와 다름. 장로교회는 감독교회와 다르다. 감독교회는 교인들의 참정권을 인정치 않고 감독들만이 교회를 운영할 권한을 가진다고 보지만, 장로교회는 비록 장로들이 교회의 감독이며 그들에게 양무리를 돌보는 직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행 20:28) 일반 교인들도 교회 정치에 참여할 영적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회중교회와 다름. 장로교회는 회중교회와 다르다. 회중교회는 일반 교인들의 영적 특권은 매우 중시하지만, 목사들와 장로들의 직무와 권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으로서의 영적 특권을 가지고 있지만 목사와 장로들에게는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목양적 직무와 목자와 감독자로서의 권위가 있다고 본다(요 21:15-17; 행 20:28; 벧전 5:1-4).
이와 같이, 장로교회는 성경이 모든 신자의 제사장적 특권과 목사와 장로들의 감독적 직무와 권위를 둘 다 모두 가르치고 있다고 믿는다. 일반 성도들의 영적 특권도 중요하지만, 목사와 장로들의 특별한 직무와 권위도 중요하다. 장로교회는 그 둘 중의 어느 것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운영 방식에 있어서 장로교회의 대의정치 방식이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는다.
3. 오늘날 교회의 주요 문제
성경은 주의 재림 직전에 배교(背敎)가 있을 것과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할 것을 예언하였다(마 24장; 살후 2장; 계 13장). 우리는 현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라고 본다. 현대교회의 문제를 몇 가지 열거해보자.
(1) 자유주의 신학
첫째는 자유주의 신학 문제이다.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말하는 신학은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는 현대신학 전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성경비평학과 더불어 싹트기 시작하였다. 성경의 파괴적 연구방식의 도입은 처음에는 몇몇 불신앙적인 학자들의 견해이었지만, 점차 그 세력이 커졌다. 20세기 중엽에 들어와서는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개신교의 대교단들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와 무오성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속성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신성(神性), 그의 동정녀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죽음의 속죄적 의미, 그의 육체적 부활, 그의 승천, 그의 재림, 인간의 영혼의 불멸, 영원한 지옥 등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하는 무서운 이단사상인 것이다. 역사상 이렇게 철저하게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부정한 이단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교회들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많은 교회들은 이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고 공존하고 있다. 이것이 대다수의 유럽의 교회들의 실정이고, 1만 교회 이상의 교세를 가진 미국의 다수의 대교단들의 실정이며, 우리나라에도 기감, 기장을 비롯하여 예장 통합과 기성, 기침 등 아마 전체교회의 절반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라고 보인다.
(2) 에큐메니칼 운동
둘째는 에큐메니칼 운동 문제이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전 세계의 교회들을 통합시키려는 시도이다. 이 운동은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큰 악인 것처럼 말하면서 교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을 위해 전력투구를 한다. 그런데 이 운동의 첫 번째 문제는 오늘날 교회들의 배교 문제, 즉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편에서는 교회들이 내부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침입 때문에 부패되고 병들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연합운동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에큐메니칼 운동은 개신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일찍부터 천주교회와의 친근감을 가져왔고 그것은 점점 더 심해졌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은 천주교회와의 협력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운동이 되었다. 루터교회와 성공회를 포함하여 많은 교회들이 천주교회와의 화해를 선언했다. 오늘날 교회들의 교제와 협력적 활동들에서 천주교회는 더 이상 제외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가장 유서 깊은 이단이다. 천주교회는 마리아를 신격화하였고 그에게 기도하고 그에게 온갖 신적 칭송을 돌린다. 또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이신칭의의 복음을 정죄하였다. 또 천주교회는 미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사라고 거짓되고 모독적인 주장을 한다. 또 천주교회는 교황을 무오한 지도자라고 높이고 그에게 복종을 강요한다. 그러므로 천주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천주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말했듯이 적그리스도적이고 우상숭배적인 단체이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는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운동은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그 증거들은 너무 뚜렷하다. 그 운동의 대표적 단체인 WCC에서 출판된 웨슬리 아리아라자의 책 <성경과 타종교인들>은 명백히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였다. 또 그 단체의 선언문이나 그 단체의 세계대회에서는 종교다원주의적 활동을 시행하였다. 물론 이런 경향은 폴 틸리히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당연한 결론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임을 알아야 하듯이, 에큐메니칼 운동이 이단적임을 알아야 한다.
(3) 신복음주의
셋째는 신복음주의 문제이다.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그냥 복음주의라고 불린다.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특징은 자신들은 보수적 신앙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이 교제하고 협력하는 데 있다. 즉 교제의 문제에 있는 것이다.
신복음주의는 20세기 중엽 미국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이다. 역사적 대교단들이 자유주의를 포용하거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었을 때 소수의 보수적 인사들이 교단들에게 축출되거나 스스로 양심적으로 그 넓어진 교단들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모교단들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두 부류의 타협적 인사들이 있었다. 하나는 자유화된 교단 안으로 들어가 그 교단에 순응하며 보수 신앙을 지키고 전하며 교단의 주도권을 다시 찾자고 주장하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화된 교단 안에 처음부터 그대로 머물러 보수 신앙을 지키며 교단을 갱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오늘날 많은 보수적 목사들이 이와 비슷한 입장과 논리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잘못된 자들과 교제를 끊어야 한다면 교제할 대상이 누가 있겠는가? 대다수의 교회들이 포용적인데 교회의 갱신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 인내하고 머물러 있어야 한다. 두루 넓게 교제하면서 기회를 보아야 하고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교회이고 그런 교회와 분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성경이 이런 문제에 대해 무어라고 교훈하는가이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접어놓고 변론한다면 그것은 인본주의이다. 성경의 교훈은 분명하다고 본다. 성경은 교제와 분리(절교)에 대해 분명하게 교훈한다.
성경은 모든 신자들과 교제하라고 가르치지만, 다음과 같은 자들과는 교제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는 이단자들이다. 물론 이단자들은 참 신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소위 자유주의자들이나 천주교인들은 기독교인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문제이다. 성경이 이단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가르치므로, 또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는 이단이므로, 우리는 그런 자들을 교회 안에 포용하거나 교회적 교제를 나누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둘째는 고의적 불순종자들이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은 말한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이 명령은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나 천주교인들과 교제하는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가 이단일진대, 그런 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자들은 타협자들이며 고의적 불순종들이며 우리는 그런 자들과도 교제를 끊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문제점이다. 오늘날 교회들, 특히 보수적 교회들의 문제점은 한마디로 교제의 문제이다. 이것은 교리적 무관심과 해이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라고 보인다. 많은 목사들이 도대체 교리적인 문제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오직 많은 교인들을 모으는 대교회의 건립, 유여한 사례비, 좋은 사택, 좋은 자동차, 또 교단 안팎에서의 명예, 목회에 성공했다는 평판 등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실상, 목사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교리적, 윤리적 문제들이다. 교회들에 교리적, 윤리적 문제들이 많이 있는데 정작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고 다른 것들을 위해 분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영적인 해이함과 불성실을 틈타 여러 가지 오류들과 잘못된 운동들이 득세하는 것이다.
(4) 은사운동
오늘날 교회들의 네 번째 문제는 은사운동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앞의 여러 문제들 못지 않게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이것은 정말 말세의 한 징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이는 문제이다.
주 예수께서는 세상의 종말과 그의 재림 직전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하셨다(마 24:24). 또 사도 바울도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말하였다(살후 2:9-10).
사도 요한도 마지막 때의 미혹에 대해 예언하면서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고 하였다(계 13:13, 15).
오늘 시대는 은사주의 시대인 것 같다. 오늘날 소위 수적인 성장이 있는 교회들은 주로 은사주의적인 교회인 것 같다. 오늘날 교인들은 성경공부나 교리공부, 교리적 바른 지식과 윤리적인 삶에는 관심이 적으나 방언이나 병고침 등의 은사체험에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바르게 인식하고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도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은사체험을 통해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29-31).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하였다(고전 1:22-25).
우리는 오늘날도 교회의 바른 설립과 부흥은 순수한 성경말씀과 그 말씀 속에서 또 그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은사주의라는 거짓된 운동에 속지 말고 2천년 동안 역사하셨고 우리 한국에서도 지난 100년 동안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통한 교회의 설립과 부흥을 믿고 일해야 한다.
(5) 선교개념
다섯째는 선교개념의 변질이다. 오늘날 교회에는 선교개념의 혼란이 심각하다. 사람들은 교리는 분리하지만, 선교는 하나가 되게 한다고 흔히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선교하는 데 있어서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들은 과연 오늘날 교회가 공통적 복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요, 또 오늘날 교회가 선교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첫 번째 점은 이미 오늘날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함으로 공통적 복음을 상실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말했다. 두 번째 점은 오늘날 다수의 교회들, 심지어 복음주의 교회들 조차도 선교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들에 들어온 선교 개념의 변질을 바르게 인식하고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들은 선교를 단순히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들을 구원하는 전통적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들은 선교라는 개념 속에 소위 사회 정치적 활동들을 포함하여 이해한다. 이것이 소위 선교에 대한 전체적 개념 혹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교회가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뿐이 아니고, 사회의 구조적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인데, 교회가 이제까지 반쪽짜리 선교를 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갱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도 이런 영향을 받아 교회의 사명이 마치 지역사회를 봉사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목사들과 교회들이 적지 않다. 교회의 사명(선교)이 무엇인지에 대한 혼란이 있는 것이다. 오래 전에 한국의 대표적 보수 교단에 속한 갈현동에 있는 한 큰 교회의 주보를 보니까, 그 교회의 몇 가지 목표 중 하나가 지역사회 봉사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교회의 사명이 과연 지역사회의 봉사 등을 포함하는 사회 정치적 활동인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교회의 사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계승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사회정치활동을 자신의 성육신의 목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는 오직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자신이 전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의 명령을 받은 그의 사도들은,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오직 복음 전파에 전념했지 그 외의 다른 사회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고 오직 그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며 참된 교회들을 곳곳에 세우는 것이다.
(6) 여성 안수
여섯째는 여성 안수 문제이다. 이것도 오늘날 교회들의 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 곧 여자들의 목사직과 장로직을 금한다고 말한다.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은 디모데전서 2:11-14와 고린도전서 14:34-38이다. 이 두 구절에는 여성 안수를 금하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이유들이 제시되어 있다. (1) 창조의 질서, (2) 범죄의 징벌, (3) 주의 명령, (4) 율법(성경)의 교훈, (5) 교회의 보편적 규례. 이것은 성경의 명백한 교훈이기 때문에 다른 이론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의 교훈을 저버렸다. 이것은 사람들이 신약성경의 최종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기 때문에 성경의 교훈을 마음대로 변경하려 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부정하는 이런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7) 윤리적 문제
일곱째는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들이다. 오늘날 미국의 대교단들은 낙태를 허용하고 동성애를 용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동성애 결혼식을 허용하고 있고, 심지어 동성애 목사를 허용하는 교회들과 교단들이 점차 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오늘날 많은 교회들, 특히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교회들이 열린 예배 형식을 도입하고 현대기독교음악(CCM)을 용납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개혁교회의 예배모범에 어긋나는 풍조이다. 이것이 교회의 속화, 예배의 속화가 아닌가? 우선, 이런 경향은 장로교 목사들과 장로들이 임직시 했던 예배모범에 대한 임직서약의 위반이다. 장로교 예배모범은 열린 예배나 현대기독교음악을 용납하지 않는다. 현대기독교음악은 확실히 경건한 예배나 성도들의 삶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라기보다 사람들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노래라고 보인다. 그리스도인의 노래는 좀더 경건해야 할 것이다.
(8) 대책
이와 같이, 현대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문제, 은사운동의 문제, 선교 개념의 변질 문제, 여성 안수의 문제 등의 교리적 문제들과, 낙태와 동성애를 용납하는 문제, 열린 예배와 현대기독교음악(CCM)의 문제 등의 윤리적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들의 이러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과 특히 교제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성경은 교제와 분리(혹은 절교)에 대해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그런 교훈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또 자유주의적 교단들 안에 머물러서도 안되고 그런 교단들과 교제를 나누어서도 안 된다. 또 우리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WCC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 또 우리는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교단들과 함께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제하고 협력하고 활동하는 신복음주의자들, 즉 타협적 복음주의자들을 책망하고 그들과의 교제도 삼가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은사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선교의 영역에서도 연합전선을 펼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여성 안수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 또 우리는 낙태와 동성애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열린 예배나 현대기독교음악(CCM)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
4. 교회의 임무와 사명
그러면,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의 임무와 사명은 무엇인가? 전통신학이 가르치는 대로, 교회의 임무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구주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기본적인 임무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첫 번째 임무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성령 혹은 심령]과 진정[진리 혹은 진심]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요 4:24).
둘째는 스스로를 양육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중요한 임무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적으로 자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양육을 위해 교회에 목사들을 주셨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요 21:15). 사도 바울은 “[그리스께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했다(엡 4:11-12). 교회의 영적 성장, 즉 성도들의 양육을 위해 말씀의 교훈과 기도가 필요하다(행 2:42). 하나님의 뜻은 사랑과 선행의 실천이다(요 13:34; 딛 2:14). 또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히 10:24-25).
셋째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지교회들은 쉬지 말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또 국내와 국외 등 힘있는 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을 위해 전도자들을 양성하며 파송해야 하고 또 온 세계에 교회들을 세워야 한다. 이 전도의 임무는 교회에게 부여된 특별한 임무, 즉 사명(mission)이다. 이것이 선교 즉 교회의 특수한 임무이다.
결론
말씀을 맺어야 하겠다. 우리는 교회의 정로(正路)에 대해 말해보고자 노력했다. 교회의 정로(正路)는 무엇인가? 우리는 장로교회(개혁교회)가 바른 교회라고 믿는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개혁신학을 말하며 교회행정적으로 대의정치를 말한다. 그것은 목사와 치리장로들의 균형과 협력을 말한다. 그것은 교권주의의 부패와 횡포나 회중주의의 혼란과 무질서를 반대한다. 거기에 더하여, 특별히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하지 말고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복음주의 및 은사주의를 경계하고 선교개념의 변질과 여성 안수와 열린 예배나 CCM 등의 풍조를 반대하는 건전한 개혁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확신한다. 특히, 오늘날 성경적 교회들은 바른 교제를 실천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세 가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우선, 이러한 문제들은 지교회와 지교단 차원에서 실천되어야 하지만, 또한 연합적 교제가 필요하고 유익하다. 그러나 인간적 조직은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경건함과 거룩함과 진실함, 온유와 겸손과 인내를 구하며 실천해야 한다. 바른 지식과 덕을 가진 지교회, 지교단, 및 전체교회의 구성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지교회든지, 교단이든지, 교리적, 윤리적 오류에 대해 엄격한 제재와 성실한 권징이 있어야만 바른 교회를 세울 수 있다.
그리고 바른 교회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바른 신학교가 필요하다. 교회의 부패는 목사의 부패이며, 목사의 부패는 신학교의 부패에서 일차적으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엄격한 신학교육과 훈련은 바른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일이다. 역사적 기독교회가 부패된 것은 바른 교훈의 계승이 끊어지고 바른 실천의 본이 중단된 때문이었다. 이제라도 우리는 신구약성경의 바른 연구와 해석과 역사적 개혁신학의 전통의 재확인에 근거하여, 바른 교훈을 계승해야 하고 또 그런 목사들을 배출함으로써 바른 교단을 세우고 한국교회의 갱신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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