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출범 72년 만에 다시 1945~1948년의 해방 정국으로 돌아갔다. 해방 정국 3년 동안 남한 정세를 휘두르다시피 한 정파는 극좌 남노당(박헌영), 중간 좌파(여운형), 중간 우파(김규식)를 합친 반(反)대한민국 또는 비(非)대한민국 세력이었다. '가능한 지역에서나마' 대한민국을 세우자고 한 우파 민족진영(이승만 이범석 신익희 김성수)은 약세를 면치 못했다.
미군정(美軍政)마저 처음엔 이승만·김구를 멀리하고 김규식·여운형 합작을 기대했다. 유럽에서 미·소 냉전이 불붙고 나서야 미군정은 이승만을 대하기 시작했다. 우파의 또 한 축(軸) 김구는 그러나, 이 결정적 시기에 이승만 건국 노선에 등을 돌리고 평양의 통일전선 전술에 호응해 주었다. 한반도 우익 진영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분열이었다.
이 대목에서 가장 가소로웠던 것은 김구에 대한 극좌 계열의 얄팍하기 짝이 없는 태도 표변이었다. 김구가 이승만과 보조를 함께했을 때 그들은 김구도 이승만과 똑같은 '민족 반역자, 매국노, 반동분자'로 매도했다. 그들의 어린이용 세뇌 만화에서까지 김구는 '반동'이었다. 그러다 김구가 이승만과 헤어지고 안두희에게 저격당한 후로는, 남한 대중을 향한 선전·선동에서 그들은 김일성에 앞서 김구를 내세웠다. 대한민국을 조각내는 데는 김구 같은 우파 민족주의의 이반(離叛)을 끌어내는 게 가장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고 본 것이다. 이 전술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깨는 유효한 메뉴로 작동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에 한국 변혁 운동의 고삐를 잡은 이른바 NL(민족 해방) 운동꾼들도 이 민족주의 활용 수법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아왔다. 그들만의 은밀한 자리에서 그들은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을 입에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대외적으론 그들은 민족 자주, 민족 공조, 우리 민족끼리 운운하며, 자기들은 좌익 혁명론자 아닌 민족주의자인 것처럼 시늉해 왔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김구를 내세운다. 각종 연설문에서도 국회 청문회 답변에서도 자기들은 김구에게 줄 선 듯 말한다. 속이 빤히 들여다뵈는 소리다. 이승만 건국과 박정희 산업화에 X물을 끼얹고, 백선엽 영웅상과 안익태 애국가를 모욕하고, 이들의 묘를 국립현충원에서 파내는 데는 김구·김원봉을 앞세워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조리 '토착 왜구' 짓으로 낙인찍는 게 그들에겐 최선의 방책이었던 것이다.
이런 과도기 위장 전술마저 요즘엔 노골적인 발톱 드러내기로 바뀌었다. 그들은 누가 자기들의 민낯을 드러내려 하면 "너 지금 색깔 공세 하는 거냐?"며 길길이 뛰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그들은 이젠 "그래 우리 그렇다. 어쩔래?" 하며 커밍아웃을 시작했다. 보수는 궤멸시켜야 할 숙청 대상, 자기들은 혁명의 주력군이라며 알통을 드러낸다. 이게 지난 4·15 총선 이후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혁명 전야를 지나 혁명 완결 단계로 질주하는 기세다.
이 추세 속에서 범(汎)대한민국 진영에 속하는 국민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어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 잡기 시작했다. 일차적으론 생활인으로서 경제적 각성이 왔다. 그들은 정권의 사유재산 침해 부동산 정책에서 자신들의 성실한 행복추구권이 어떻게 박살 났는지를 체감했다. 이어서 정치적 각성이 왔다. 운동꾼들의 애국가 폐기 저의에서 그들은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를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전율했다. 위기의식과 배신감이 치솟았다. 시국의 피해자들은 신발을 던지며 "나라가 네 거냐?"고 항의했다. 민심이 바뀌었다.
이 싸움이 어떻게 귀결될지는 피해 국민이 계속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렸다. 그들은 묻는다. "지금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서울 최후의 날이라도 보겠다는 것이냐?"고. 사실이라면 오늘의 한국을 이룩하는 데 친일파와 무관하게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한국인들이 "애국가 살리기냐, 죽이기냐?"의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현해탄에 빠지느냐 인천 상륙이냐의 선택이다. 이 싸움은 직업적 혁명꾼들이 그들의 이념에 따라 도발한 것이다. 다른 누구에게, 다른 무엇에 뒤집어씌우기는 안 된다.
미군정(美軍政)마저 처음엔 이승만·김구를 멀리하고 김규식·여운형 합작을 기대했다. 유럽에서 미·소 냉전이 불붙고 나서야 미군정은 이승만을 대하기 시작했다. 우파의 또 한 축(軸) 김구는 그러나, 이 결정적 시기에 이승만 건국 노선에 등을 돌리고 평양의 통일전선 전술에 호응해 주었다. 한반도 우익 진영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분열이었다.
이 대목에서 가장 가소로웠던 것은 김구에 대한 극좌 계열의 얄팍하기 짝이 없는 태도 표변이었다. 김구가 이승만과 보조를 함께했을 때 그들은 김구도 이승만과 똑같은 '민족 반역자, 매국노, 반동분자'로 매도했다. 그들의 어린이용 세뇌 만화에서까지 김구는 '반동'이었다. 그러다 김구가 이승만과 헤어지고 안두희에게 저격당한 후로는, 남한 대중을 향한 선전·선동에서 그들은 김일성에 앞서 김구를 내세웠다. 대한민국을 조각내는 데는 김구 같은 우파 민족주의의 이반(離叛)을 끌어내는 게 가장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고 본 것이다. 이 전술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깨는 유효한 메뉴로 작동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에 한국 변혁 운동의 고삐를 잡은 이른바 NL(민족 해방) 운동꾼들도 이 민족주의 활용 수법으로 짭짤한 재미를 보아왔다. 그들만의 은밀한 자리에서 그들은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을 입에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대외적으론 그들은 민족 자주, 민족 공조, 우리 민족끼리 운운하며, 자기들은 좌익 혁명론자 아닌 민족주의자인 것처럼 시늉해 왔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김구를 내세운다. 각종 연설문에서도 국회 청문회 답변에서도 자기들은 김구에게 줄 선 듯 말한다. 속이 빤히 들여다뵈는 소리다. 이승만 건국과 박정희 산업화에 X물을 끼얹고, 백선엽 영웅상과 안익태 애국가를 모욕하고, 이들의 묘를 국립현충원에서 파내는 데는 김구·김원봉을 앞세워 대한민국 현대사를 모조리 '토착 왜구' 짓으로 낙인찍는 게 그들에겐 최선의 방책이었던 것이다.
이런 과도기 위장 전술마저 요즘엔 노골적인 발톱 드러내기로 바뀌었다. 그들은 누가 자기들의 민낯을 드러내려 하면 "너 지금 색깔 공세 하는 거냐?"며 길길이 뛰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그들은 이젠 "그래 우리 그렇다. 어쩔래?" 하며 커밍아웃을 시작했다. 보수는 궤멸시켜야 할 숙청 대상, 자기들은 혁명의 주력군이라며 알통을 드러낸다. 이게 지난 4·15 총선 이후의 대한민국 현실이다. 혁명 전야를 지나 혁명 완결 단계로 질주하는 기세다.
이 추세 속에서 범(汎)대한민국 진영에 속하는 국민은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어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 잡기 시작했다. 일차적으론 생활인으로서 경제적 각성이 왔다. 그들은 정권의 사유재산 침해 부동산 정책에서 자신들의 성실한 행복추구권이 어떻게 박살 났는지를 체감했다. 이어서 정치적 각성이 왔다. 운동꾼들의 애국가 폐기 저의에서 그들은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를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전율했다. 위기의식과 배신감이 치솟았다. 시국의 피해자들은 신발을 던지며 "나라가 네 거냐?"고 항의했다. 민심이 바뀌었다.
이 싸움이 어떻게 귀결될지는 피해 국민이 계속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렸다. 그들은 묻는다. "지금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서울 최후의 날이라도 보겠다는 것이냐?"고. 사실이라면 오늘의 한국을 이룩하는 데 친일파와 무관하게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한국인들이 "애국가 살리기냐, 죽이기냐?"의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현해탄에 빠지느냐 인천 상륙이냐의 선택이다. 이 싸움은 직업적 혁명꾼들이 그들의 이념에 따라 도발한 것이다. 다른 누구에게, 다른 무엇에 뒤집어씌우기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