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장기판의 卒로 보는 대통령
[이석연, "국민을 장기판의 卒로 보는 대통령," 조선일보, 2019. 9. 10, A27쪽.] → 좌파독재
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박근혜라 약칭)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에 박수를 보내고 탄핵에 찬성하는 입장에 섰던 사람이다. 국민의 소리를 장기판의 졸(卒)로 보는 박근혜의 불통과 독선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무엇보다 그런 권력의 횡포를 가능하게 하는 대통령제(제왕적 대통령제)를 끝낼 때가 됐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의 국정 농단 탄핵 사유는 그렇게 중한 헌법 위반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국민은 권력을 전횡하는 대통령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고 헌법재판소는 그런 국민의 여망을 받들어 대통령의 파면을 선언하였다. 사실 촛불 집회에 동조했던 대다수 국민이 원한 것은 제왕적 대통령의 탄생을 원천 차단하는 현행 헌법의 대통령제 폐지로서 박근혜 퇴진은 그에 따른 부차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직후 먼저 했어야 할 일은 헌법의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개헌을 단행하여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고 새로운 국가수반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촛불 혁명의 완성이다. 대통령과 측근들은 이 정부는 촛불 혁명으로 탄생했다고 자화자찬하곤 한다. 아전인수 격의 촛불 혁명 해석이다. 오해 마시라.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진정한 정부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의하지 않는 헌법에 의하여 탄생할 정부이다. 문재인 정부는 과도기적 성격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현행 헌법이 정한 임기 종료 때까지 집권하겠다는 것은 제왕적 대통령을 5년 더 연장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직 촛불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의 권력 행사 과정에서의 독선과 불통은 역대 대통령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본다. 이번 조국씨의 법무장관 임명 강행에서 보듯 그간 문 대통령은 인사청문회 결과 부적격 시비에 휘말려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한 20명이 넘는 고위 공직자를 자신의 뜻대로 임명했다. 전무후무할 일이다.
흔히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고 한다. 잘못된 표현이다. 대통령의 인사권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이 위임한 권한이다. 헌법의 수권에 따라 제정된 국민의 대표 기관이 행한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임명 강행함은 헌법 위반이라고 본다.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는 인사를 발탁하라. 그것이 헌법의 정신이자 국민의 가장 큰 심부름꾼인 대통령의 직무다. 내 주변에는 문 대통령의 공직 배제 5대 원칙(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탈세, 위장 전입, 논문 표절) 공약에 공감해서 표를 던졌다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고자 한다. 자기들만이 정의를 독점하고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편협한 우월 의식, 영웅주의에서 벗어나라. 참으로 소가 웃다가 코뚜레가 부러질 일이다. 5공 전두환 정권도 '정의 사회 구현'을 국정의 첫 번째 목표로 내세우지 않았던가!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탄탄하지 않으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수년 전 박근혜에 대한 30%대의 지지율이 요지부동처럼 보이자 당시 유시민씨가 박근혜가 나라를 팔아먹어도 지지할 사람들이라고 발언한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지지율이 3~4%대로 무너지는 데는 6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 현대 정치사의 특징은 과거 정권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려는 데 있다. 전 정권을 부정하면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려다 보니 국민적
에너지 낭비와 소모적 국론 분열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금까지도 적폐 청산이라는 초헌법적 개념을 내세워 과거 특정 정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적절히 환기시키면서 국민 편 가르기에 나서고 있다. 문 대통령의 국정 운영 행태는 현행 헌법의 맹점인 제왕적 대통령의 행태를 이미 충분히 답습하고 있다. 불통과 독선적 제왕이라는 그림자가 문 대통령 뒤에 붙어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