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이 '통일정부 수립'을 꿈꾸다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발표한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이하 4·3 보고서)는 4·3사건을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536쪽)으로 정의한다. '통일정부 수립'은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명이 내건 슬로건이었다(534쪽). 남로당이 내건 선전구호가 어떻게 '제주도민의 꿈'으로 둔갑했을까.
노무현 정부 때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만든 '4·3 보고서'는 남로당 폭력에 눈을 감고 정부의 과잉진압을 부각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 '보고서'만 훑어봐도 제주도민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4·3 사건을 일으킨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①남로당 무장대의 지서·우익단체 습격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명이 제주도 내 24개 지서 중 12곳과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소총과 수류탄, 죽창이나 칼, 몽둥이로 무장했다. 요구 사항은 단선(單選)·단정(單政)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와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 중지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무장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남로당이 뿌린 삐라만 봐도 사건 성격을 알 수 있다.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매국 단선 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무장대 습격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신엄지서 관내 구엄리였다. 무장대는 우익인사의 10대 딸 2명까지 잔인하게 살해했다. 구엄리 숙소에 있던 경찰관 1명은 칼과 죽창에 열네 곳이나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4월 3일 하루에만 경찰 4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8명이 죽었다. 무장대도 2명 죽었다. 4·3이 피비린내 나는 폭동으로 시작됐다는 얘기다.
②대한민국 정부 수립 위한 5·10 총선거 반대 투쟁
5·10 총선거가 가까워질수록 테러는 계속됐다. 선거관리사무실을 습격해 선거인 명부를 탈취하거나 선거관리 요원을 살해했다. 무장대는 투표 며칠 전부터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 보내 선거를 거부하게 했다. 투표 당일인 5월 10일 중문·성산·표선·조천면 등 투표소가 습격당한 곳도 많았다. 제주도 선거구 3곳 중 북제주 갑·을 2곳은 투표자 미달로 선거가 무효가 됐다.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남게 됐다.
③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지하선거
남로당의 다음 목표는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대의원 선출 지하선거였다. 5·10 총선을 통일정부 수립을 막는 단독선거라고 공격한 남로당은 7월 중순부터 남쪽 주민들을 이 지하선거에 투표하도록 내몰았다. 무장대는 제주도 주민들을 강요해 백지에 이름을 쓰게 하거나 손도장을 받아갔다. 그해 8월 월북한 제주도 무장대 총책 김달삼은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5·10 선거를 거부한 무장대의 '전과' 등을 설명했다. 마무리는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였다(보고서 237~240쪽).
④'통일정부 수립'은 남로당의 정치 선동
4·3 사건이 통일정부 수립 운동이란 건 남로당에나 해당하는 얘기다. 무장대가 내건 '단선·단정 반대
'와 '통일정부 수립' 슬로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정치 선동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은 제주도민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싸우다 희생당한 것처럼 말했다. '4·3 보고서'는 제주도민 희생자를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한다. 제주도민은 이 많은 희생자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사(戰士)라고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