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대한민국 보수] ‘민주 대 반민주’ 아니라 ‘진실 대 탈진실’이다
2022.06.02 11:29
‘민주 대 반민주’ 아니라 ‘진실 대 탈진실’이다
말의 의미 뒤틀어 사실 바꾸려 했던 문 정부, 대선 패배로 귀결
민주·반민주 구도였던 87년 체제는 끝나… 진실 지키는 게 시대정신
[김영수, "‘민주 대 반민주’ 아니라 ‘진실 대 탈진실’이다," 조선일보, 2022. 5. 30, A34쪽.]
나라가 망하기 전에 말[言]이 먼저 망한다고 한다. 진(秦) 제국도 그런 사례이다.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은 불과 16년 만에 망했다. 황제 외의 누구도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는 법가의 정치관이 문제였다. 생각을 담은 책을 불사르고, 말 많은 지식인을 생매장(분서갱유)했다. 환관 조고가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는 2세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며 말[指鹿爲馬]이라고 했다. 사슴이라고 말한 신하들은 혹독한 댓가를 치렀다.
말이 망하는 것도 단계가 있다. 진시황은 단지 생각과 말을 막았을 뿐이다. 그런데 조고는 사실 자체를 바꾸었다. 푸코는 말을 사회의 기본 규범으로 본다. 즉, 말의 의미가 파괴되면 국가는 이미 안에서 무너진다. 무언가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바로 오늘날 한국 정치에 만연한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 때 그 문이 활짝 열렸다.
문 정부가 전체주의였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과 거짓이 모호해졌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이 “젊고, 매우 솔직하며, 공손하고, 웃어른을 공경한다”고 호평했다. “진실되고 경제개발을 위해 핵무기를 포기할 것으로 믿는다”고도 했다. 한국형 원전은 비싸고 위험한 흉물이며, 태양광이 대안이라고 말했다, 소득주도성장이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을 이룬다고 했다.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은 의미를 상실했다.
압권은 조국 사태이다. 금년 1월 대법원은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에 대한 혐의를 유죄로 판결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조국 전 장관은 사법개혁의 십자가를 진 메시아이며, 그 가족은 고난받는 신성가족이다. 얼마 전 조국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그대가 조국’이 방영되었다. 조국 전 장관은 “수사와 기소·재판을 통해 확인되었다고 하는 법률적 진실 뒤에 가려져 있고 숨겨져 있던, 나아가 왜곡돼 있던 진실들이 복구”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회찬, 안희정, 박원순은 순진했다. “죽을 죄를 지었다”며 얼굴을 가린 최순실 씨도 그렇다. 조 전 장관이 이렇게 당당한 이유는 “당시 사태에 대해서 다른 시각들이 있었고 다른 경험, 다른 증언이 있었음을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유시민 작가도 그렇게 생각했다. 진중권 전 교수는 그에게 동양대 표창장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러자 유 작가는 바로 “‘대안적 사실’을 제작하여 현실에 등록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사실이 된다”고 하며, 오히려 진 교수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조고의 수법이다. 그러나 최신식이다. 그 철학적 근거가 포스트모더니즘이며, 그 수단이 소셜미디어고, 그 정치가 팬덤정치이다. 이른바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의 전형적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 객관적 진리를 철학이 만들어 낸 허구로 본다. 모두 대안적 사실일 뿐이다. 탈진실의 태도이다. 철학이나 과학이 아닌 정치와 사회에 이 관점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사회적 상식은 물론 사법부의 판결조차 뿌리를 상실한다. 플라톤이 소피스트를 아테네의 정신적 파괴자로 여긴 것은 이 때문이었다.
탈진실 시대의 핵심 질문은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지, 처음부터 현실 자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탈진실의 상황은 소셜미디어의 확산과 함께 2000년대 초부터 폭풍같이 등장했다. 소셜미디어에 집결한 진영의 창고(silo)에 갇혀 정치를 종교적 광신으로 바꾼 게 팬덤이다.
한국정치에서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정치는 지난 대선에서 본격 개막되었다. 대장동 사건 혐의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씨가 여당 후보가 되었다. 진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대결한 윤석열 후보는 조국 사태와 정면 대결하면서 급부상했다. 정치 참여 8개월 만에 이겼다.
87년 체제는 끝났다. 이번 대선의 시대적 의미이다. 87년 체제의 프레임은 ‘민주 대 반민주’였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진실 대 탈진실’의 싸움이었다. 문 전 대통령과 민주당은 탈진실의 정치공간을 선점하고 한국정치를 지배했으나, 사실에 기초한 검찰의 법치주의에 막히고, 국민의 선택에 꺾였다. 그게 조국 사태의 원인이고, 대선에 진 이유이며, 검수완박 사태의 본질이다. 박지현 위원장은 그런 사실을 경고한 것이다.
한국정치의 시대적 어젠다가 탈진실의 문제로 변했다. 오웰은 빅 브라더를 우려했다. 하지만 지금 민주주의의 적은 팬덤이다. “전체주의 지배가 노리는 가장 이상적인 대상은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사실과 허구 혹은 참과 거짓을 더 이상 분간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이다.”(H. Arendt) 이제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며, 지성이 무기이다. 세계관이 시대적 과제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은 새로운 1948년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