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左派)가 가장 먼저 피해 입을 것
2006.02.25 15:37
[김범수, “김정일 세상되면 左派가 가장 먼저 피해 입을 것,” 미래한국, 2006. 1. 23, 9쪽; 김정일-성혜림 관계 발설로 정치범 된 탈북민 김영순 씨.]
“한때 영웅대접을 받던 북한의 예술인들이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 아십니까. 김정일 세상이 되면 남한에서도 그에 찬동(贊同)하는 좌파들이 가장 먼저 제거 대상이 될 겁니다.”
전설적인 무용수 최승희(崔承憙)의 제자이며 김정일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는 성혜림과 중·고등학교(高女中) 동창생이기도 한 김영순 씨(69)는 북한체제 하에서 영욕(榮辱)의 삶을 살았던 북한사(史)의 산 증인이다.
김일성의 항일연군 동료로 한국전쟁 당시 25세의 나이에 인민군 사단참모장을 지냈던 오빠의 덕으로 김 씨는 어린 시절부터 북한 최고위층과 교류하며 그들의 삶과 영락(零落)의 과정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지난 12일 본지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자신들의 이름을 잃고 오직 한 사람(김정일)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북한인민들의 기막히고 애처로운 현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김일성, 김정일은 자신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죽였습니다. 연안파를 비롯해 항일한 사람들이나 1950년 전쟁의 공로자들을 요덕수용소 등지로 보냈습니다. 자신들의 내막을 가장 잘 알고 있거나 ‘함께 혁명을 했다‘며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영 등 노장(老將)들의 처단과정을 가까이서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평양종합예술학교 1기 졸업생으로 최승희에게 사사(師事)한 김 할머니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최승희의 최후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세계적 무용가로 북한을 조국으로 택했던 ‘인민의 영웅‘도 사상과 공산수령독재 앞에서는 한낱 도구에 불과했다.
“최승희 선생이 죽은 곳은 평남의 북창관리소(정치범수용소)입니다. 1967년 3,000여 명의 예술인이 참여하는 공연에서 중(승려)을 등장시키는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포함시켰다는 것이 직접적 이유였어요. 그 외에도 예술인으로서 개인 우상화가 광적으로 벌어지는 현실에서 견뎌낼 수 없었을 겁니다. 남편 안막(安漠)과 딸 안성희도 함께 끌려가 강제노동과 영양실조로 죽음을 맞이했어요.”
김영순 할머니 자신도 1970년 10월 요덕수용소에 끌려가 8년 간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국가 최고위 간부만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여행자 상점의 책임안내원으로 근무하며 이른바 최고 특권층의 삶을 영유하던 시기, 학창 시절부터 절친했던 성혜림과 김정일의 내연관계를 발설한 것이 이유였다. 김 할머니는 수용소 안에서 노부모와 막내아들을 영양실조와 사고로 잃었다. 처음 4년 간은 공포와 충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젊은 나이에 생리마저 멈췄다고 한다.
“수용소 안에는 단지 김일성 목에 혹이 달렸다고 말했다가 들어온 사람, 김일성 얼굴이 든 신문으로 장판을 했다고 온 사람, 가족이 교회 장로나 목사라는 이유로 온 사람 그리고 나처럼 김정일의 가정사에 대해 언급했다가 들어온 사람도 많았습니다. 수두룩한 사람들이 동상이나 영양실조로 죽어 나갔지요.”
광복 직후 명성을 떨쳤던 만담가 신불출(申不出)도 ‘말실수‘때문에 요덕수용소에 끌려 왔다가 1967년 영양실조로 죽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자신이 그러한 지옥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오로지 살기 위해 ‘성난 사자‘보다 더 열심히, 미친 여자처럼 일해 노동과제를 100%이상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가 속했던 요덕수용소 용평리 지구에서 살아 나온 것은 그가 유일했다. 그러나 그나마 살아남은 아들은 이후 탈북 과정에서 북한 보위부에 잡혀 고문으로 죽었다.
한편 김 할머니의 남편은 일본에 파견된 간첩출신인 신광수의 모함에 의해 1970년 7월 ‘영원히 못나오는 곳‘으로 끌려갔으며 이후 전혀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어린 아들들을 둔 젊은 부인이 하루아침에 영문도 모른 채 과부가 돼도 하소연 할 곳이 없는 곳이 북한이었다. 신광수는 이후 남파됐다가 붙잡혀 복역하다가 2000년 김대중 정권 때 비전향 장기수로 북한에 귀환했다.
“잃어버린 과거와 인생을 생각하면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이 정해주는 운명 안에서 살다가 어느 날 배신자가 되어 가족마저 잃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현실을 바라보면 지금도 잠을 설칩니다. 그래도 말년에 대한민국에 살면서 자유의 맛을 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지요. 마지막까지 능력과 힘을 다해 활동할 겁니다.”
김영순 할머니는 현재 탈북자 출신의 정선산 감독과 함께 뮤지컬 ‘요덕스토리‘를 준비중이다. 그가 안무를 맡았고 또한 직접 무대에 선다고 한다. “지금도 밤에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합니다. 현재의 남한정권 아래서 내가 북한체제 하에서 겪었던 일들을 상세히 밝힌다면 박해를 받겠죠.”
김 할머니는 북한수령독재체제가 만들어낸 한반도 역사의 암울한 상징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 불굴의 정신과 하나님 은혜의 표적이었다.
“한때 영웅대접을 받던 북한의 예술인들이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 아십니까. 김정일 세상이 되면 남한에서도 그에 찬동(贊同)하는 좌파들이 가장 먼저 제거 대상이 될 겁니다.”
전설적인 무용수 최승희(崔承憙)의 제자이며 김정일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는 성혜림과 중·고등학교(高女中) 동창생이기도 한 김영순 씨(69)는 북한체제 하에서 영욕(榮辱)의 삶을 살았던 북한사(史)의 산 증인이다.
김일성의 항일연군 동료로 한국전쟁 당시 25세의 나이에 인민군 사단참모장을 지냈던 오빠의 덕으로 김 씨는 어린 시절부터 북한 최고위층과 교류하며 그들의 삶과 영락(零落)의 과정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지난 12일 본지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자신들의 이름을 잃고 오직 한 사람(김정일)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북한인민들의 기막히고 애처로운 현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김일성, 김정일은 자신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죽였습니다. 연안파를 비롯해 항일한 사람들이나 1950년 전쟁의 공로자들을 요덕수용소 등지로 보냈습니다. 자신들의 내막을 가장 잘 알고 있거나 ‘함께 혁명을 했다‘며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기영 등 노장(老將)들의 처단과정을 가까이서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평양종합예술학교 1기 졸업생으로 최승희에게 사사(師事)한 김 할머니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최승희의 최후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세계적 무용가로 북한을 조국으로 택했던 ‘인민의 영웅‘도 사상과 공산수령독재 앞에서는 한낱 도구에 불과했다.
“최승희 선생이 죽은 곳은 평남의 북창관리소(정치범수용소)입니다. 1967년 3,000여 명의 예술인이 참여하는 공연에서 중(승려)을 등장시키는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포함시켰다는 것이 직접적 이유였어요. 그 외에도 예술인으로서 개인 우상화가 광적으로 벌어지는 현실에서 견뎌낼 수 없었을 겁니다. 남편 안막(安漠)과 딸 안성희도 함께 끌려가 강제노동과 영양실조로 죽음을 맞이했어요.”
김영순 할머니 자신도 1970년 10월 요덕수용소에 끌려가 8년 간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국가 최고위 간부만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여행자 상점의 책임안내원으로 근무하며 이른바 최고 특권층의 삶을 영유하던 시기, 학창 시절부터 절친했던 성혜림과 김정일의 내연관계를 발설한 것이 이유였다. 김 할머니는 수용소 안에서 노부모와 막내아들을 영양실조와 사고로 잃었다. 처음 4년 간은 공포와 충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젊은 나이에 생리마저 멈췄다고 한다.
“수용소 안에는 단지 김일성 목에 혹이 달렸다고 말했다가 들어온 사람, 김일성 얼굴이 든 신문으로 장판을 했다고 온 사람, 가족이 교회 장로나 목사라는 이유로 온 사람 그리고 나처럼 김정일의 가정사에 대해 언급했다가 들어온 사람도 많았습니다. 수두룩한 사람들이 동상이나 영양실조로 죽어 나갔지요.”
광복 직후 명성을 떨쳤던 만담가 신불출(申不出)도 ‘말실수‘때문에 요덕수용소에 끌려 왔다가 1967년 영양실조로 죽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자신이 그러한 지옥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오로지 살기 위해 ‘성난 사자‘보다 더 열심히, 미친 여자처럼 일해 노동과제를 100%이상 수행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가 속했던 요덕수용소 용평리 지구에서 살아 나온 것은 그가 유일했다. 그러나 그나마 살아남은 아들은 이후 탈북 과정에서 북한 보위부에 잡혀 고문으로 죽었다.
한편 김 할머니의 남편은 일본에 파견된 간첩출신인 신광수의 모함에 의해 1970년 7월 ‘영원히 못나오는 곳‘으로 끌려갔으며 이후 전혀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어린 아들들을 둔 젊은 부인이 하루아침에 영문도 모른 채 과부가 돼도 하소연 할 곳이 없는 곳이 북한이었다. 신광수는 이후 남파됐다가 붙잡혀 복역하다가 2000년 김대중 정권 때 비전향 장기수로 북한에 귀환했다.
“잃어버린 과거와 인생을 생각하면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이 정해주는 운명 안에서 살다가 어느 날 배신자가 되어 가족마저 잃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현실을 바라보면 지금도 잠을 설칩니다. 그래도 말년에 대한민국에 살면서 자유의 맛을 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지요. 마지막까지 능력과 힘을 다해 활동할 겁니다.”
김영순 할머니는 현재 탈북자 출신의 정선산 감독과 함께 뮤지컬 ‘요덕스토리‘를 준비중이다. 그가 안무를 맡았고 또한 직접 무대에 선다고 한다. “지금도 밤에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합니다. 현재의 남한정권 아래서 내가 북한체제 하에서 겪었던 일들을 상세히 밝힌다면 박해를 받겠죠.”
김 할머니는 북한수령독재체제가 만들어낸 한반도 역사의 암울한 상징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 불굴의 정신과 하나님 은혜의 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