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정부 체제라는 공통점을 갖는 공산주의 소련제국과 나치스 독일의 실패와 영미 국가의 케인즈주의적 정부의 한계를 예견했던 독일의 미제스(Mises), 오이켄(Eucken), 오스트리아의 하이에크(Hayek) 같은 선구적 사상가들이 과거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당연시했던 자유방임 원칙을 폐기하고 제시한 새로운 자유주의 사상, 즉 신자유주의 사상과 이론을 전개하면서 작은 정부론을 확산시켰다.
그들이 주장한 작은 정부론의 본질은 국민의 삶에 있어서 정부의 간섭과 개입을 최소화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데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방임을 당연시하고 제국주의 입장에서 전쟁 시대를 주도했다면, 자유방임을 반대하고 법치를 중시한 신자유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전쟁을 반대하고 국제적으로는 상호의존, 상호협력 원칙 하에 이뤄지는 자유교역(free-trade)만이 인류에게 번영과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강조했으며, 대내적으로는 법치가 존중되는 작은 정부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영미를 중심으로 한 고전적 자본주의 체제 모순을 직시했던 이들 선구적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친 국가들의 출신들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상가란 예외 없이 당대의 시대적 환경을 배경으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큰 정부가 초래하는 惡
신자유주의의 거두 하이에크의 스승이었으며 한때 관료였던 미제스(Mises, 1881-1973)는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20년대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참된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정부 개입과 간섭으로 시장 기능이 방해 받는 일이 없다. 교역 장벽은 없어지고 사람과 상품이 이동하는 데 아무런 장애도 없다. 국경은 오직 지도 위에서만 그어져 있을 뿐이다.(<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 허화평)”
이것은 전형적인 글로벌 시대 자유교역 논리다. 그는 ‘영구평화론’을 주창했던 칸트(Kant)의 후예답게 글로벌 시대 도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오늘날 유럽의 제1경제 강국은 독일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라인강 기적을 만들어낸 주역들은 뢰프케(Ropke, 1899-1977), 오이켄(Eucken, 1891-1950), 에르하르트(Erhard, 1897-1977)와 같은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자 전파자들이다. 특히 경제에 대한 정치권의 입김이 가장 나쁜 독소라고 했던 오이켄의 주장은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는 진정한 자유주의 정신을 압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책임 아래 자신의 삶을 건설하는 것이 참된 진보이며, 복지국가를 점차 축소시켜 가는 것이 진정한 진보이다.”
복지국가를 축소시켜 간다는 것은 복지 수혜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 하여금 일자리를 갖게 하는 정책을 통해 국민 스스로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는 복지 수혜자 신분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이켄의 이 주장은 자유주의의 근본인 개인주의 정신을 뜻한다. 오이켄은 1931년 뢰프케와 더불어 ‘독일 신자유주의’를 선언했으며 특히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집단은 양심이 없다. 집단은 어떤 경우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아마도 그가 히틀러의 나치스 깃발 아래 모여든 청년, 지식인들이 최면에 걸려 집단 히스테리를 발산하며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현상을 목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날로 심해져 가고 있다. 권력의 비호를 받는 양심이 없고 자신들의 주장만이 정당하다고 믿는 집단만큼 위험한 집단도 없다. 특히 그러한 집단이 정권 창출의 주역으로 역할을 했을 때 누구도 그들을 법치 안으로 몰아넣기 힘들어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국회 야당 원내대표실 난입, 경찰서 난입, 시장실 난입, 사장실 난입, 교장실 난입, 심지어 공판장 난입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공권력이 무력화 되고 있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 The Road to Serfdom, 1944>에서 집단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전체주의 국가는 극단적인 큰 정부 국가로서 인민의 삶을 계획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인민을 노예로 전락시킨다고 단언했다. 노예란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한 가장 비참하고 비천한 인간을 말한다. 현재의 북한이 이 경우에 처해 있고 남한의 좌파와 좌파 정부 역시 이에 대한 강한 미련을 지니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이유는 개인의 자유 못지않게 시장의 자유를 중시하기 때문이고, 자유주의 체제에서 시장이야말로 인간이 자유를 만끽하고 물질적 부를 창출해내는 무대이며, 자유주의 체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가 없으면 시장의 자유도 없다. 국민이 자유를 누리는 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현장이 시장이며, 시장은 그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웅덩이다. 오늘날 한국의 자유시장 경제는 이념적 권력 정치와 정부의 개입과 간섭으로 질식 직전에 와 있고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대표적 국가다.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면서도 인간에게 부를 가져다주는 카오스(chaos)의 웅덩이가 시장이다. 카오스의 웅덩이가 없는 곳은 시장이 없는 곳, 공산주의 사회다. 그러나 자유주의 사회는 카오스의 바다다. 카오스의 바다와 웅덩이는 디오니소스(Dionysos)의 술, 즉 인간의 자유의지로 채워져 있다. 자유의지로 충만한 시장경제는 부활을 반복하는 디오니소스처럼 호황과 불황을 반복한다. 자유라는 술을 과도하게 마신 나머지 대취하여 광기에 빠졌다가 깨어나기도 하고, 광란의 축제 속에서 혼절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는 것이 시장의 속성이다.”(허화평)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신(神)이다. 과오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최후에는 환희와 충만과 축복을 약속하는 신이자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신이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의 속성으로 인해 시장을 끼고 살아가는 인간은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재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개인의 독립성과 존엄성을 지키게 된다.
맹목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작은 정부, 자유시장 경제를 비판하는 무지한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의 논리는 강자가 시장을 지배하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고전적 자유주의 시대 논리다. 자유방임주의를 반대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법치에 입각하여 자유경쟁과 공정한 거래를 유지하고 재산권, 교환권, 계약권을 보호하며 노동자 권리를 보장하고 독과점과 불공정거래를 방지함으로써 시장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임을 강조하되 정부의 간섭과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기 때문에 정부가 개인과 기업의 경제활동에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고 개입하는 것을 가장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견딜 수 없는 악’의 길로 나아가려는 한국
한국은 서구 근대 사상인 자유주의 사상과 이론이 1945년에 상륙했으나 성숙 단계를 거치지 못했고 신자유주의 사상과 큰 정부, 작은 정부 이론이 소개되거나 교육된 바가 없는 사상적 빈곤 국가이자 정치적 후진 국가이다.
2008년 국제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이 미국의 자본주의가 파탄이 났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경제민주화를 해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소란을 피운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러나 미국의 자유자본주의는 파탄나지 않았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자유시장 경제 체제보다 더 좋은 시장경제 체제가 생겨나지도 않았다. 우리의 경우 집권 여당은 20대 국회가 시작되자마자 당내 ‘경제민주화위원회’를 출범시켰고, 2019년 4월 ‘사회적경제위원회’까지 발족시키면서 반자유시장 경제 체제, 반대기업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본격화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이미 큰 정부 체제인 현 국가 운영체제를 더 큰 정부 체제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최근에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공언함으로써 더 큰 정부 체제로 나아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국가주의, 집단주의, 공동체주의 체제로 나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 정부 출범 이래 진행되고 있는 권력 관리, 경제 관리 행태는 다분히 이태리 무솔리니 정권이 채택했던 ‘조합주의(corporatism)’ 체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무솔리니가 채택한 조합주의는 국가 지도하에 공동생산, 공동구입, 공동판매, 이익공유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조합주의 역사의 뿌리는 로마제국 멸망 후 카톨릭 수도원 중심의 공동체 경제다. 중세 산업혁명 고조기인 1881년 교황 레오 13세(Leo XⅢ)가 신학자, 사회 사상가들로 하여금 조합주의 개념을 제시토록 요청했을 때 1884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 위원회가 내놓은 선언에 의하면 국가가 공동체(community)와 공동체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노동과 자본을 직접적으로 협조시켜가는 구조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사회적 개념이다. 또한 20세기 조합주의에 영향을 준 것은 11세기 전후하여 유럽에서 성행했던 상업, 수공업의 독점적·배타적 동업조합인 길드(guild) 시스템이다.
길드 역시 공동생산, 공동구매, 공동판매, 이익공유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유지되었고,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산업에서의 직접 민주주의 형태를 취한 길드 사회주의가 생겨났다. 조합주의가 카톨릭 전통과 기독교 전통이 강한 국가들인 이태리, 오스트리아, 북구, 덴마크, 영국에서 호응을 받은 것은 조합주의 역사의 뿌리와 관계가 깊다. 이러한 조합주의적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 2014년 당시 여당과 제1야당이 발의한 사회적경제법안이다.
2019년 3월 집권 여당이 발족시킨 사회적경제위원회가 구상하고 있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공개되어봐야 알겠지만 2014년 복사판이라면 이것은 명백한 사회주의에 가까운 조합주의적 경제 체제를 목표로 한 것일 수 있다. 집단주의 경제 체제, 공동체 경제 체제, 조합주의 경제 체제는 전형적인 큰 정부 체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체제는 정치권력, 관료권력의 비대화와 공공재정의 확대를 초래함으로써 개인부담을 가중시키고 부정부패, 권력 남용을 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한국처럼 권력정치 문화가 뿌리 깊은 정치 후진국에서는 지극히 위험한 국가운영 체제다. 국가가 개인을 압도하는 체제는 견딜 수 없는 악의 체제가 된다.
큰 정부 체제의 일반 속성 (집단주의)
- 권력정치와 관료주의 심화
- 더 많은 공공기관
- 더 많은 공무원, 공공 요원
- 더 많은 세금
- 개인과 기업의 자유 위축
- 복지수혜적 의존형 인간
- 국가, 사회 정체와 퇴보
- 결과적 평등주의 유혹
- 전체주의 체제 유혹
대한민국 현 정부의 양상
- 제왕적 대통령
- 법 위에 군림하는 권력정치
- 고질적 관료행정 편의주의
- 날로 증가하는 세금
- 불필요한 공무원, 공공요원.
- 규제과잉
- 기업하기 어려움
- 선택권의 제한
-권력이 역사를 요리
- 경쟁은 불의, 결과적 평등이 정의
- 개인주의는 악, 집단주의는 정의
- 배타적 민족주의
- 민심이 천심으로 둔갑
- 자유 표현의 위험
- 관용과 타협 포기
- 정치보복의 반복
- 과거를 캐먹고 사는 나라
- 신뢰가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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