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대한민국 수호]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의 뒤틀린 역사관
2021.07.13 14:13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의 뒤틀린 역사관
소련, 북에 우호적 공산정권 세운다는
치밀한 전략·목표 전체주의 압제 서막 열어
미국은 자유민주 정부 수립외엔 뚜렷한 목표·정책 없어
이승만 혜안과 미 도움으로 한반도 전체 공산화 막아
[천영우,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의 뒤틀린 역사관" 조선일보, 2021. 7. 9, A26쪽;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전 외교안보수석.]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한민국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일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고향 안동에 가서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과 달라, 친일 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가 이러한 왜곡된 역사관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충격적이다.
팩트 체크부터 해보자. 군대가 적국 영토를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해 진주하고 주둔하는 행위를 군사적 용어로 ‘점령’(military occupation)이라고 부른다. 미국과 소련 처지에서는 한반도를 ‘점령’한 것이 맞는다. 35만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려면 점령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재명 지사가 군사적 의미에서 ‘점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정치적 저의를 갖고 ‘해방군’과 차별되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면 문제다.
‘해방’은 정치적 용어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이론을 신봉하고 선전 선동의 귀재인 소련은 점령군을 스스로 ‘해방군’이라 칭하며, 중국은 군대의 정식 명칭을 ‘인민해방군’(PLA)이라 한다. 우리 민족에게 미·소 양국의 점령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일본 식민 통치의 실효적 종식과 해방이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의 점령 목적은 전혀 다르다. 소련군의 북한 점령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넘어 소련에 우호적인 공산 정권을 한반도에 세운다는 분명한 목표와 치밀한 전략에 따라 기민하게 이루어졌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자탄이 투하되자 소련은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것을 직감하고 8월 8일 재빨리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불과 사흘 후인 8월 11일 치스탸코프 대장 휘하의 소련군 제25군은 두만강을 넘어 북한에 진입했다. 북한을 점령하자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 전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일사불란하게 소비에트식 사회 질서와 공산 정권 수립에 착수했다. 해방을 환호하던 북한 주민에게는 소련의 점령이 일본의 식민 통치보다 더 가혹한 전체주의 압제의 서막이었다.
미국은 소련군이 전광석화처럼 북한에 진입하는 것을 보고서야 한반도 전체가 소련에 넘어갈 가능성을 우려하고 8월 14일 졸속으로 38선을 미·소 간 점령지 경계로 설정하고 이를 소련에 통보했다. 소련이 이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우리에게는 38선 이남에서라도 자유민주 국가를 세울 희망을 살린 천운이었다. 독일과 벌인 전쟁에서 870만 병력을 잃고도 독일 영토의 3분의 1밖에 차지하지 못한 스탈린이 일본 패망에 기여한 것도 없이 한반도의 절반을 차지한 데 만족하고 미국과 충돌을 피하려고 한 것 같다. 미국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함께 자유선거를 통해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하루속히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것 외에는 뚜렷한 목표도 정책도 없었다.
그렇다면 친일 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 체제를 유지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을까? 소련군이 북한을 완전히 점령한 후 9월 8일이 되어서야 인천에 상륙한 미군에게는 점령 지역 내의 치안 유지와 군정 체제 수립이 가장 절박한 과제였다. 미 군정 책임자인 하지(Hodge) 사령관이 이를 위해 일제강점기의 경찰과 관리들을 대거 채용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하지 사령관의 한국 역사와 정서에 대한 무지가 빚은 참사임은 분명하나, 이 실무 관리들이 군정청의 정책을 결정할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군정의 실무 인력을 승계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를 두고 친일 정부라고 매도하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정부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정책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3부 요인은 모두 항일 독립 투사 출신이었다. 평생을 항일 독립 투쟁에 헌신한 이승만 대통령은 뼛속까지 반일이었지만, 일제시대에 양성된 인재를 모두 적폐 세력으로 몰아 국가 건설에 기여할 기회를 박탈했다면 1960년대 이후 경제 발전이 가능했을까?
해방 정국에 국가 지도자들이 요구받는 중심적 과제는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는 것이었다. 38선 이남에서라도 자유민주 정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소련 공산당과 김일성의 흉계를 간파한 이승만의 혜안과 리더십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때 단독정부를 세운 탓에 적화 통일 기회를 놓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고, 그 2년 후에는 북한의 남침을 격퇴하여 또 한번 적화 통일 시도를 저지한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을 얼마나 더 증오해야 반(反)대한민국 세력이 원한과 분노를 풀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