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김정은?"
초등생 아들과 친구들이 '둘 중 한 명 뽑기' 놀이를 했다. 두 사람 이름을 대고 좋아하는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다. 연예인들을 비교하다 갑자기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이름을 올렸다. 한데 5명 중 4명이 동시에 외쳤다. "김정은!" 동맹국 대통령 대신 북한 독재자를 선택한 것이다.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의 남북 정상회담이 동심(童心)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이리라.
인터넷과 소셜미디어(SNS)에선 한술 더 뜬다. 김정은에게 '귀엽다' '인상 좋다' '그동안 오해했다'는 옹호 글이 쏟아진다. '김정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까지 생겨날 조짐이다. 일부에선 "통일 후 초대 대통령감"이란 찬사가 나온다. '김정은 사진과 굿즈'도 인기라고 한다. 희한한 '김정은 신드롬'이다.
지난 4일 갤럽 조사에선 '김정은에 대한 생각이 전에 비해 좋아졌다'는 응답이 65%나 됐다. 코리아리서치 조사에선 김정은에 대한 신뢰도가 77.5%에 달했다.
정부·여당도 앞장서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솔직담백하고 예의 바르더라"고 했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김정은 모습이 감격적이었다"고 했다. "친근하고 열린 마음" "노련하고 능수능란하다" "시원시원하고 돌파력이 보였다"는 칭송도 이어졌다. 서훈 국가정보원장은 현장에서 눈물까지 흘렸다.
김정은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아대며 우리를 '핵 불바다'로 위협했던 인물이다. 이번 판문점 공동 발표에선 비핵화의 '핵(核)' 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회담이 끝나자 마치 '평화의 전도사'라도 되는 양 우리가 먼저 떠받드는 모양새다.
비핵화 회담을 위해 상대방에 대한 예우는 필요하다. 하지만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지 냉철하게 꿰뚫어 봐야 협상이 성공할 수 있다. 북한 정권은 지금까지 숱하게 핵개발과 도발 중단을 약속하고 한 번도 지키지 않았다. 김정은은 네 번의 핵실험에 60여 발의 탄도미사일을 쏜 뒤 '핵보유국'을 선언했다. 고모부를 죽이고, 친형까지 생화학무기로 살해했다.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을 '졸았다'는 이유로 총살하는 등 고위 간부 100여 명을 숙청하는 잔혹함도 보였다.
그런데 정상회담에서 몇 마디 말과 웃음만 보고 '독재자 김정은'은 어느 샌가 잊어버린 듯하다. 모두가 '집단 망각증(忘却症)'에라도 걸린 것 같은 모습이다. 일부에선 벌써부터 '주한미군 철수론'이 나오고 대북 경협(經協) 추진설도 쏟아진다. 비핵화는 시작도 안 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이는 비핵화 협상에 치명적인 독(毒)이 될 수 있다. 북한과 김정은이 마치 정상 국가의 민주적 지도자인 양 환상을 가져선 곤란하다. 김정은이 비핵화에 선의(善意)를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위험하다. 거기에 기대면 협상은 미궁에 빠질 것이다.
김정은이 남북, 미·북 정상회담에 나온 건 국제 제재로 막다른 골목에 몰렸기 때문이다. 최근 조총련 고위 간부는 우리 정부 인사에게 비핵화 회담 성사 배경에 대해 "중국의 제재 동참이 너무 뼈아팠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북한 은 지금도 내부적으론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미국과 협상한다"고 선전하고 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3대 세습에 핵을 가진 독재자가 스스로 바뀌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보지 않으면 과거 대북(對北) 협상처럼 또다시 속을 수 있다. 비핵화는 길고 험난한 과정이다. 상대를 앞에 두고 우리 내면부터 스스로 무장해제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