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가
2017.10.02 11:00
'촛불'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가
[윤평중, "'촛불'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가," 조선ㅇ일보, 2017. 9. 29, A30쪽' 한신대 교수, 정치철학.]
"시간은 북한 편이다."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가 10·4 남북 정상 선언 10주년 기념 강연에서 한 말이다. 정확한 진단이다. 북한은 미 본토를 때릴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갖기 직전이다. 핵무장 체계 완성이라는 북한 국가 대전략 실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미국의 화급한 무력시위 배경이다. 따라서 '빨리 협상을 해서 북한이 그 단계에 못 가게 해야 한다'고 문 특보는 주장한다. 10·4선언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 군사회담과 인도적 협력을 다시 제안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문 대통령은 "10·4 정상 선언이 이행돼 나갔다면 현재 한반도 평화 지형은 크게 변해 있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이명박·박근혜 10년,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존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이런 주장은 북핵 위기의 결정적 진실을 감춘다. 핵무장을 향한 북한의 필사적 국가 의지가 한반도 전쟁 위기의 근원임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모두 북 핵무장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 북핵 위기의 실체다.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조차 북한의 폭주를 저지하지 못했다. 한 국가가 모든 걸 포기하고 핵무장에 매진할 때 핵개발을 막기란 불가능하다는 국제정치학의 속설을 입증한다.
햇볕정책과 압박정책 둘 다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선행되어야 마땅하다. 진보·보수가 지금처럼 상대방만 탓하는 것은 자중지란에 불과하다. 북한발(發) 핵 참화에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절체절명의 국가적 과제다. 그러나 "10·4 합의 중 많은 것이 이행 가능하다"는 문 대통령은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겠느냐'는 핵심 질문에는 침묵한 채 특유의 선의(善意)와 당위론만을 반복한다. 남북의 사활적 체제 경쟁에서 최후의 뒤집기 한판승을 눈앞에 둔 김정은으로서는 코웃음 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촛불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는 없다. 힘과 주먹이 앞서는 국제정치의 폭풍 앞에 촛불을 들이미는 것은 국민 생명을 책임진 일국의 최고 지도자로서 너무 나이브하다. "북한이 핵무기를 검증 가능하게,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문 대통령 연설은 지당한 만큼 공허하다. 북핵 문제를 풀 수 있는 현실적 방법론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마키아벨리는 천하 대란 속 국가 간의 사투(死鬪)에서 현실과 당위는 다르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곱씹는다. 그리하여 그는 '당위에 매달려 현실을 소홀히 하는 나라는 자신의 보존보다 파멸을 훨씬 빠르게 배우게 된다'는 촌철살인의 경구를 남겼다.
조국 프랑스를 두 번이나 국망(國亡)에서 구한 드골(Charles de Gaulle·1890~1970)은 미·소 냉전이 야기한 핵전쟁 위기에 정면으로 대응했다. 1960년 드골은 미국의 집요한 방해와 소련의 협박을 돌파해 첫 핵실험에 성공한다. 1996년 공식 중단할 때까지 프랑스는 총 193회 핵실험을 단행하고, 우리가 죽으면 너희도 죽는다는 비례 억지 전략으로 핵 강국이 된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드골의 결단이 결정적이었다. 오늘날 프랑스가 국제무대에서 대접받는 것은 톨레랑스의 나라이자 문화예술 대국, 경제 대국이어서만은 아니다.
10·4 선언 강연에서 문정인 특보는 특기할 만한 말을 흘렸다. "북한 핵·미사일 능력이 강화되면 '남조선 적화통일 전선 전략'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천기누설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문 특보는 27일 한 토론회에서 "한·미 동맹이 깨지는 한이 있어도 전쟁은 안 된다"고까지 했다. 북의 전략은 이미 먹혀들고 있다. 여론이 쪼개지고 한·미 동맹이 균열하는 중이다. 프랑스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북한 핵 공갈 앞에 나라가 표류하고 있는데도 '자체 핵무장도 불가하고 전술핵 재배치도 안 된다'고 문 대통령이 못 박는 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국가는 결코 정의(正義)의 촛불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국가는 폭력과 정의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치욕스럽게든 영광스럽게든 조국은 방어되어야만 한다." 마키아벨리의 절규가 하늘을 찌른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8/201709280328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