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핵무기로 조국통일 완수” 계획
2007.05.16 10:02
[김대호, “김정일, 핵무기로 조국통일 완수 계획,” 미래한국, 2006. 10. 21, 8쪽; 전 북한 남천화학연합기업소 산하 핵폐기물 처리회사 부사장.]
북한은 1962년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해 핵개발 연구를 시작, 80년대부터 본격적 핵개발에 나서게 된다.
본인이 1984년 10월 군복무를 하고 있던 그때, 김정일은 전방 1, 2, 5군단의 훈련된 사관들을 모집해 ‘핵개발’ 부대(131지도국)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당시 차출된 2개 연대에 포함됐다. 황해북도 평산 지방에서 우라늄 생산 공장 건설에 참여했다. 1개 연대는 우라늄 광산을 개발 확장했고, 다른 연대는 우라늄 생산 공장을 건설했다. 당시엔 핵개발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85년 8월 제대 후 민간인 신분으로 영변 핵단지에 배치됐다. 당시 제대한 300여 명 중 200여 명은 핵연료봉 생산 공장으로 배치되고 107명은 우라늄생산 공장으로 배치됐다. 나는 107명에 속해 우라늄 폐수처리공장으로 갔다. 이곳 우라늄 생산 공장 내 기동예술선전대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했다.
그 때 했던 작품 중 하나가 ‘핵으로 조국통일의 대문을 열자’라는 작품인데 합창 시였다. 당시 김일성이 “북한의 핵개발에서 가장 큰 성과가 우라늄 농축기를 주체화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비밀문서에는 우라늄 농축기를 주체화해야 한다는 교시도 있었다. 나는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과 의도를 선별해 거기에 맞는 작품을 써야 했기 때문에 핵개발에 관한 당 위원 비밀문서를 볼 수 있었다.
김일성 얘기 중에는 “나에게는 세 가지 소원이 있다. 인민생활 향상, 조국통일, 핵개발 완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거기에 김정일은 “수령님 대에 핵개발을 완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의 단호한 결심이다. 강대국에 맞서는 핵무기 개발이 중요하다. 우리는 핵개발에서 조국통일을 시작하고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고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지시들을 인용해 작품을 썼다.
나는 89년에 부직장장으로 승진했다. 맡은 일은 우라늄을 추출해 내고 남은 폐기물에서 니켈, 라듐 등을 추출해 내는 것이었다. 89년에 김일성과 김정일은 핵개발에서 큰 성과를 이뤘다고 상당히 만족했다. 그때 원자력공업부 산하 간부 강연회가 있는데 “핵물질을 개발 성공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은 상당히 만족했다. 우리가 큰 기쁨을 드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연구사들 얘기로는 핵물질이 ‘히로시마 원폭’ 정도라 했다.
평양에 있는 101연구소에서는 마침내 핵폭탄 관련 뇌관 시험에 성공한다. 핵분열은 3만℃ 이상에서 일어나는데 이 실험 성공으로 3만℃ 이하 저온 핵분열 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영변 핵단지에서 핵 연료봉에 의해서 원자로가 처음 가동된 게 86년이다. 87년 영변 핵단지에서 핵실험을 하다가 방사선에 의해 노출된 사고가 발생해 사람들이 평양 남산진료소로 실려간 일이 있었다. 그들 모두 식물인간이 됐다. 원자로를 가동하면서 재처리 실험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북한에는 ‘710호’라는 핵개발 자금부서가 있다. 북한은 핵 기술자들을 끌어오기 위해 러시아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구소련의 붕괴로 실업자가 된 200여 명의 핵 기술자들을 거액의 돈으로 대거 초청하면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원자력공업부에서 러시아인들을 지나친 적도 있다. 이들에게 총리급 주택을 내 주는 등 최고 대우를 해줬다.
지나친 투자와 경제악화가 맞물려 710호 자금이 바닥났다. 그때 김정일이 외화를 벌라고 지시를 한 것이다. 그래서 외화벌이 상무로 파견됐다. 모든 당 행정, 기관, 기업소에서 710호 사업을 적극 도와주라는 김정일 친필 지시문이 있었다. 외화벌이를 하다보면 밀수도 하게 되는데 그때 관여한 것이 러시아 마피아 조직을 통해 들어온 ‘붉은 수은’이었다. 묶음에 3만 달러했는데 플루토늄을 축출하는 최종 단계에서 쓰는 촉매제였다.
당시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둘러싸고 92년 5월의 IAEA의 사찰로 북한이 영변의 원자력 연구시설 가운데에 핵연료저장 시설과 재처리 시설의 사찰을 거부하고 그 후에도 필사 거부하였으므로 미·북 간 초긴장 관계가 조성됐다. 이것이 94년의 북핵 위기다.
김일성은 평양시 용성구역에 위치한 ‘지하 전시사령부’에서 김정일, 전병호 군수산업담당비서, 최학건 원자력공업부장, 강경준 공업총국장(영변핵단지 행정책임자), 3공병국(핵개발부대) 등으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했다.
이들은 이 회의에서 영변 지하 핵저장고에 극비로 보관된 폐연료봉이 국제사찰단 감사에 잡히지 않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방사선을 차단할 납판으로 비밀저장고를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문제는 지하 핵시설을 다 덮으려면 엄청난 양의 납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핵사찰을 앞두고 화학공장에 보관하던 납판 전량을 연변 핵단지로 보내라는 긴급지시를 내리고, 60톤 급 수송열차에 납판을 실어 보내는 작업을 위해 총동원령을 내렸다.
핵탄두용 기폭장치개발 실험장을 흙으로 메우고 녹지를 조성해 위성 사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발뺌하기로 했다. 영변 핵단지를 방문한 IAEA사찰단은 방사선 측정기로 무기급 플루토늄과 비밀처리시설들을 찾았지만 별 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한국 입국 당시 정보부에서는 기자회견 시 신분을 밝히지 말고 핵문제에 대해 일체 말하지 못하게 했다. 안기부를 따돌리고 기자들을 불러서 기자회견을 한 적도 있는데 강연을 마치고 정보기관에 불려가 ‘내가 사회를 혼란시킬 목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다시 그럴 시에는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게 했다. KBS의 ‘남북의 창’에도 출연했는데 핵무기 얘기는 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다.
정부에서 나에게 압력 행사하는 동안 북한은 미국까지 도달하는 미사일을 보유했다.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국제사회에 협박하고 핵실험을 공공연히 공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북한은 1962년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해 핵개발 연구를 시작, 80년대부터 본격적 핵개발에 나서게 된다.
본인이 1984년 10월 군복무를 하고 있던 그때, 김정일은 전방 1, 2, 5군단의 훈련된 사관들을 모집해 ‘핵개발’ 부대(131지도국)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당시 차출된 2개 연대에 포함됐다. 황해북도 평산 지방에서 우라늄 생산 공장 건설에 참여했다. 1개 연대는 우라늄 광산을 개발 확장했고, 다른 연대는 우라늄 생산 공장을 건설했다. 당시엔 핵개발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85년 8월 제대 후 민간인 신분으로 영변 핵단지에 배치됐다. 당시 제대한 300여 명 중 200여 명은 핵연료봉 생산 공장으로 배치되고 107명은 우라늄생산 공장으로 배치됐다. 나는 107명에 속해 우라늄 폐수처리공장으로 갔다. 이곳 우라늄 생산 공장 내 기동예술선전대에서 작가 겸 연출가로 활동했다.
그 때 했던 작품 중 하나가 ‘핵으로 조국통일의 대문을 열자’라는 작품인데 합창 시였다. 당시 김일성이 “북한의 핵개발에서 가장 큰 성과가 우라늄 농축기를 주체화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비밀문서에는 우라늄 농축기를 주체화해야 한다는 교시도 있었다. 나는 김일성, 김정일의 사상과 의도를 선별해 거기에 맞는 작품을 써야 했기 때문에 핵개발에 관한 당 위원 비밀문서를 볼 수 있었다.
김일성 얘기 중에는 “나에게는 세 가지 소원이 있다. 인민생활 향상, 조국통일, 핵개발 완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거기에 김정일은 “수령님 대에 핵개발을 완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의 단호한 결심이다. 강대국에 맞서는 핵무기 개발이 중요하다. 우리는 핵개발에서 조국통일을 시작하고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고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지시들을 인용해 작품을 썼다.
나는 89년에 부직장장으로 승진했다. 맡은 일은 우라늄을 추출해 내고 남은 폐기물에서 니켈, 라듐 등을 추출해 내는 것이었다. 89년에 김일성과 김정일은 핵개발에서 큰 성과를 이뤘다고 상당히 만족했다. 그때 원자력공업부 산하 간부 강연회가 있는데 “핵물질을 개발 성공하여 김일성과 김정일은 상당히 만족했다. 우리가 큰 기쁨을 드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연구사들 얘기로는 핵물질이 ‘히로시마 원폭’ 정도라 했다.
평양에 있는 101연구소에서는 마침내 핵폭탄 관련 뇌관 시험에 성공한다. 핵분열은 3만℃ 이상에서 일어나는데 이 실험 성공으로 3만℃ 이하 저온 핵분열 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영변 핵단지에서 핵 연료봉에 의해서 원자로가 처음 가동된 게 86년이다. 87년 영변 핵단지에서 핵실험을 하다가 방사선에 의해 노출된 사고가 발생해 사람들이 평양 남산진료소로 실려간 일이 있었다. 그들 모두 식물인간이 됐다. 원자로를 가동하면서 재처리 실험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다.
북한에는 ‘710호’라는 핵개발 자금부서가 있다. 북한은 핵 기술자들을 끌어오기 위해 러시아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구소련의 붕괴로 실업자가 된 200여 명의 핵 기술자들을 거액의 돈으로 대거 초청하면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원자력공업부에서 러시아인들을 지나친 적도 있다. 이들에게 총리급 주택을 내 주는 등 최고 대우를 해줬다.
지나친 투자와 경제악화가 맞물려 710호 자금이 바닥났다. 그때 김정일이 외화를 벌라고 지시를 한 것이다. 그래서 외화벌이 상무로 파견됐다. 모든 당 행정, 기관, 기업소에서 710호 사업을 적극 도와주라는 김정일 친필 지시문이 있었다. 외화벌이를 하다보면 밀수도 하게 되는데 그때 관여한 것이 러시아 마피아 조직을 통해 들어온 ‘붉은 수은’이었다. 묶음에 3만 달러했는데 플루토늄을 축출하는 최종 단계에서 쓰는 촉매제였다.
당시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둘러싸고 92년 5월의 IAEA의 사찰로 북한이 영변의 원자력 연구시설 가운데에 핵연료저장 시설과 재처리 시설의 사찰을 거부하고 그 후에도 필사 거부하였으므로 미·북 간 초긴장 관계가 조성됐다. 이것이 94년의 북핵 위기다.
김일성은 평양시 용성구역에 위치한 ‘지하 전시사령부’에서 김정일, 전병호 군수산업담당비서, 최학건 원자력공업부장, 강경준 공업총국장(영변핵단지 행정책임자), 3공병국(핵개발부대) 등으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했다.
이들은 이 회의에서 영변 지하 핵저장고에 극비로 보관된 폐연료봉이 국제사찰단 감사에 잡히지 않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방사선을 차단할 납판으로 비밀저장고를 덮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문제는 지하 핵시설을 다 덮으려면 엄청난 양의 납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핵사찰을 앞두고 화학공장에 보관하던 납판 전량을 연변 핵단지로 보내라는 긴급지시를 내리고, 60톤 급 수송열차에 납판을 실어 보내는 작업을 위해 총동원령을 내렸다.
핵탄두용 기폭장치개발 실험장을 흙으로 메우고 녹지를 조성해 위성 사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발뺌하기로 했다. 영변 핵단지를 방문한 IAEA사찰단은 방사선 측정기로 무기급 플루토늄과 비밀처리시설들을 찾았지만 별 다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한국 입국 당시 정보부에서는 기자회견 시 신분을 밝히지 말고 핵문제에 대해 일체 말하지 못하게 했다. 안기부를 따돌리고 기자들을 불러서 기자회견을 한 적도 있는데 강연을 마치고 정보기관에 불려가 ‘내가 사회를 혼란시킬 목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다시 그럴 시에는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게 했다. KBS의 ‘남북의 창’에도 출연했는데 핵무기 얘기는 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다.
정부에서 나에게 압력 행사하는 동안 북한은 미국까지 도달하는 미사일을 보유했다. 북한은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국제사회에 협박하고 핵실험을 공공연히 공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