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떠오르고 있는 중요한 의제(議題)의 하나는 보수라 할까, 우파라 할까, 자유민주파라 할까 하는 정치·사회·문화적 범주(範疇)가 과연 오늘의 '폭망'에서 되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걸 따지기 위해선 보수 궤멸이 온 경위를 짚어봐야 한다. 이 과정은 프랑스 혁명 당시의 유명한 구호 "좌(左) 쪽엔 적(敵)이 없다"를 새겨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사가(史家) 피에르 가소트(Pierre Gaxotte)와 미국의 전(前) 교육부 차관보 케네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1789년 프랑스 혁명 이래 모든 혁명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더 과격하고 더 급진적 분파가 나와 어제의 진보를 오늘의 반동으로 폐기 처분하곤 했다. 이 점은 오늘의 한국 혁명에도 그대로 해당할 것이다.
"좌 쪽엔 적이 없다"는 "좌 쪽으로 가면 갈수록 더 좋다" "그래서 좌 쪽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영구 혁명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면 사태는 갈 데까지 가고야 만다는 관성(慣性)의 법칙이다. 오늘의 한국 보수 '폭망'도 그런 틀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갈수록 더 과격화'는 왜 일어나는 것인가? 인간 해방, 더 나은 세상, 인간 조건 완성이라는 혁명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는 더 헌신적이고 더 무자비하고 더 순혈(純血)적이며 더 자살 특공대식 전위 투사가 연이어 나오고 또 나와야 한다는 필요에서다. 이런 살벌한 판에선 다소 온건한 입장은 하루아침에 반(反)혁명으로 몰려 단두대로 보내지기 십상이다.
전투적, 투쟁적이란 말은 그래서 '진보' 쪽만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훈장이지 '보수' 쪽은 한사코 기피하는 말이 되었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이 지경에 이르면 영구 혁명은 마침내 우파 멸종, 보수 소멸, 좌익 혁명 독재에 도달한다.
오늘의 자유한국당이 자청(自請)하고 있는 길이 꼭 그 짝이다.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그 당(黨) 내부에선 "우리도 보수 이념을 해체하고 좌클릭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바깥세상의 '갈수록 더 과격화'에 영합하자는 말이다. "서민을 위한 정당이 되겠다"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도 우파, 중도, 중도 좌파는 이미 바른당, 민평당 등 다른 사람들이 선점했다. 뒤따라 해보았자 남 흉내나 내는 꼴이다.
자유한국당을 버린 상당수 유권자는 바른당을 건너뛰어 더불어민주당으로 직행했다. 자유한국당 안의 '왔다 갔다' 주의자들이 이사 갈 '적당한 왼쪽' 명당(明堂) 자리란 신기루란 이야기다.
그렇다면 자유·민주 정계와 시민사회가 오늘 시점에서 해야 할 적실(適實)한 처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구 혁명의 '갈수록 더 과격화'에 주눅 들어 스스로 짠맛 잃은 소금처럼 되는 게 아니라, 영구 혁명이야말로 인간성을 파괴하고 세상을 황폐화하는 파국의 길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영구 혁명의 홍위병 폭란을 뚫고 나가 자유와 법치의 세상을 재건하겠음을 다짐하는 것이다. 기성 '보수'는 이렇게 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국 자유·우파의 정체성은 그래서 '전체주의 한반도'를 막는 것이다. 평양 세습 신정(神政) 체제와 남한 '민족·민중' 컬트의 범람에 노(no)라고 말하는 것이다. 웰빙 보수는 "우리가 무슨 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운동권이 한 헌신의 반(半)의 반도 못 하겠다면 정치 아예 집어치워야 한다.
자유·우파가 2020 총선에서 전멸하면 그땐 '자유를 삭제한 민주주의+사회적 경제 체제+지방정부들의 연방제+1948년의 대한민국 말소(抹消)'가 체제화할 것이다. 이 막장에서도 그러나, 자유·우파는 할 일을 해야 한다. 자유한국당 등 우파 정계는 새 세대, 새 리더십, 새 문화로 재탄생해야 한다. 30~40~50대 당을 만들고 '586 편집증'에 대한 '자유인 2030'의 반란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2030은 586 '이념 경제'의 최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우파 시민사회는 1960~1980 년 당시의 미국 우파가 어떻게 '갈수록 더 과격화'에 반발(backlash)했는지, 참고할 만하다. 미국 우파는 좌파 문화혁명의 지나침이 초래한 가정 해체, 성(性) 문란, 과도한 국가 개입, 방만한 정부 지출, 기강 해이(解弛)에 저술(著述)로, 싱크탱크로, 시민운동으로, 사회교육으로 20년간 열심히 투자해 뜻을 이뤘다. 한국 자유·우파에도 공짜는 없다.
프랑스 혁명 사가(史家) 피에르 가소트(Pierre Gaxotte)와 미국의 전(前) 교육부 차관보 케네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1789년 프랑스 혁명 이래 모든 혁명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더 과격하고 더 급진적 분파가 나와 어제의 진보를 오늘의 반동으로 폐기 처분하곤 했다. 이 점은 오늘의 한국 혁명에도 그대로 해당할 것이다.
"좌 쪽엔 적이 없다"는 "좌 쪽으로 가면 갈수록 더 좋다" "그래서 좌 쪽 끝까지 가봐야 한다"는 것이다. 영구 혁명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면 사태는 갈 데까지 가고야 만다는 관성(慣性)의 법칙이다. 오늘의 한국 보수 '폭망'도 그런 틀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갈수록 더 과격화'는 왜 일어나는 것인가? 인간 해방, 더 나은 세상, 인간 조건 완성이라는 혁명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는 더 헌신적이고 더 무자비하고 더 순혈(純血)적이며 더 자살 특공대식 전위 투사가 연이어 나오고 또 나와야 한다는 필요에서다. 이런 살벌한 판에선 다소 온건한 입장은 하루아침에 반(反)혁명으로 몰려 단두대로 보내지기 십상이다.
전투적, 투쟁적이란 말은 그래서 '진보' 쪽만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훈장이지 '보수' 쪽은 한사코 기피하는 말이 되었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이 지경에 이르면 영구 혁명은 마침내 우파 멸종, 보수 소멸, 좌익 혁명 독재에 도달한다.
오늘의 자유한국당이 자청(自請)하고 있는 길이 꼭 그 짝이다.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그 당(黨) 내부에선 "우리도 보수 이념을 해체하고 좌클릭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바깥세상의 '갈수록 더 과격화'에 영합하자는 말이다. "서민을 위한 정당이 되겠다"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도 우파, 중도, 중도 좌파는 이미 바른당, 민평당 등 다른 사람들이 선점했다. 뒤따라 해보았자 남 흉내나 내는 꼴이다.
자유한국당을 버린 상당수 유권자는 바른당을 건너뛰어 더불어민주당으로 직행했다. 자유한국당 안의 '왔다 갔다' 주의자들이 이사 갈 '적당한 왼쪽' 명당(明堂) 자리란 신기루란 이야기다.
그렇다면 자유·민주 정계와 시민사회가 오늘 시점에서 해야 할 적실(適實)한 처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구 혁명의 '갈수록 더 과격화'에 주눅 들어 스스로 짠맛 잃은 소금처럼 되는 게 아니라, 영구 혁명이야말로 인간성을 파괴하고 세상을 황폐화하는 파국의 길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영구 혁명의 홍위병 폭란을 뚫고 나가 자유와 법치의 세상을 재건하겠음을 다짐하는 것이다. 기성 '보수'는 이렇게 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시각도 있지만.
한국 자유·우파의 정체성은 그래서 '전체주의 한반도'를 막는 것이다. 평양 세습 신정(神政) 체제와 남한 '민족·민중' 컬트의 범람에 노(no)라고 말하는 것이다. 웰빙 보수는 "우리가 무슨 힘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운동권이 한 헌신의 반(半)의 반도 못 하겠다면 정치 아예 집어치워야 한다.
자유·우파가 2020 총선에서 전멸하면 그땐 '자유를 삭제한 민주주의+사회적 경제 체제+지방정부들의 연방제+1948년의 대한민국 말소(抹消)'가 체제화할 것이다. 이 막장에서도 그러나, 자유·우파는 할 일을 해야 한다. 자유한국당 등 우파 정계는 새 세대, 새 리더십, 새 문화로 재탄생해야 한다. 30~40~50대 당을 만들고 '586 편집증'에 대한 '자유인 2030'의 반란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2030은 586 '이념 경제'의 최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우파 시민사회는 1960~1980 년 당시의 미국 우파가 어떻게 '갈수록 더 과격화'에 반발(backlash)했는지, 참고할 만하다. 미국 우파는 좌파 문화혁명의 지나침이 초래한 가정 해체, 성(性) 문란, 과도한 국가 개입, 방만한 정부 지출, 기강 해이(解弛)에 저술(著述)로, 싱크탱크로, 시민운동으로, 사회교육으로 20년간 열심히 투자해 뜻을 이뤘다. 한국 자유·우파에도 공짜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