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북핵 特委’ 구성하라
2005.08.07 13:49
[고려대 남성욱 교수, 조선일보, 2005. 5. 14, A31쪽.]
지난 1994년 북한 핵 위기는 군사적 측면에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유엔 안보리 제재를 촉구하자 북한은 1994년 6월 5일 “유엔 제재는 곧 선전포고다. 전쟁에서 자비란 있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미국 국방부는 1994년 초부터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 대한 병력 증강을 가속화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은 전쟁 불사(不辭)에 무게 중심이 실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측 협상 수석대표인 로버트 보브 갈루치 차관보는 사태가 ‘전쟁, 그것도 대전(大戰)으로 비화될 소지’가 있음을 직감했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작금의 사태가 실질적인 전쟁 위험 단계’에 진입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서울에서 근무했던 하웰 에스테스 중장은 “이미 장교들이 속으로는 모두가 전쟁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미국의 작전계획 5027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추상적인 문서나 컴퓨터 파일이 아닌 현실적인 실행 계획으로 검토되기 시작했었다.
북한이 ‘불바다 발언’으로 한국을 자극한 지 나흘이 지난 1994년 5월 23일 이병태 국방장관이 국회 증언에서 5027 계획의 핵심을 공개적으로 설명하면서 국민들의 ‘라면 사재기’가 시작됐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연일 계속되는 CNN의 한반도 위기 보도에 놀라 매일 저녁 서울의 안부를 묻는 국제전화가 폭주하였다. 주한 미국대사관도 한국에 있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소개(疏開)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부 외국 투자가들은 한국 증시에서 돈을 빼내고 있었다. 1993년 말부터 시작된 10개월에 걸친 군사적 대치 시나리오는 1차 세계대전의 계기가 된 1914년 ‘8월의 총성(the guns of August)’과 유사하였다. 1914년 여름 각국의 엇갈린 목적과 오해, 우연 등의 불씨들로 말미암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것이다.
1994년 북핵 위기는 민주당 소속 카터 전 대통령이 중재자로 나서고 클린턴 행정부의 합리적 결정에 의하여 10월 제네바 합의로 연착륙하였다. 그러나 2005년 북핵 위기는 1994년보다 여건이 더 나쁘다. 9·11 테러를 겪은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서 ‘악에 응징’하는 실전을 전개하였다. 1994년 당시는 군사 충돌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요즘과 같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지도자 간 상호 비방도 적었다. 그리고 평양과 워싱턴 간에 뉴욕 채널 등을 통하여 핫라인이 작동되고 있었다. 1994년 뉴욕 시내 2평 빵집에서 북폭(北爆)과 협상의 주제를 놓고 고뇌하던 양국 외교관들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현재 6자회담 틀이라는 외교 협상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1994년보다 유용하지 않다. 또한 공화당 행정부에는 카터와 같은 평화주의자도 별로 없다.
금년 하반기에는 1994년 5월부터 전개된 무력 시나리오가 유사하게 재연될 것 같다. 역사의 반복이다. 이제 정부도 북한 핵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사태에 수동적인 반응보다는 가능성과 개연성에 대비하여야 한다. 북핵의 경착륙 시나리오가 우세해지는 시점에서 입지가 어정쩡한 정부를 보완하는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재·보선에 주력하느라 국제정세 파악이 어두운 여야는 우선 ‘북핵 특위(特委)’를 구성하여 핵심을 직시해야 한다. 국회는 북핵 불감증으로 우리 정부의 대책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안위에 관한 사안에 대한 직무유기다. 국회는 사태가 악화된 이후에 우왕좌왕하지 말고 사전에 체계적으로 대처하여 위기상황에서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
지난 1994년 북한 핵 위기는 군사적 측면에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유엔 안보리 제재를 촉구하자 북한은 1994년 6월 5일 “유엔 제재는 곧 선전포고다. 전쟁에서 자비란 있을 수 없다”고 반발했다. 미국 국방부는 1994년 초부터 한반도와 주변 지역에 대한 병력 증강을 가속화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은 전쟁 불사(不辭)에 무게 중심이 실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측 협상 수석대표인 로버트 보브 갈루치 차관보는 사태가 ‘전쟁, 그것도 대전(大戰)으로 비화될 소지’가 있음을 직감했다.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작금의 사태가 실질적인 전쟁 위험 단계’에 진입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서울에서 근무했던 하웰 에스테스 중장은 “이미 장교들이 속으로는 모두가 전쟁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미국의 작전계획 5027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추상적인 문서나 컴퓨터 파일이 아닌 현실적인 실행 계획으로 검토되기 시작했었다.
북한이 ‘불바다 발언’으로 한국을 자극한 지 나흘이 지난 1994년 5월 23일 이병태 국방장관이 국회 증언에서 5027 계획의 핵심을 공개적으로 설명하면서 국민들의 ‘라면 사재기’가 시작됐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연일 계속되는 CNN의 한반도 위기 보도에 놀라 매일 저녁 서울의 안부를 묻는 국제전화가 폭주하였다. 주한 미국대사관도 한국에 있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소개(疏開)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부 외국 투자가들은 한국 증시에서 돈을 빼내고 있었다. 1993년 말부터 시작된 10개월에 걸친 군사적 대치 시나리오는 1차 세계대전의 계기가 된 1914년 ‘8월의 총성(the guns of August)’과 유사하였다. 1914년 여름 각국의 엇갈린 목적과 오해, 우연 등의 불씨들로 말미암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것이다.
1994년 북핵 위기는 민주당 소속 카터 전 대통령이 중재자로 나서고 클린턴 행정부의 합리적 결정에 의하여 10월 제네바 합의로 연착륙하였다. 그러나 2005년 북핵 위기는 1994년보다 여건이 더 나쁘다. 9·11 테러를 겪은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서 ‘악에 응징’하는 실전을 전개하였다. 1994년 당시는 군사 충돌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요즘과 같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지도자 간 상호 비방도 적었다. 그리고 평양과 워싱턴 간에 뉴욕 채널 등을 통하여 핫라인이 작동되고 있었다. 1994년 뉴욕 시내 2평 빵집에서 북폭(北爆)과 협상의 주제를 놓고 고뇌하던 양국 외교관들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현재 6자회담 틀이라는 외교 협상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1994년보다 유용하지 않다. 또한 공화당 행정부에는 카터와 같은 평화주의자도 별로 없다.
금년 하반기에는 1994년 5월부터 전개된 무력 시나리오가 유사하게 재연될 것 같다. 역사의 반복이다. 이제 정부도 북한 핵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사태에 수동적인 반응보다는 가능성과 개연성에 대비하여야 한다. 북핵의 경착륙 시나리오가 우세해지는 시점에서 입지가 어정쩡한 정부를 보완하는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재·보선에 주력하느라 국제정세 파악이 어두운 여야는 우선 ‘북핵 특위(特委)’를 구성하여 핵심을 직시해야 한다. 국회는 북핵 불감증으로 우리 정부의 대책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안위에 관한 사안에 대한 직무유기다. 국회는 사태가 악화된 이후에 우왕좌왕하지 말고 사전에 체계적으로 대처하여 위기상황에서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