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출생이 그러하듯이 나라의 탄생도 무어 그리 복잡하랴는 생각으로 해방 언저리 역사를 다시 더듬어 보았다. 해방 후 우리나라는 극심한 혼란과 가난에 허덕이는 유교 국가였다. 1947년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고, 1948년 2월 유엔 총회는 가능한 지역 내에서 선거에 의한 독립 정부 수립을 가결한다. 그해 5월 최초의 보통·직접·평등·비밀투표를 통해 초대 국회가 구성됐고 7월 17일 제헌 헌법을 공포,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다. 같은 해 12월 제3차 유엔 총회는 당시 한반도에 존재하던 '두 체제'중 대한민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한다. 북한은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3·1운동의 빛나는 정신과 임시정부를 세운 애국선열의 노력에 힘입어 대한민국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건 조선도, 대한제국도 아닌 새로운 나라였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은 신미양요 때 미군 함정으로 몸을 피한 노비의 자식(이병헌 분)이 미군 장교가 되어 조선에 돌아와 벌어지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비록 픽션이지만 우리나라 개화기 역사가 글로벌 채널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동시에 전달된다. 그들이 감상하는 건 '방탄소년단'의 한국이 아니라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대한제국의 전경이다. 부조리한 조선에 복수심을 품은 주인공 이병헌은 의병에게 이렇게 묻는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대한민국의 제헌 헌법 제5조는 '대한민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各人)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공공복리의 향상을 위하여 이를 보호하고 조정하는 의무를 진다'고 새 나라가 지향하는 가치를 천명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분제와 이념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비전으로 내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은 천운(天運)이었다. 사람의 탄생이 그러하듯 대한민국도 기적같이 탄생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겨나 지금껏 존속해 온 것은 '사실(史實)'의 영역이지 가치 판단이나 호불호(好不好)의 대상이 아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나라가 70년 동안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자유 민주 질서를 발전시키며 세계 11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는 더더욱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善)하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는 없다. 나라의 출생을 무효화하려는 극도의 자기 부정은 반역이거나 국가적 자살에 다름 아니다.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도 나름 합법 정부였다고 인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특히 지금 정부에는 같은 동포로서 북한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아무리 그렇대도 자기 존재의 엄숙한 시작을 알리는 출생증명서를 쓰며 다른 존재를 의식해 자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경우는 없다. 북한은 북한 나름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출생증명서를 쓰면 될 뿐이다.
그래도 북한을 인정하고 싶다면 조금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다. 통일 한국이 태어나는 날 통일 헌법(출생증 명서)을 새로이 만들며 출생 일시와 장소와 기타 등등을 고쳐 쓰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북한을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한반도의 남쪽 절반에서 벌어진 이 기적 같은 사건을 그들에게 전파하여 '노비도, 백정도' 각인(各人)의 인권을 보호받으며 자유 평등 창의가 존중되는 풍요로운 곳에서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쩌면 그게 대한민국이 태어난 소명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