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규형, 종북(從北)의 계보학
2012.05.24 15:31
從北의 계보학
[강규형, “從北의 계보학,” 조선일보, 2012. 5. 14, A34; 명지대 기록대학원교수.]
1970년대 이전에는 북한의 국력이 남한보다 강했다. 그래서 당시 남한의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비판세력 중 일부는 북한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추종했다. 이런 종북(從北)운동의 대표적인 예가 통일혁명당이었다. 통혁당(統革黨)은 북한의 직접 지도와 자금 지원을 받으며 대한민국 타도를 추구했다. 그 주도자 중 김종태 등 세 명은 사형당했고, 신영복 등은 무기징역 등을 선고받고 복역 중 전향서를 쓰고 석방됐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와서 북한과의 연계를 부정한다. 반체제운동 할 때와 조사받을 때 보여준 그들의 '혁명적 패기'는 어디 갔나? 아니면 전향서가 허위였나? 일본의 적군파와 같은 공산테러운동을 추구했던 남민전(南民戰)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1970년대 결성됐다. 이들은 북한에 도움과 지도를 요청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이들의 비조직적인 행동을 불신했다. 이번 총선에 당선된 이학영(민주통합당) 같은 이들은 혁명자금을 얻기 위해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체포됐다. 한때 북한과 공산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각 사건 관련자들의 솔직한 고백과 명확한 입장표명이 필요하다.
1980년대는 종북운동의 전환점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와 정통성을 결여한 전두환 체제에 대한 분노로 인해 대학가에선 급진주의 담론(談論) 투쟁이 전개됐다. 계급투쟁을 먼저 전개해야 한다는 PD(민중민주주의파)와 민족통일운동을 우선시하는 NL(민족해방파)이 대립했다. 이 투쟁에서 NL이 승리했고, NL 내에서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가 비(非)주사파를 압도하면서 최종 승리자가 됐다. 이들은 처음에는 북한의 지원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났지만, 이후 북한과의 연계가 이뤄졌고, 북의 지원을 받은 민족민주혁명당이 창당됐다. 그러나 '원조' 주사파인 김영환이 주체사상에 회의를 느끼고 민혁당(民革黨)을 해체할 때, "강철(김영환의 필명)이 고철 됐다"고 반발하며 민혁당을 재건한 잔당과 그 후예들이 요즘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통합진보당(통진당)의 당권파들이다.
생전의 황장엽 선생은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줄타기하는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이 북한에서 이론화한 주체사상이 남한에서도 유행할 줄은 몰랐다고 토로했다. 주사파들은 그저 북한 방송을 들으며 베낀 내용을 유인물로 뿌렸을 뿐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민족지상주의'라는 민족 담론의 영향을 받은 한국 청년들에게는 감성적․민족적 접근의 NL이 이론적 접근의 PD보다 더 입맛에 맞았다.
서구의 좌파는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사회민주주의로 향하며 의회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 이론투쟁에서 공산계열, 그중에서도 NL, 그것도 가장 저급한 주사파가 승리한 것은 비극이었다. NL이나 PD 모두 진보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진부(陳腐)한 퇴보(退步)일 뿐이다. 그들의 반미(反美)주의는 "미국만 없었어도 공산통일이 가능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종북'은 원래 민노당 내 PD가 당권파인 NL을 맹비난하면서 분당할 때 사용해서 유행한 용어이다. 이렇게 종북 NL파를 비판했던 심상정 등 PD파가 아무런 해명 없이 종북파와 다시 손잡고 통진당을 만든 것은 원칙 없는 야합(野合)이었고, 지금 통진당 사태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안철수 교수의 부친에 따르면 안씨는 "대한민국에 빨갱이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 한다. 안씨는 훌륭한 벤처기업가이지만 정작 정치와 사상논쟁에 대해선 식견이 전혀 없는 '책상물림'임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아무리 좌파학자들에게 속성과외를 받아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런 안이한 사회인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요즘 통감할 것이다.
그동안 종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실체를 대중에게 잘 숨겨오며 여러 정당에 침투해 들어갔다. 시인 최영미는 '돼지의 변신'이란 시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감방에서 한 이십년 썩은 후에/그는 여우가 되었다… 감옥을 나온 뒤/그를 사람들이 높이 쳐다보면서/… 냄새 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요즘 통진당 NL 당권파가 보여주는 경악스러운 민얼굴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민주주의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들의 진면목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당신들은 계속 자신들이 흠모하는 북한체제식 투쟁을 계속하시라. 그래야 순진한 사람들이 '돼지를 선비로 오인하는' 불상사가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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