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도박은 성공했다. 세계를 흔든 '트럼프·김정은 설전(舌戰)'의 승자는 단연 김정은이다. 광포(狂暴)한 북한식 레토릭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버무려 존재감을 입증했다. 최강국 미국에 맞선 '핵무장국 북한'을 미국 대통령이 선전해 준 꼴이다. 미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이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 발언을 주워담는 현실이 트럼프의 실착(失着)을 증명한다.
'(북한과) 전쟁으로 수천명이 죽어도 거기서 죽는 것'이라는 트럼프의 말은 틀렸다. 한반도 전면전은 남북 공멸로 그치지 않는다. 세계 핵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공포의 균형'이 지배하는 핵전쟁의 논리와 국제정치 역학상 제2의 6·25는 구조적으로 억제되고 있다. 따라서 대북 선제공격론은 위험천만한 군사적 모험주의다. 선제공격은 북한에 핵이 없던 1993년 1차 북핵 위기 때도 배제된 옵션이었다.
상호 확증 파괴가 작동하는 핵무장국 간 전면전은 불가능하다. 북한은 ICBM에 이어 다탄두 ICBM, 수소폭탄, 중성자탄 개발까지 질주할 것이다. 결국 미·북 대화는 불가피하다. "북한과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틸러슨 국무장관과 매티스 국방장관의 월스트리트저널 공동 기고문(8월 13일자)은 시작일 뿐이다. 김정은이 '괌 포위 사격'을 유예하자(8월 14일) 트럼프는 '김정은이 현명하고 논리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화답했다(8월 16일).
미·북 협상의 궁극적인 종착지는 평화협정일 것이다. 트럼프 임기 안에 '트럼프·김정은 햄버거 정상회담'이 전격 성사된다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북핵 폐기 대신 북핵 동결 상태에서 정전 체제가 평화 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는 게 치명적 문제다. 그 경우 한반도 평화가 뿌리내리기는커녕 악몽이 시작된다. 핵무장 한 북한은 상시적으로 우리를 협박할 것이다.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이 배제되는 '코리아 패싱'이 영구화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한반도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힘도,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 한·미 정상회담, G20 정상회담과 북한 ICBM 발사가 교차한 직후인 7월 11일 국무회의 석상에서다.
정전 체제는 악이며 평화 체제는 선이라는 논리는 무지몽매한 이분법에 불과하다. 정전 체제든 평화 체제든 실질적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만약 평화협정이 불가피하다면 문서뿐인 가짜 평화를 넘어 진짜 평화를 위해 전력투구해야 한다. 국제 핵 규범을 준수하는 한국은 미국과 나토(NATO) 방식의 전술 핵무기 공유가 최선책이다. 독일·네덜란드·이탈리아 같은 서유럽 비핵국가가 150여기 전술 핵무기를 미군과 공유해 자국에 배치하고 있는 현실이 의미심장하다. 확장 핵 억지를 내세운 미국이 전술 핵무기 한반도 재배치를 거부한 채 미군까지 철수한다면 한국은 핵무장으로 내몰린다. '비상사태가 국가의 지상 이익(supreme interests)을 위협할 때 탈퇴 권리가 있다'는 NPT(핵확산금지조약) 10조 1항의 극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보다는 전술 핵무기 조건부 재배치가 훨씬 현명하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까지 한반도 평화를 지킬 유일한 방안이다.
문 대통령 다짐처럼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려면 북핵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라는 인식이 선행해야 한다. 평화는 결코 화려한 문서로 보장되지 않는다. 백척간두의 안보 위기를 기득권 세력의 '안보 장사'로 폄하하는 한국인의 '마음의 습관'처럼 위태로운 것도 드물다. 민주공화국 없이는 촛불 시민의 자유도 없다. 마키아벨리 말대로 '현실과 당위는 다르며, 조국은 수호되어야만 한다.' 하물며 그 조국이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일진대 두 말이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