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10일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5월 광장에서 만난 철강 노조원 카를로스씨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평일 오후임에도 그처럼 전국에서 몰려든 지지자가 수십만 명에 달했다. 노조원이 주축이다. 노조 깃발이 광장을 덮었고, 폭죽과 북소리가 도심을 점령했다.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상점들도 모두 철제 셔터를 내리고 휴업했다. 끊임없는 전세버스 행렬이 지방에서 노조원들을 실어날랐다. 이날 알베르토 대통령은 그들을 향해 "실업수당을 2배로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지지자들은 자정까지 광장에서 자축연을 벌였다. 거리에서 만난 한 시민은 "앞날이 캄캄하다"고 했다.
아르헨티나는 팜파스 대평원을 기반으로 한 농축산업의 발달에 힘입어 1930년대까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1인당 총생산 기준) 지위를 누렸다. '남미의 진주'로 불리며, 가난한 유럽 이민자들에게 꿈의 나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작년 1인당 생산은 71위로 떨어졌다. 학계에선 이런 극적인 반전을 '아르헨티나의 역설(Argentine paradox)'로 부르며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국민 35%가 배곯는 국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남쪽의 빈민가. 너덧 살 정도 된 아이 3명이 가축 분뇨와 쓰레기가 둥둥 떠 있는 흙탕물 웅덩이에서 놀고 있었다. 그 옆에는 돼지와 당나귀들이 먹이를 찾아 쓰레기 더미를 헤집고 있었다.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마을 전체에 악취가 진동했다. 건장한 청년들은 평일 낮인데도 할 일 없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동네 안쪽은 마약과 강도의 온상이라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300여 주민은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비의 80%를 해결하고 나머지는 폐지를 팔아 메운다.
보조금 재원은 세금을 올려 뽑아내고 있다. 정부는 올해부터 해외 사용 카드액의 35%를 세금으로 걷겠다고 발표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 정치학과의 루이스 토네이 교수는 "정부가 노조와 영합한 포퓰리즘을 펼치는 동안 빈곤이 더욱 심화돼 통제 불가능한 지경이 됐다"고 진단했다.
◇화폐를 못 믿어 물물교환
부에노스아이레스 서쪽에 위치한 위성도시 산후스토의 광장에선 주민 20여명이 좌판을 깔고 설탕·옷·주방 세제 등을 흥정하고 있었다. 5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이런 물물교환 시장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에만 적어도 50여곳이 성행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가브리엘라씨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장난감과 주방 세제를 들고 나왔다. 그는 "물가 급등으로 돈으로는 생필품을 살 수 없어 물물교환을 한다"며 "주말 오후엔 300~400명이 모여 광장이 꽉 찬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는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치솟는 국가 비상사태를 맞고 있다. 긴축 정책을 실시하던 우파 정부가 물러나고 작년 말 좌파 정부가 들어서자 해외 투자자들이 아르헨티나에서 일제히
철수했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작년 물가 상승률은 54%였고, 올해도 50%를 넘을 전망이다.
아르헨티나는 2018년 IMF로부터 빌린 570억달러를 갚지 못하면 국가 부도를 맞는다. 민간 경제연구소 매크로뷰의 파군도 마르티네스 수석연구원은 "빚을 갚아 부도를 피하는 게 급선무인데 돈을 풀어 허기부터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