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보수 통합의 열쇠는 국민에게 있다," 조선일보, 2020. 1. 11, A26쪽.] → 자유대한민국 수호
며칠 전 대통령 신년사를 보도한 언론 대부분은 '김정은 답방' 언저리 내용을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언론은 대체로 기사에서 가장 새롭거나 이상한 내용을 제목으로 삼는다. 아마도 언론은 북에서 '삶은 소대가리' 소리를 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여전히 부르는 '애북가(愛北歌)'의 상상 초월 비대칭성이 뉴스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뉴스 제목은 어젠다를 설정하는 기능이 있다. 이런 언론의 속성을 잘 아는 청와대는 신년사라는 '유사 사건(pseudo event)'을 벌여 김정은 답방을 공론화했다. 의도했든 안 했든 언론은 김정은 답방 공론화에 앞장선 꼴이 되었다. 그동안 조국 사태와 공수처 설치 때 보여준 정부의 '솜씨'를 보면 곧이어 국민의 얼마가 김정은 답방에 찬성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근데 내 눈에 보이는 제목은 따로 있었다. 그건 대통령의 '민주공화국 선포'였다. 신년사는 앞머리에 '촛불을 들어 민주공화국을 지켜냈던 숭고한 정신'으로 시작해 마무리 부분에 무려 다섯 번이나 '민주공화국'을 쏟아내 모두 여섯 번이나 언급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횟수보다 두 배 많게 대통령은 '자유'를 부인했다. 지난해 각종 기념사에서는 자유를 띄엄띄엄 언급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올해 신년사에서는 마침내 전면적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에서 자유를 뗀 '민주공화국'으로 못 박았다.
'자유민주공화국'도 '민주공화국'의 한 종류인데 뭐가 대수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나라 목록을 보면 좀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북한, 에티오피아, 알제리, 네팔, 라오스, 동티모르, 스리랑카, 콩고 등이다. '자유'가 덧붙은 '자유민주공화국'으로는 아이슬란드, 핀란드, 독일,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등이 있다. 어떤 문헌은 위 두 그룹을 '민주공화국'의 나쁜 예와 좋은 예로 가르고 있다. 더 나아가 '자유민주주의'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시장의 자유가 허락되는 민주주의며,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란 다수에게 소수가 억압받는 민주주의라고 설명한다. 서유럽 국가는 대체로 제정에서 공화정으로, 또 자유민주공화정으로 진화하며 발전해 왔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자유민주공화국'으로 건국해 목하 정체불명의 '그냥 민주공화국'으로 역주행 중이다.
대한민국호(號)의 함장이 뱃머리를 미지의 세계로 돌리는 엄청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보수 야당은 각기 셈법이 다른 통합 논의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아무리 자기들 수준에서 흡족한 통합을 이룬다고 해도 국민이 외면하면 그만이라는 것을 왜 모를까. 통합은 정치인끼리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마음을 모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보수주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국가는 신성한 것이므로 결함이나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하듯' 경건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눈에 비친 급진 혁명 세력은 '부모 살해(parricide)를 하는 세력'이다. '존재하는 선을 인정하지 않고 악을 치유하려는 열정에 골몰해 기존의 선을 파괴하는 세력'이며, '말로는 인민을 권력의 원천이라고 부르짖지만 사실 미천한 인간을 경멸하며, 이기적 사고와 편협한 기질을 갖고 있는 세력'이다. 또한 '혁명이 추구하는 추상적 원리나 연역적 사유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인간의 본원적 사악함을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살아있는 구체적 인간을 등한시하는 세력'이다. '보수도 혁명을 인정하지만, 종교와 재산과 전통적 자유는 지키며 존중한다'는 게 그의 보수 철학이다.
만성적 철학 빈곤 증후군을 앓고 있는 이 땅의 보수 세력은 버크의 견해를 바탕으로 국민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그 세금을 북한의 김정은과 나눠 쓰고 싶으십니까?" "평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난해지는 것도 용인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가 명문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불완전한 자유 국가와 완전한 전체주의 국가 중 어느 쪽에서 자녀가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국가가 직업을 마련해주고, 월급은 노조가 결정하는 곳에서 자녀가 미래를 가꾸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기를 원하십니까?" "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살고 싶으십니까?" 보수 통합의 열쇠는 이 질문들의 답이 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