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신봉한 영국의 엘리트들처럼
2016.12.06 16:16
공산주의 신봉한 영국의 엘리트들처럼
[강규형, “공산주의 신봉한 영국의 엘리트들처럼,” 조선일보, 2016. 11. 2, A34; 명지대 교수․현대사.]
지난해 인기를 끈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실화에 기반한 걸작이었다. 독일의 정교한 암호 체계인 '에니그마'를 깨기 위해 영국 정보국은 암호 해독 팀을 구성했고, 앨런 튜링 박사가 중심이 된 이 팀은 결국 그 목적을 이뤘다. 이로써 영국은 독일의 교신과 작전을 손바닥 보듯 파악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유럽 전선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앞당겨 적어도 수백만명의 생명을 구했으며, 전쟁의 결과를 바꾸는 데도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영화에서 튜링을 도우는 영국 정보국 정예 요원 중에 '존'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존 케인크로스(Cairncross)란 실존 인물로서 영국 정보국에 있는 일급 소련 스파이였다. 당시 영국 정보국에 국내를 담당하는 MI5나 국외를 담당하는 MI6나 소련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들이 우글우글했다. 이 중 최고위급까지 올라간 스파이 일당을 역사는 케임브리지 파이브(Cambridge Five)라 부른다. 전부 엘리트로서 최고 명문 대학인 케임브리지대를 나왔기에 부쳐진 이름이다. 케인크로스는 그 다섯 번째 멤버였다. 영화에서 이 다섯 명의 이름이 다 거론되지만 관객들은 그 의미를 모르고 그냥 넘어가 버렸다.
영화에서 돈 매클린으로 거명되는 도널드 매클린(McLean)이란 인물은 특히 한국에 치명적 타격을 입힌 사람이기에 나의 귀에 더욱 크게 들렸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과 직후에 영국 정보국 미국지부장을 지낸 사람으로 미국과 영국 사이에 기밀을 교환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그에게 들어간 중요한 기밀이 스탈린에게 고스란히 배달됐다. 그중 하나는 한반도가 유사시 방어선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NSC-48이었고, 이 기밀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기쁜 마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남침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6․25전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스탈린의 기대와는 달리 UN을 통해 대한민국의 방어에 나섰다. 그 사이 미국 외교 브레인의 교체가 있었고 NSC-48의 약점을 간파한 폴 니체(Nitze)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은 미국 외교의 근간을 바꾸는 NSC-68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미국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건 공산 세력의 확장을 막지 않으면 심리전에서 밀려서 결국 세계의 공산화가 이루어질지 모른다며 적극적인 방어와 국방 예산의 대폭 증가를 요청했다. 이 와중에 터진 6․25전쟁은 NSC-68의 자동적인 승인을 가져왔고 미국의 남한 방어가 이뤄졌다.
케임브리지 5의 수장은 스파이 역사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킴 필비(Philby)였다. 명문가 출신의 그는 MI6의 방첩국장으로 스파이 그룹을 총괄하면서 중대 기밀을 소련에 넘겼다. 기밀이 새나가는 것을 간파한 영국 정부가 방첩망(counter-intelligence)을 가동하자 필비와 매클린은 각각 다른 시기에 소련으로 탈출했고, 소련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반면 케인크로스는 체포돼 반역죄로 오랜 징역형을 살았다.
이들은 소련에 가본 적도 없고 소련과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조국인 영국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소련을 마음의 조국으로 삼아 공산전체주의에 부역을 했을까. 바로 대학 시절 당시 영국을 풍미한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 인류 역사는 특정한 단계를 밟을 수밖에 없고 그 종착역은 공산사회라는 역사관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한다는 착각을 가지고 소련의 스파이가 돼 반역 행위를 했다. 필비는 소련에서 1988년 사망했다. 소련 정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사실 필비는 몇 년을 더 살아야 했다. 그래서 1989~90년에 동구 공산권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꿈'이 헛된 것이었음을 자각했어야 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가 NL(민족해방)파니 PD(민중민주주의)파니 하는 여러 자생적인 공산 이론이 대학가를 장악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전통적인 역사관과 사회관을 부정하는 수많은 좌익 사상과 역사관이 우리 마음을 장악했다. 결국 우리 사회는 수많은 한국판 킴 필비들이 각 분야에서 기성세대로 활동하는 장이 된 느낌이 있다. 특히 이 논쟁에서 승리한 NL파는 정치권은 물론이고 사회 각 분야에 진지를 구축했고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꼭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존재하는 우리 안의 NL 심리가 더 무서운 것이다. 한반도 통일을 앞둔 이 시점에 한국 사회가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큰 장애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 벌어지는 역사관 논쟁도 결국 이런 진지(陣地)전의 한 형태인데 워낙 NL 진지가 견고하기에 걱정이 앞선다.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