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호 실험 성공을 바탕으로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김정은은 평화 공세와 함께 미·북 정상회담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미국과의 담판을 앞두고 김정은은 세(勢) 규합에 나섰다. 러시아·일본도 나설 채비다. 한반도의 핵 게임판에 강대국들이 속속 입장하고 있다.
북한은 국제 공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취약한 고리를 찾아 반격을 노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경제·무역 전쟁이 본격화하는 와중에 김정은이 중국을 전격 방문한 게 그 첫 번째 행보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대립할 경우 김정은은 자신이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챙겨 최후 승자(勝者)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중국에 소외감을 주거나 자극하는 남한·북한·미국 3자(者) 접근은 당분간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을 협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이른바 일본 패싱(passing)도 조심해야 한다. 일본은 북한 정권을 기사회생시켜줄 수 있는 카드, 즉 식민 지배 청구권 명목으로 100억달러 이상을 북한에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공조가 깨지면 비핵화는 휴짓조각이 될 것이다. 우리 정부는 북한에 쏟는 정성 못지않게 긴밀한 국제 공조 유지와 구축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북한이 평화 공세를 통해 한국 내에 '남·남(南·南)' 갈등을 부추기는 한편 '한·미(韓·美) 공조를 흔들고 있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 북한은 김정은을 비롯해 현송월·김여정·리설주 등 올스타를 총동원해 '핵 있는 친절한 같은 민족'임을 어필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을 이렇게 대화의 장(場)으로 이끌어낸 힘의 원천은 강력한 한·미 동맹이다.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 논리와 선전에 현혹돼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 시작 전부터 제재 완화를 시도하거나 일부 소수 사회단체의 주장대로 주한미군 철수·불필요론 등이 불거져 한·미 동맹에 균열이 생긴다면 비핵화는커녕 한반도 전쟁 발발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소한 정부 스스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거나 '핵 있는 평화'라는 선전 캠페인에 동참 또는 묵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가지 또 우려되는 것은 미국 조야(朝野)에서 '북한 핵 폐기는 불가능하며 미·북 정상회담에서 핵 확산 방지와 미국 본토 타격 역량 동결을 우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미·북 정상회담에서 미국 본토 타격 역량 동결에만 연연한다면 그것은 한·미와 미·일 동맹 해체의 신호탄이 될 것이며 중국이 가장 바라는 일일 것이다.
김정은은 이런 마당에 우리 특사에게 "핵이 남한을 겨냥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믿는 건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북한 핵은 대미용(對美用)이고 같은 민족인 우리에게 쓰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미국 본토를 겨냥한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만 도발로 여기고 유엔 제재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면서 정작 5000만 우리 국민을 겨냥한 중단거리 미사일 실험에는 항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아직 미국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재진입, 목표조준 등 ICBM의 핵심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을 겨냥한 미사일에는 그런 핵심 기술이 필요 없다. 북한은 이미 배치된 북한 미사일에 일부 핵탄두만 탑재하면 언제든지 남한에 핵 공격을 가할 수 있다.
정부는 따라서 미국 본토 공격용 ICBM보다 북한에 이미 배치된 1000여기의 각종 탄도미사일과 30여개의 핵탄두를 제거하는 데 역량을 쏟아야 한다. 정부가 미·북 간 중재 외교 에만 머무르지 말고 북핵 위협에 정면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묘한 기대감을 바탕으로 북한이 펼치는 가요무대식 교류와 수사에 현혹되지 말고 가면(假面) 뒤의 본질적 위협을 직시해야 한다.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억지력을 갖출 수 있을 때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이 없다면 어떠한 대북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